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께 인사를 올리자 오조가 물었습니다.
“너는 어느 지방 사람이며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내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영남 신주의 백성입니다.”/
그러니까 저 땅끝이에요.
/멀리서 와 스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오직 부처 되기를 바랄 뿐,
유구 작불/
오직 작불
/부처 되기를 바랄 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너는 영남 사람으로/
그 중간의 길에 대유령이라고 있어요. 높은 고개
대유령 밑을 영남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도 조령 밑으로 영남이라 그러지 않나요?
비슷하네요.
/영남 신주의 백성입니다.
너는 영남 사람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렇게 한번 한 번 치는 거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비록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본래 남과 북이 없습니다.
인수, 수는 비록입니다.
사람한테는 수_ 비록
유남북 남북이 있습니다마는
불성무남북_ 불성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사랑은 현상이죠.
현상에는 남북이 있지만 본질에는 남북이 없습니다.
벌써 지금 본질을 알죠?
답변이 지금 카테고리를 딱 구분해서 말을 하잖아요.
현상의 카테고리와 본질의 카테고리가 다르다는 걸 딱 이야기하잖아요.
본질은 평등하고.
여러분 본질은 평등해요. 그죠?
현상은 개성이 있죠.
현상에 있는 개성을 자유라 그래요.
현상에는 자유고 본질에는 평등이에요.
그러면 현상에서 평등하게 하려고 하는 거는
카테고리 미스테이크죠.
맞나요?
그래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거예요.
현상에서 평등하려고 하기 때문에.
본질에서 평등하다는 걸 깨달아야 되죠.
현상에는 달라요.
본질은 평등해요.
현상에서는 자유인데, 본질은 평등해요.
그러면 이것을 알면
자유와 평등 사이에 모순이 생기나요?
우리가 각자 현상에서는 달라도
본질에서는 평등하다.
모순 아니잖아요.
근데 이거를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를 해서
현상에서 자유하고 평등을 같이 하려고 하면
불가능하죠?
본질을 깨달으면
자유이면서 평등해.
파도끼리는 서로서로 달라요.
바닷물이라고 하는 사실은 평등하잖아요.
너와 나는 현상으로서 다르지만
너도 물이고 나도 물이고
이렇게 되면 대립이 사라지죠.
그러니까 이 세상의 평화는
본질을 깨달아야만이 가능해져요.
지금 이해되나요?
구조적으로.
그래서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정치 철학의 과제는
깨달아야만이 해결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공부를 하는지 몰라.
자유와 평등은 영원히 정반합이다.
헤겔 사상에 의하면
정반합하면
합이 다시 정이 되어서
또 반, 끝없이 갈등은 이어지는 구조다 이거예요.
그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현상에서는 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그러나 본질은 다 같다는 걸 깨닫게 되면
이게 조화를 이룬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 몸이 현 인류의 수만큼의 세포로 돼 있어요.
우리 몸이 지금 80조 되잖아요. 인류가
우리 몸이 80조의 세포로 지금 돼 있어요.
그러면 우리 몸의 눈의 세포하고
발바닥 세포하고 다를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같은 하나를 이루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관계와 같다 이거죠.
우리 몸의 각 세포들이 역할이 다 다르다.
생긴 것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지만
공통의 하나의 목표를
같은 생명체 유지에 대한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 본질을 깨달으면
본질로서 통일을 이룬다 이거죠.
/사람에게는 비록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에는 본래 남과 북이 없다/
이 말을 가지고 제가 지금 옆으로 좀 얘기를 했는데
이 말 한마디에도 안목이 바로 들어가 있지 않나요?
현상에는 남과 여가 있어요.
근데 의식은 남자예요. 여자예요?
없죠.
그러니까 지금 이런 말을 딱 들으면
남북 대신에 남녀를 넣으면
공부에는 남녀가 구분할 필요가 전혀 없죠.
그래서 우리들은 과감하게 모든 기존의 선입견을 타파해야 돼.
이런 말을 가지고.
남녀노소 없다 이거예요.
/누구나 다 같이 불성에는 없다./
불성이 뭐냐?
지금 보는 거예요.
그냥 딱 한마디로.
불성이 뭐냐?
여러분 지금 보입니까?
그거예요.
그러니까 큰 스님들이 시작할 때
이렇게 주장자 한번 보이잖아요.
그거 그걸로 끝이다, 이거예요.
혹시 모를까 봐
*!
듣는 것까지도 한번 도파심에서 했을 뿐이지
지금 보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여러분 보세요.
지금 보고 있죠? 맞아요?
보여지는 현상은 환상처럼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어요.
근데 보는 것은 안 변해요.
이게 깨달음의 다예요.
보여지는 것은
이렇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있는데
보는 이것은 안 변한다.
그래서 보는 이것이
지금은 생시라고 하는 현상을 보고 있고
밤에는 꿈이라고 하는 현상을 보고 있고
생시에도 지금 깜빡 한 생각 일으키면
생각 속에 세계.
생각 속에 세계도 있죠?
우리 밤에 꿈을 꾸나
지금 생각한 생각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같아요.
근데 꿈을 보는 거 하고
생시를 보는 거 하고
생시 속에서 지금 생각을 일으키면
생각이 보이지 않나요?
같아요? 틀려요? 보는 것은?
보는 것은 같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본질이 뭐냐 할 때
나의 본래면목이 뭐냐 할 때
변하지 않는 나다 이거예요.
변하지 않는 나.
변하지 않는 나는
지금 보는 거다 이거예요.
근데 보는 이거를 다시 볼 수는 없어.
이 말은 보여지는 것은 현상이라고 하는 거고
보는 것은 본질인데
본질은 현상처럼 보여지지는 않아요.
이건 분명히 카테고리가 달라요.
그래서 깨닫는다고 하는 거예요.
근데 본질이 있다는 증거는 현상이에요.
기회 날 때마다 반복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꿈에 꿈속의 세상이 나타났죠.
그러면 꿈속의 세상에 대한 기억을 하죠.
그러면 보세요.
꿈을 깼는데 기억은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면 꿈속의 사람이 보던 거라면
그 기억이
꿈속의 사람이 보고 기억하는 거라면
꿈을 깨면 꿈속의 사람은 사라지잖아요.
근데 기억은 있잖아요.
이 말은
실제로 꿈을 보는 것은
꿈속의 사람이 본 게 아니고
꿈을 꾸는 사람이 봤다 이거예요.
똑같다.
생시도 똑같다.
생시도 생시라고 하는 현상을 지금 보고 있는데
이걸 기억하죠? 기억하시잖아요?
그 기억하는 주체가 뭐냐? 이거예요.
생시 속에 나타난 김 아무개가
사실은 보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이 현상 전체를
이렇게 꾸고 있는 본질이
지금 보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하면 본질이 현상에 개입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가?
경험하고 있는 거다.
보는 경험, 듣는 경험, 느끼는 경험, 그리고 아는 경험
경험을 대표로 하면 견, 문, 각,
각은 촉각, 미각, 느끼는 거
그리고 지, 아는 거.
견문각지
이게 본질이 현상을 경험하는 거예요.
맞습니까?
그러면 견문각지의 주체
이 경험의 주체
현상이라고 하는 이 경험의 주체가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은
꿈을 꾸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꿈속에 지금 개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꿈을 왜 꾸는가?
꿈을 안 꾸면 본질이 경험할 수가 없어.
자기밖에 없어서.
자기밖에 없으면 경험 못 하잖아요.
그걸 모르니까.
그래서 꿈을 꾸는 거예요.
그래서 현상을 지금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왜냐, 경험하려고.
그리고 희로애락 애오욕 온갖 생각
전부 경험하고 있는 중이에요.
본질이.
그러면 왜 경험할까?
하여튼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네.
이 세상에 덩그러니 자기밖에 없으면
경험할 수가 없잖아요.
재미 재미없잖아요.
그러니까 재미있으려고.
그러니까 지금 게임하는 중이다. 이거예요.
개입하고 있다.
왜 현상이라고 하는 꿈을 꾸고 있는가?
경험하려고.
그러면 본질의 입장에서는
현상에서 죽음이라고 하는 경험이
본질한테는 실재일까요?
이게 현상의 꿈과 같은 걸까요?
죽음이라는 게.
이 꿈속에 나온 사람이 죽는 거지.
본질은 안 죽어요.
근데 대신 그걸 통해서 죽음을 경험.
오케이?
즐기면 돼요.
게임이에요.
심각했는데, 죽음도 게임이야.
게임의 일부일 뿐이에요.
그러면 또 재미있는 게
80억 인구가 있잖아요.
인간이라고 하는 경험만 해도 80억 가지가 있잖아요.
근데 세월을 따지면 곱하기 얼마나 많아요.
그 많은 경험을 동시에 즐기고 있어.
이 본질이 하는 게임은
그냥 한 게임이 아니야.
동시에 멀티 플레이어로 지금 게임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니까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
우리가 성숙해지다가
어느 순간에 꼭지가
열매가 익고 익으면 꼭지가 똑 떨어지는 것처럼
이 덧정이 탁 끊어지는 때가 온다 이거죠.
지금 혜안에서 법안 뜨기가
사실은 갈애가 사라지는 것
갈애가 에고니까.
그러니까 그게 지금 핵심이라서
여러분, 쉽게 나는 됐다 하기가 어렵죠.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래서 끝까지 향상일로 걸어가는 거지
‘나는 됐다’라고 말하면
‘나는 됐다’ 하는 그놈이 또 에고야,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깨달음도 없고, 뭐 자유도 없고, 해야
진짜 깨달음과 자유니까
모든 것이 없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서 참 평범해지는 거예요.
어떤 의미로는
그런데 그게 어려운 거예요.
깨닫기 전에 평범하고
깨달은 이후에 다시 평범해지는 거 하고
그게 다르다 이거예요.
같은 산은 산이다인데
산은 산이 아니라고 하는 걸 계기로 바뀌는
산은 산이다 하고
그전에 멋모르고 산은 산이다고 하는 거 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가 성숙해지는
공부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오랑캐의 몸과 화상의 몸은 같지 않지만
불성에는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하니까 오조가 깜짝 놀라겠죠.
이렇게 안목이 딱 분명한 사람 만나기가 어렵죠.
/오조께서 다시 무슨 말씀을 하려다가
대중들이 주위에 있음을 보고는
대중을 따라 일이나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하려다가 스톱했다 이거예요.
여러분 이것도 중요해요.
왜냐하면 대중 사이에서
저 밑에 있는, 지금 처음 온 사람이잖아요.
처음 온 사람이 이렇게 똑바로 말을 하면
문제는 선배들이 좋아할까, 싫어할까예요.
가만 안 두잖아요.
그러니까 보호하려고 딱
더 말을 시키려고 하다가 벌써 알아챘는데
더 말 시키면 주변 사람들이 질투하죠?
얘를 보호하려고
“대충 따라가서 일이나 하라” 하고 딱 하는 거예요.
근데 똑똑한 놈은 거기서 또 안져.
한번 보세요, 무슨 말을 하는가.
“대중 따라가서 일해라” 했더니
혜능이 또 맞받아치는 거예요,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혜능이 화상께 아뢰옵니다.
저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
지혜를 낸다, 이 말은
현상과 본질을 정확하게 둘 다 보는 거죠.
/그래서 자성을 여기지 않는 것이
곧 복전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거 참 중요한 말이에요.
우리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서
자성을 여의지 않는 것
이게 수행이에요.
자성을 여기지 않는 게 화두예요.
자성이 화두죠?
자성을 여의지 않는다, 이 말은
화두를 놓치지 않는다.
요게 복전이다 이거예요.
상황 이해되세요?
우리는 좋은 게
왜 간화선이라고 하는 걸 나왔느냐?
“내가 자성을 여의지 않아야지” 하는 것은 약간 공허해요.
초심자 입장에서는
“내가 자성을 여의지 않아야지”
이거 좀 공허해.
근데 화두, 이 뭐꼬, 무
화두가 있으면
화두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뭐가 끈덕지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훨씬 더 우리가 공부하기에는
뭔가가 바로바로 우리가 돌아갈 거 건덕지, 스위치
스위치가 없이 불을 켜는 거 하고
스위치가 딱 있어서 불을 켜는 거 하고는 훨씬 쉽잖아요.
그래서 이게 간화선이다 이거예요.
간화선이 뭐냐? 저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우리들의 마음이 항상 지혜를 내어
자성이라고 하는 화두를 여의지 않는 것이
곧 간화선의 본질이다.
이게 복전이다.
인간이 복을 쌓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근데 이 말이 맞지 않나요?
그러니까 지금 육조단경을 우리가 왜 공부하는가?
화두는 자성이고, 화두는 본질이에요.
화두는 본질이고
내가 본질을 여읜다는 말은 이별한다는 뜻이잖아요.
한자 보세요.
자심이 상생지혜, 언제나 지혜를 생 일으켜서
불리자성, 자성하고 이별하지 않는 거
이때 이별은 등진다는 뜻이에요.
등진다, 외면한다,
외면한다는 뭐예요?
현상에 나가 떨어진다는 거지.
현상에 나가 떨어지는 것을 되돌리는 것을
회광반조라고 하는 거죠.
화두는 회광반조.
/자심이 상생지혜를 해서
불리자성, 자성을 등지지 않는 거, 자성을 잊어먹지 않는 것이
바로 즉시 복전 /
이게 바로 인간이 복을 짓는 가장 텃밭이다.
복의 텃밭이다.
/고 알고 있는데
다시 무슨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
그러면 인간이 하는 일에 최고의 일은
인간이 하는 일에 최고의 일, 최고로 복 짓는 일
자성을 등지지 않는 것
자성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자성하고 이별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자성이 화두니까 화두를 놓치지 않는 것
이게 인간이 최고의 복을 짓는 복전이다.
사실은 여기서 끝나네요.
이 말 하나를 정말로 내가 믿음을 일으켜서 실천하면
그러면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자성과 이별하지 않는다 그러잖아요.
자성이 뭐냐?
지금 보는 거예요.
자성이 뭐냐?
지금 보는 거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지금 보고 있는 이거를 어떤 식으로 자각하는가?
보고 있는 이거를 어떤 식으로 자각하는가 할 때
이렇게 몸이 있어요.
여러분 모든 스스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은
몸이 있다는 사실.
자기 일생에서 몸 없던 때가 있었나요?
깨어 있는 동안에 항상 몸이 있죠.
꿈을 꿔도 몸이 있어요. 꿈 안에 .
몸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 말 드리는 이유는
화두를 들 때, 화두에 대한 실감이 있어야 되잖아요.
화두의 실감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화두의 실감을 어떻게 내가 캐치하는가?
몸에 있다 이거예요. 몸이 있다.
여러분 지금 몸이 있어요?
이거는 실감할 수 있지 않나?
부인할 수가 없잖아요. 몸이 있잖아요.
근데 몸이 있으면
반드시 이것이 같이 있어.
이 말은 뭐냐 하면
몸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이거예요.
근데 이것이
지금 몸이 있다.
근데 저 같은 경우는
몸이 있다, 이거 OK이거든요. 저는.
몸이 있다.
몸만 있는가?
지금 이 순간 몸이 있다.
몸만 있는가?
말로 하자면 몸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밝은 게 있어.
지금 뭔가 이걸 뭐라고 할 수는
눈에는 안 보이지만
몸이 있다고 하는 이 자각이 있어.
몸이 있다는 자각,
지금 말로 표현했네요.
몸이 있다고 하는 의식, 몸이 있다고 하는 정신
요게 저 같은 경우는 실감이 나요.
이거를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몸이 있고
몸이 있다는 걸 나는 자각하고 있어.
다시 말하면 I am, 자각
내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이 자각
근데 요 있다고 하는 거 안에는
몸은 물질이라서
죽비는 지가 자각할까?
죽비는 지가 있다고 자각할까요?
죽비는 못 하잖아요.
물질을 못하잖아요.
몸도 물질이에요.
그러면 몸은 지가 있다고 자각을 못해.
그럼 나는 자각해.
그러면 물질이 아닌 것이, 몸 아닌 것이
이렇게 자각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자각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 키 포인트, 키워드라고 할 수 있어요.
자각.
그 자각이 증거다 이거예요.
여러분 자각이 어디 있느냐 할 때
저 같은 경우에 보세요.
자각이 어디에 있는가?
요 시야라고 하는 시야.
시야 아세요?
보이는 범주, 보이는 거.
이 자각이 시야에 꽉 차 있어요.
요 시야에 내가 있다고 하는, 존재한다고 하는
존재
존재의 자각이 지금 여기에 지금 꽉 차 있어요.
그리고 조금만 더 보면
아주 재밌는 거는 뭐냐 하면
이 자각은
“어, 안 변하네” 이거 알 수 있어요.
이 자각은 안 변해.
근데 안 변하는 자각이라고 하는 것 속에
자각의 공간, 자각의 필드 속에
인연 따라 인사동 선원의 육조단경 강의가
이 시간에는 펼쳐지고 있어.
근데 여기서 앉아서 한 생각, 우리 집을 딱 떠올리면
지금 바로 가요.
바로 우리 집이 여기에
사실은 내 몸이 간 게 아니고
우리 집이 여기에 나타났어.
상황 이해되세요?
떠올리면.
그러니까 무얼 떠올려도 여기에 나타나지.
이 자각의 장 속에서
꿈도 나타나고, 생시도 나타나고.
생시에 희로애락 애오욕이
여기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리고 경험적으로 이 자각의 장은 펼쳐져 있는데
경험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좀 실체가 없네, 하는 경험이 쌓여요.
왜냐하면 지나가고 나면 없어.
그리고 엄청난 안도감이 생겨요.
뭐냐 하면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지혜가 생겨요.
그 어떤 어려움도.
모든 인간이 겪는 어려움은 생각과 감정이에요.
이해되세요?
그 생각과 감정이 뜬금없이 일어나요.
맞죠?
일어나도 이 자각의 장이 분명한 사람한테는
“왔구나, 가는구나” 하고 손님처럼 왔다 가고
주인인 나는
이 풍성한 손님들이 왔다 가는 이 호텔을 잘 영위하고 있어.
그리고 이 호텔을 왜 지었는가?
경험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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