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이 뭐냐 하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소위 아상이라고 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고 나를 우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아상이 커지기 시작하면 가는 곳 마다 불만덩어리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 아상은 누가 갖는 걸까요? 누가 주지 않았는데 내가 갖는 거예요.
자, 예를 든다면 우리 보살님들이 시집가시죠. 시집에 처음가면 처음 가는 그 순간에 그 집안이 낯설어요? 안 낯설어요? 낯선 데 그 시집에 있는 사람이 하나같이 다 엄하면 살 거 같아요? 못살 거 같아요? 못살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 근엄한 게 시집인데, 그 시집갔을 때에 누군가가 내편이 되어서 웃어주고 다독거려주면 그가 영원히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했던 고마웠던 부분이 시간이 갈수록 본인의 영역이 넓어져요? 안 넓어져요? 넓어지기 시작하잖아요. 시어머니도 나이도 들고, 떡두꺼비 같은 손자도 낳고, 또 돈도 좀 몇 푼 벌고, 본인의 존재감이 점점점점 생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옛날에는 나한테 눈빛만 줘도 고마웠던 사람들이 고마움이 다 없어져요? 안 없어져요? 너무 당당하게 변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내가 이 집에 와서 한 게 얼만데, 너희들이 나한테 감히.” 이런 쪽의 권리가 그 권리 행사가 바뀝니다. 그 권리행사가 바뀌는 그 부분은 결코 행복하지가 않는 겁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게 뭐에요? 하심이에요. 나는 이 집에 왔을 때 그 초심을 잃지 않고, 항상 눈빛만 줘도 행복했던 그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는 평생을 살아도 시집이 귀하고 평생을 살아도 행복해 집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 스님들이 출가를 해서 살 때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런 얘기를 여러 번 우리 불자님들한테 하는데, 처음에 제가 출가를 했을 때에 나보다 엄청 놓으신 스님이 당시에 부산 상광사 주지를 하셨어요. 상광사 주지를 하시는 그 스님이 나하고는 직접적으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어요.
어느 날 제가 구인사에 큰스님 모시고 있을 때인 데, 제가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 대문에서 문 지켰었거든요. 그 문지키고 있을 때 그 스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데요,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어떻게 저런 높으신 스님이 내 이름을 다 알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해서 그것을 항상 감사하게 마음을 갖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저도 몇 십 년 살다보니까요, 이젠 어떤 스님이 내 이름을 그냥 부르면 기분이 나빠요. 꼭 반드시 무슨 스님이라고 불러야 기분이 좋아요. 옛날엔 그냥 “누구야”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었는데, 이제는 아주 그것도 퉁명스럽게 부르면 기분 나쁘고 꼭 "월도 스님" 이렇게 불러야 기분이 좋거든요.
그럼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아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상이 크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부분을 내려놓는 겁니다.
그냥 모든 대상을 존경스럽게 보고
내 마음이라는 자체, 내 스스로가 그 억울한 마음,
내 스스로가 대접받고 자라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우리는 하심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는 겁니다.
옛날에 부처님 당시에 상불경보살이라는 보살이 있었습니다. 이 상불경보살은 하심의 왕이었습니다. 이 분은 만나는 사람마나 그 누가 되었든지 간에 항상 그렇게 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당신은 반드시 부처가 될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이렇게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서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미래의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난 당신을 항상 이렇게 공경합니다.” 라는 언행을 하고 다니니까, 어떤 사람은 그를 두드려 팼어요. 그렇게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그는 항상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불성을 가진 부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데도 그는 결코 그를 원망하지 않고, 항상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미래의 부처님입니다.”라는 마음을 내는 자체가 바로 하심입니다.
하심은 즉 수행입니다. 수행의 목적이, 바로 하심을 완성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불교의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금강경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무상즉불이요,
유상즉 중생이라.
마음에 상이 없으면 이미 그는 부처요,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잘났어도
그에게 아상이 있으면 그는 중생이다.
우리가 가야할 최종의 목적지는 바로 그 아상이라고 하는 것을 없애서 그 아상의 존재를 완전히 내려놓는 수행의 장르가 하심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나가다보면 누가 주지 않은 권력을 내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에 엉뚱한, 주지 않는 권력을 가지고 난리를 쳐서 요즘 우리가 난리를 내요? 안내요? 이런 것을 보면 너무나 시건방졌거든요. 뭐 철저하게 자기들은 금수저 처럼 판단하는, 그리고 금수저로 거들먹거리는 그런, 여러분 아무리 부자라고 하더라도 도장하나 잘못 찍으면 거지되는 겁니다. 그죠? 그래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거지씨앗하고
부자씨앗이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
부자가 망하면 거지야.
거지가 돈 벌면 부자입니다.
아시겠죠? 거지 씨앗과 부자씨앗이 따로 있는 게 아니야. 그런데 어찌 거들먹거리는 아상을 가지고 세상을 살겠습니까? 세상은 희망입니다. 결코 기죽을 일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부자 쳐다보고 망할 때를 기다리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너하고 나하고 씨가 다르다는 생각은 하지 맙시다. 나도 돈 벌면 너처럼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되, 너도 그렇게 건방진 부자로 살지만 아상에 갇혀 있는 척하는 살지만, 나는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아무리 좋은 권력 자리에 올라가도, 나는 너 같은 아상에 갇혀 있는 중생으로 살지 않고, 하심으로 부처가 되겠다는 삶을 사셔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불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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