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우리나라의 사회적 구조의 폐해라고 이야기를 해도 될 겁니다. 70대 정도의 어르신이라면 겪을 고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에요. 위로는 어른에게 효도했고, 아래는 자식을 가르치고 먹이기 위해서 굶주렸습니다. 온갖 고통을 다 겪어내셨죠. 이제 그들을 키울 만큼 키우고 먹고 살만큼 배려를 했는데, 당신이 어른이 되고 나니까 이 사회는 효도라는 부분이 없어져버렸어요. 어른이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사회적 폐해가 지금 작용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분노심이 분명히 작용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의 삶은 농경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고통의 고통을 거듭해가면서 우리나라를 이 만큼 먹고 살게끔 만들어준 희생의 가치를 그들이 더 했을 거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젊었을 때 어른 앞에서는 헛기침도 한번 못했고, 자식이 있으되 자식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어른 공경을 했던 것이 우리 어르신 세대들의 삶이었습니다.
감히 그 당시에는 담배를 한 대 피워도 어르신들 앞에서는 움츠리고, 반드시 어르신들을 만나면 옆길로 돌아서 그들에게 양보했던 것이 그들 세대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르신이 되고 난 후의 삶을 보니까 젊디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들이 사회의 주역처럼 큰 소리 치고 있고, 어르신들이 설래야 설수 있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렇게 피해 의식이 강한 것이 현실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 자리 하나에 큰 소리를 냈겠습니까? 그 어르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자리는 그 자리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적 사회적 구조가 어른을 대접하지 않는 여건이라고 하는 자체에 분노를 표한 부분은 아닐까 싶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부분의 방송을 하면서 어르신들은 어르신들 나름대로, 지금 화가 난다고 해서 그 화라고 하는 부분을 그냥 겉으로 표현을 하다보면 영원한 왕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못 잊는다고 이 갈아 봐야 누구 손해입니까? 우리 어르신들이 조금은 마음을 돌릴 필요가 있죠. 시대가 변했어. 시대가 급변했어. 그 시대의 급변 중에 나는 그냥 한 순간 희생을 할 수 밖에 없는 세대라고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젊은 불자들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 어르신들의 분노심을 우리가 조금 수용해 담을 수 있는 역지사지의 그런 마음을 내어서 그 어르신들을 더욱더 공경하고 배려할 수 있는, 물질적으로 배려하거나 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회적 분위기 자체가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공생공존 할 수 있는 좋은 경우의 수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세대차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요즘은 세대 단절이라는 얘기까지 되고 있습니다. 어른이야 죽든지 살든지 우리만 살면 된다는 이기적 사고가 지금 만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일수록 우리 어르신들은 어르신들 나름대로 스스로의 인생가치를 회고할 수 있는 부분의 삶으로 위안을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랬어. 우리는 그랬지만, 우리가 이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이 편하게 살 수 있어.” 라고 하는 부분으로 조금은 자존감이라고 키워갈 수 있는 삶의 장르를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냥 그렇게 억울해하지 말고 절에 오셔서 명상을 통해서 과거도 회상해보고 진정한 삶의 가치도 뭘까? 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기도 하고, 또 스님들과 차도 한잔 하면서 세월에 대한 이야기도하고, 그리고 부부와 더불어서 여행 같은 것도 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응어리라고 하는, 화라는 것을 싸고 앉아서 해결하려다 보면 나중에 화병이 생겨 죽습니다. 이 분은 자꾸 풀어내려고 애쓰는 부분, 구인사 같은 데 가서 4박5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또 우리나라에 좋은 사찰들이 무척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법화경, 금강경 같은 경전 봉독도 좋은 것 같아요. 전생에 짓고 온 업의 일환으로서 이런 부분의 분위기에 내가 태어나서 평생 고생만 하고 갔지. 그렇다면 선업의 주인공이 되어서 경전이라든가 부처님을 예찬하는 이런 부분들의 행위에 동참해보면 그 나름대로 편안함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두 분께서 그래도 아내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퍽 다행스러워요. 그리고 보살님이 지금 남편의 거칠어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봤을 때, 역시 부부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어떤 경우를 보면 “너 늙어서 보자.”라고 하는 쪽으로 우리 보살님들이 남편한테 협박도 한다는데, 그러지 말고요. 늙거나 젊거나 끝까지 함께하는 게 부부 아닙니까.
따뜻하게 손잡으시고 100년 해로의 길을 가되, 억지로 화를 참는 주인공이 되지 마시고, 손잡고 이런 도량에 오셔서 부처님 전에 같이 참배하고, 전생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도 하고, 내생을 한번쯤 더듬어 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면 오히려 그런 행위가 전화위복의 기화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두 분 행복한 여정, 100년 해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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