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죠. 내가 누군가를 돕 되, 그 진정성이 있어야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 대상이 똑같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 그 전쟁의 참가한 용사를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훈련이 잘 된 용사를 내 군졸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그 훈련 상태가 아주 시원찮은 병사를 내 군졸로 받아들일 것인가.
훈련이 잘 된 병사였을 때는 반드시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병사는 아무리 쪽수가 많다 한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높겠습니까? 적겠습니까? 적은 거죠. 그렇듯이 내가 물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베풀어 행했을 때 그 행한 대상이 그를 통한 결과로 누구를 이익 되게 할 건가라고 하는 결론까지 연결이 되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보시는 나 아닌 누군가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서 던지는 모든 행위가 보시일 수 있습니다. 짐승을 살리는 것도, 소위 말하는 이웃을 살리는 것도, 또 수행자를 살리는 것도, 가난한 이웃을 살리는 것도. 그래서 모든 것이 다 보시일 수 있지만 그 보시의 대상을 똑같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을 살려서 영원히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고, 영원히라고 하는 대상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했을 때 그 공덕의 크기는 무척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보시와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보시와 지나가는 이웃에게 올리는 보시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공양의 보시를 받는다면 일체중생의 생명을 걱정하는 부분의 힘의 에너지가 될 것이고,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다면 또한 이체중생의 가르침의 대상에게 베푸는 에너지를 얻게 하는 공덕 또한 클 것이며, 또한 지나가는 짐승에게 보시를 한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보시일 수 있겠으나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에게 보시를 하느냐? 승단에게 보시를 하느냐? 불보에게 보시를 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면 축생에게 보시를 해도 공덕이 있고, 모든 대상에게 다 보시를 해도 다 공덕이 있는데, 그 공덕 중에 보시의 공덕은 첫째 수명을 길게 하는 복덕을 누릴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이 있어요.
옛날에 이런 말이 있어요. 어떤 산중에 큰 스님이 어느 부잣집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천도재를 부탁을 했어요. 천도재를 부탁을 하니까 스님이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서 돈을 가지고 있었겠죠. 49재 날이 되어서 천도재를 준비하기 위해서 장에 내려갔어요. 내려가다가 어느 거지가 자식들을 데리고 얼어 죽을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고 너무 불쌍해서 그 돈을 톡톡 털어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절로 돌아왔습니다. 49재 날이 되었는데 장을 봐서 오셔야 될 스님이 장을 못 봤기 때문에 그냥 3색 나물을 올려서 초라한 재를 준비를 했습니다. 49재를 지내는 동안 그 엄청난 부자는 내가 넉넉하게 제사를 지내달라고 돈을 드렸는데, 그 돈은 다 어디로 보내고 이런 알량한 음식으로서 제사를 지내나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궁금하지만 절대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제사가 다 끝나고 난 이후에 큰 스님께서 “참 오늘 천도를 잘했다.” 그러시거든요. 그러니까 이 신도입장에서는 궁금했습니다. “뭘 잘했단 말인가?” 라는 것을 궁금해 하니까, 그때 큰스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 어머니의 재를 위해서 가지고 온 그 돈을 굶어 죽어가는 몇 생명을 그들을 위해서 재를 했기 때문에, 아마 너의 어머니의 공덕은 무량한 공덕을 이루어서 아마 세세생생 천상락을 누릴 수 있는 큰 천도를 했으니 얼마나 큰 공덕이고, 얼마나 멋진 천도재였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이 제자는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시공덕이라는 자체는 그 돈을 통해서 그 물질을 통해서 누군가를 주면 누군가의 생명을 건지는 것에서 끝나는 도량을 갖고 있는 대상도 있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애쓰는 대상은 다르기 때문에 그 보시의 대상은 무척 중요하다.
또한 보시를 하면 용모가 수해진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면 기분이 좋아요? 안 좋아요? 우리는 한번 칭찬 받을 일을 하면 또 다른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못된 짓을 한번 하고 나면, 못된 짓을 합리화 시켜서 또 다른 못된 짓을 반복해내는 게 중생의 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지나가면서 누군가가 굶주리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보시를 하고 나면 내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또 여러분이 절에 오셔서 부처님 불전함에 정성을 표하고 가면 발걸음이 가벼워요? 안 가벼워요? 가다가 조금만 좋은 일이 생기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내가 부처님 전에 복을 지어서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까? 안 듭니까? 칭찬은 또 다른 칭찬을 내고 싶어 해요. 용무가 수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흔히 보면 우리가 부처님 도량에 와서 보시를 하거나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 가고 간 다음에 뭔가 조금 좋지 않은 일이 생겨도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어요. 뭐라고? “야, 내가 부처님 전에 보시를 이만큼하고 시주를 이만큼 했으니까 이 일이 요만하지,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더 큰일이 났을 거야.” 라는 생각을 합니까? 안합니까? 이 사람은 극락입니까? 지옥입니까? 하나의 보시를 행하는 순간에 우린 정토에 갈 수 있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용무가 수려해질 수밖에 없어요. 내 마음이 행복해지니까.
그다음에 이 생활의 삶은 보시를 많이 하면 힘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많은 사람들이 날 좋아해요? 안 좋아해요? 힘은 내가 갖고 있는 힘만 힘이 아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많이 좋아해주면 그게 힘입니까? 아닙니까? 그게 힘입니다. 그래서 힘이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 다음에 이 보시를 많이 하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여러분, 얼마나 행복해 지는 겁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신세를 졌으면 누군가에게 뭔가를 갚아야 되는 숙제거리가 생기지만,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면 그 베푸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나는 마음이 온화해지고 마음이 청정해지며 그 청정해지는 집중의 현상이 길어졌을 때 그것이 지혜로서 세상을 살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에 부족함이 없는 부분이다.
고로 대상은 가리지 않되, 그 대상은 무량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인 보시를 하는 것과, 스님에게 보시를 하는 것과, 부처님전에 보시를 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기회가 왔을 때는 결코 능력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능력이 있거든 최선을 다해서 보시를 실천하고 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불자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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