다시 본문을 보면
한 덩어리는 한 덩어리가 아니므로
한 덩어리라 이름 하나이다.
수보리야, 한 덩어리의 모양이란 곧 말할 수 없거늘
다만 범부들이 그것을 탐내고 집착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인도의 유마거사 유명하다 했죠. 유마거사가 병이 났다는 얘기를 듣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대표로 여러 사람을 보냈지만, 다 마다했고, 드디어 문수보살을 병문안하러 보냈습니다. 여기서 병문안이라 하지만, 꼭 병문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문답. 법거량을 얘기하는 겁니다. 어느 스님한테 병문안 갔다 이러면 그냥 병문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가서 진리에 대해서 더러 문답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어요.
거기 가서 문수보살이 인사를 하는 중에 유마거사가 대답을 했어요. 유마거사의 대답은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둘 아닌 법문, 불이법문이라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유마거사가 병이 났던 핑계로 사람을 오게 했는데, 유마거사는 거기서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 법문의 이름이 불이법문이라 이 말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십시오.
중생이 아프니 이 유마도 아픈 것입니다.
나의 병은 중생의 병이 다 나으면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
이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 외우겠습니까? 예, 이것이 그 유명한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입니다. 딴 거 앞에 다 잊어버리더라도 “아, 이 세상은 둘이 아니라 하더라. 불이법문은 하나라 하나다. 세계일화라 했거든요. 세계는 한꽃이다. 둘이 아니라 하더라.” 그게 아주 핵심이다 이해하면 되요.
여기서 또 더 간추려서 말하면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이거야. 가족이 아프면 자식이 되었든 배우자가 되었든 가족이 아프면 본인이 아파야 되요.
가족이 아픈데 지가 안 아프면 그 사람 가족이 아니지요. 마음이라도 아파야 된다 이 말이잖아요.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왜냐? 중생과 나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한 덩어리의 모양이라. 그렇지만 한 덩어리 모양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면. 그러면 그 아래 각론을 좀 보시겠습니다.
불신은 본래 무위지만 근기에 따라 응하면서 거래를 보인다.
그래서 일신에서 삼신을 나타내고
또 삼신에서 미진수의 몸을 나타내시며
일법에서 삼승을 펴시고
이 삼승은 앞으로 공부를 법화경 공부를 하시게 될 텐데, 법화경 공부를 하다보면 보살, 성문, 연각이라 이런 개념이 나와요. 보살은 육바라밀을 잘 닦아서 부처가 되는 그런 수행자를 말하고, 그 다음에 성문은 사성제법문을 잘 들어서 지혜를 얻어서 아라한이 되는 그러한 수행자를 말하고, 또 연각은 참선 기도등 내면적 수행을 통해서 12인연법이라든가 이런 것을 깨쳐가면서 바로 부처의 경지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다. 그랬습니다.
아무튼 삼승, 보살승 성문승 연각승, 이것도 부처님께서는 다 방편으로 얘기를 하시는데, 바로 여기서 얘기하는 것처럼 일법에서 삼승을 펴셨다
삼승에서 미진수의 법을 펴신다.
진신과 응신은 다름이 없고 차별이 있지 않다.
마니주는 그 방향에 따라 각각 나투어서 오색을 비추는 것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니주에 실지로 오색이 있다고 착각한다.
바로 이 마니주라고 하는 하나의 몸에서 온갖 신통이 일어날 뿐이죠. 하나다.
그 아래 보시면
삼승이 일승 밖의 것이 아니고
일승 또한 삼승 밖의 것이 아니므로 일합상이 된다.
그런데 만일 마음에 얻을 바가 있으면
이미 일합상이 못된다.
그런데 마음에 얻을 바가 없으면 이미 일합상이다.
만일 마음에 얻을 게 있으면 이미 일합상이 못된다.
본래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님이 둘이 아니라 모두 한 덩어리의 세계다.
이 한 덩어리의 세계란 것도 여래의 경지에서 보면 거짓된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합상에 집착해도 안 되는 것이다.
일합상은 생각으로 따져서 될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 탐착하여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자비와 지혜 두 법을 행하므로써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다.
끝부분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자비와 지혜 두 법을 행하므로써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다./
부처의 자리가 그렇다는 말이고,
/세계와 미진이 하나일 뿐 다르지 않아
보신과 응신도 또한 그러하니라.
인도 아니고 과도 아니거니
무엇이 뒤이고 무엇이 먼저이리오.
모든 일은 한 덩어리로 통하나
이치인즉 둘 다 버려야 하나니
무생의 길을 통달하고자 할진댄
응당 본원을 알지니라./
그랬네요. 예. 제가 2014년 5월 28일날 무문관 안에서 지은 시 한수를 소개하겠습니다.
불용생명지활동_부처의 용은 생명의 활동으로
생사거래주인사_나고 죽음, 오고 감이 주인공의 일이로다.
요설즉설묵즉묵_말하고져 할 때 말하고, 침묵하고져 할 때 침묵하노니
불견자혜즉심불_자비지혜를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아서 지금 쓰는 이 마음이 부처로다.
예. 이 한글 부분을 다시 또 읽어보겠습니다.
부처의 용은 생명의 활동으로
나고 죽음, 오고 감이 주인공의 일이로다.
말하고져 할 때 말하고, 침묵하고져 할 때 침묵하노니
자비지혜를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아서 지금 쓰는 이 마음이 부처로다.
예. 일합이상이라 했습니다. 이치와 모양이 하나다. 우리는 이 하나라는 생각마저 놨을 때 완전한 하나가 된다. 이런 얘기입니다. 마치겠습니다.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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