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ly Consciousness, the rest is mine complementarity인데
문제는 마인드가 강해요.
마인드가 굉장히 강해
그래서 알아도 그 마인드는 다시 부활해요.
그걸 이기는 게 수행이에요.
지금 딱 수행이라는 것은
깨달음은 간단 명료한데
이 간단 명료한 깨달음에
끊임없이 따라붙는 의심
주제 마인드다, 이거에요.
마인드가 따라붙는 게 문제다.
/그래서 언하에 자기 본심을 알고
본성을 보호해야 한다.
식심견성/
여러분 식심견성이라는 말이 굉장히 유명한 말인데
출전이 여기에요.
출전이 식심견성은
오조가 안타까워서 신수에게 마지막 찬스를 내리는 거예요.
“그 말만 알아들으면 너도 조사가 될 자격이 있는데
지금 그 말을 못 알아듣고 있다” 해서 알려주는 거예요.
왜 못 알아들을까요?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있는 이대로’ ‘지금 깨어 있는 이거’라고 하는 이 말이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사고방식이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면
이런 말이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지
한마디로 말해서
왜냐하면 이미 자기 고정관념에 있어서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하는 걸 믿는 거지.
현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채로
아무 현상에 물들지 않는 의식
‘그거다’라고 하는 말이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저는 여러분을 두드리고 두드리다가
어느 순간 들어가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근데 여기에 만족 못 하고
“저 선생님은 똑같이 매일 똑같은 말만 하네.”
아니 다른 말 할 게 있어야지.
근데 문제는 못 들으니까
안 들어가서 지금 반복할 뿐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제가 느끼니까 이래요.
느끼니까
“아, 이게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긴 말할 필요가 없구나.”
정말 중요한 것을
정말 난공불락의 은산철벽같은 여러분의 아귀한테
뭘 해야 된다고 하는 그 아귀한테
끊임없이 이거를 두드려서
어느 순간 탁 열리면서 알아들을 때
변화가 그때 딱 온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똑같은 말을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알아듣는 거예요.
그리고 때가 있는, 시절 인연이 정말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설법은 어려운 거 없다.
지금 의식 하나를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또 여러분은 들을 때마다 그 강도가 달라질 거예요.
들을 때마다
처음 의식을 알아챌 때 하고
세월이 가면서 자꾸 이것이 반복되면서
이것이 익어지는 그 모습이 다를 거예요.
그래서 그게 지금 공부지
제가 보니까
나머지는 아무리 많은 설명을 막 화려하게 해도
소용이 없다.
딱 지금 요점 정리를 해서
딱 이거를 알아듣고
여기에 철저해지는 것.
그래서 지금 이런 말들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의식은 불생불멸이며/
맞습니까?
의식이 이게 지금 눈앞에 또렷한 이것이
난 적이 없다 이거예요.
난 적이 없다, 불생불멸.
그래서 그 불교에서는 그런 말도 해요.
법의 도장을 딱 찍을 때 어디다 찍느냐?
무생에다가 찍는다.
그래서 무생법인이라는 말을 굉장히 중시해요, 선에서는.
무생법인
난 적이 없다고 하는 여기에다가 법의 도장을 찍었다 이 말이에요.
무생_ 난 적이 없다.
의식이 난 적이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에요.
우리 몸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전에도
이것은 그대로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지금 나는 이 육체는
19몇십 년에 태어나서 20몇 십 년에 죽을 거다라고
우리가 막연하게 이렇게 믿고 있는데
근데 따지고 보면
몸은 그렇지만 내가 몸이냐 이거예요.
이게 좀 어려운 점이야.
왜냐하면 너무나 오랫동안 몸을 나라고 해왔기 때문에
의식을 알아채도
나의 무게 중심이
몸에서 의식으로 옮겨가는 데는 저항이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몸을 나라고 하고 살았기 때문에
나의 무게 중심이
몸에서 의식으로 옮겨가는 데에
자기가 스스로 저항한다 이거예요. 습관 때문에.
그러니까 이거를 이겨내는 것이 공부라서
계속 자기를 돌아보면
지금도 의식이 있고
의식이 이렇게 있는데
이 의식의 입장에서는
몸은 탁 나타났다가 탁 사라져서...
공부 과정이 공부의 한 단계예요.
공부의 한 단계에 어떤 게 있느냐 하면
아침에 딱 일어나면서
몸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하는 감각이 생겨요.
아무것도 없다가 아침에 깨면서
“몸이 나타나네.”
어디에?
의식에.
그리고 저녁에 몸이 사라지네.
어디서?
의식 속에서.
의식 속에서 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어요.
저는 한동안 그랬어요.
한동안 아침에 눈을 깰 때
의식 속에 몸이 나타나네.
그리고 밤에 잠을 자면서
의식 속에서 몸이 사라지네.
의식은 그대로인데
몸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그러니까 이것이 조금 익어지면
의식은 항상 있고
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네 하고
조금 더 이것이 익어지면
의식의 LA가 나타났다가 지금은 사라졌어.
기가 막힌 일이에요.
그저께까지 제가 LA에 있었거든.
지금은 지금 한국이 나타났어.
의식은 그대론데
이 몸둥아리를 어디에 갖다 놓느냐에 따라서
LA도 나타났다가
지금은 인사동에 나타나고 있어요.
의식은 그대로인데
몸뚱아리를 어디에 갖다 놓느냐에 따라서.
그러면 몸뚱아리가 밤에 잠자면
또 꿈이 팍 나타나네.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이 돼요.
이 현상에 나타나는 아무리 다양한 모습이 있어도
그것이 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거에 내가 일일이 욕망을 내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러면 나는 흔들리지 않아요, 이 현상에.
그러니까 모든 공부가 모든 공부가
약견_ 만약에 본다면
제상_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이
비상_ 사실은 본질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라는 걸 본다면
즉견여래
여래_ 본질과 현상이 연기라는 것.
연기가 여래에요.
연기
그러니까 지금 말로 하자면
한 개가 본질이고 한 개가 현상이에요.
제가 지금 처음 그려봤거든
즉흥적으로
근데 따라오셨나요?
한 개 본질이 한 개 현상이에요.
그 현상은 다양하지.
그러니까 본질하고 현상이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이게 같은 거다, 이거예요.
같은 것의 두 가지 면일 뿐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하여튼 연기라는 말은 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공부가 깊어질수록 연기를 깨닫게 되고
부처님께서 깨닫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연기를 깨달았다, 결국”
그게 우리 공부의 안목이에요.
다시 넘어와서
/그것은 불생불멸이며
언제나 순간순간 스스로 드러나 만법에 막히지 아니한다/
보세요.
언제나 순간순간 드러납니까?
우리들의 의식이 순간순간 이 삼라만상으로
여러분,
이 몸만이 나가 아니에요.
의식의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자기의 분신이에요.
그러니까 꽃이 피어도 의식이 피는 거고
나뭇잎이 흔들려도 의식이 흔들리는 거고
모든 것이 다 의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순간 스스로 드러나고/
그리고 만법에 맡기지 아니한다도 중요한 말이에요.
여러분 이걸 총지라 그래요. 총지
총지_ 모든 것을 다 안다, 이 말이에요.
‘총지’를 인도 말로 하면 ‘다라니’에요.
다라니 외우시죠?
다라니라는 말이 다 안다는 뜻이에요. 다 통한다.
그러니까 막히지 아니한다는 뜻이에요.
왜 안 막히는가?
약견제상에서 비상을 본다 이 말이에요.
죽비는 모양은 죽비지만
죽비에서 본질을 본다.
모양이 막히지 않으면
의식이 지금 이 모양으로 나온 거다 이거예요.
소리가 의식이 소리로 나온 거라서
삼라만상을 볼 때
모양에 막히지 않으면 전부 의식으로 본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총지.
‘부처님은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잖아요.
이 말 뜻은 뭐냐 하면
부처님이 양자물리학을 안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모르는 게 없다는 말의 뜻은
총지인데, 다라니라고 하는 건데
이 뜻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본질이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안 막힌다는 거예요.
모양이 안 막힌다.
왜냐하면 전부 다 이거니까
이거 하나가 나온 것이니까.
/순간순간 스스로 드러나고
만법에 막히지 아니한다./
이 말 이해되세요?
불교는 약견제상비상
상을 떨어뜨린 것, 본질.
모든 현상이 본질이라는 것을 보면
즉견여래
연기를 안다, 이 말이나
조견오온개공
조견_ 비추어 본다.
오온_ 5가지 쌓임은 현상이죠.
현상이 있는 그대로
개공_ 공이 본질, 본질이라는 것을 알고
도일체고액_ 일체 고액을 넘었다.
왜냐하면 현상이 다 본질이라서.
여기만 막히지 않으면
이 모양에만 내가 막히지 않으면
전부 다가 본질이라서.
이리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리 되면 번뇌가
모양은 번뇌지만 보리가 나온 거죠.
이해되나요?
중생이 모양은 중생이지만 부처가 나온 거죠.
꿈속에 있는 삼라만상이 전부 다 꿈인데
그 꿈이 의식이다.
이해되나요?
꿈속에 삼라만상이 다 다르지만
알고 보면
다 의식이 그렇게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전부 다 의식이죠.
영화가 스크린이 있고
영화에 등장 인물이 나오고
막 말이 달리고 총이 날아가고 하잖아요.
영화
전부 다 그게 저기서 쏘는 빛이다, 이거예요.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이 스크린에, 영사기에서 비인 빛이다 이거예요.
컬러는 막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하지만
알고 보면 빛이다.
꿈이 다양하지만
보면 꿈이다.
지금 빛이다.
이렇게 비유를 했는데
똑같이 이 세계가 지금
현상에는 다양하지만
의식이 지금 이렇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통달하는 것이 불교다, 이거예요.
그래서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라는 말이나
조견오온개공할 때
공이 형용사로서 비었다라는 것뿐만 아니고
공성이라는 말
오온이 현상이 그대로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꿰뚫어 보니까
일체고액을 뛰어넘었다.
이 말은 고액이 고액이 아니다 이거죠.
하여튼 많은 미국인들이 질문을 하더라고요.
“현상이 본질이라면
이 현상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 하는 이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이해되나요?
거기서는 할 말이 없지만
“그거는 나도 몰라.
그렇지만 말을 해본다면
이 현상이 게임이라서, 본질이 하는 게임이라서
본질 입장에서는 이 게임이 재미있으려면
레벨이 높아야 돼.
레벨이 높으려면 문제가 많아야 돼.
문제가 많으면 고통스러워야 돼.
그러니까 어차피 본질 입장에서 하는 게임이고
게임 속에 나온 캐릭터가 나는 아니잖아요.
본질은 게임하는 사람이잖아요.
게임하는 사람은 게임 밖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기왕이면 재미있는 게임을 하려면
여러분, 고통 없는 게임은 재미가 없다.
갈등 없는 드라마는? ㅎㅎㅎ
찐빵에 앙꼬가 없으면...
그러니까 이 세계는 ...
이거 게임하는 거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인도에서는 그런 말을 해요.
인도에서는 브라만의 유희하고, 릴라라고 이 세계가
브라만 입장에서 하는 릴라
릴라란 말은 유희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브라만은 스스로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
다양한 이 게임을 하는데
그 게임 속에는 고통이 있고, 복잡해야 재미가 있어서
이게 벌어진다는 거예요.
근데 나는 따라서
드라마 안에 게임 속에 나오는 캐릭터라면
조종당하니까 억울하잖아요.
좀 그렇지 않나요?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니다 이거지.
게임하는 사람이다, 이거죠.
게임하는 사람으로서 재미있으려면
이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온갖 갈등을
나는 겪으면서 즐기고 있다는 거에요, 사실은.
깊은 차원에서는.
그래야 재미있다, 이거예요.
원효가 하여튼 기가 막힌 말을 했다니까요.
너무 좋으니까 한번 다시 씁시다.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이 세계는 원효 스님의 깨달음의 입장에서 보니까
결국 불교란 무엇인가
이 세계에서
유심, 플레이, 게임하는 마음
유심안락.
그러니까 게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게임의 내용이 아무리 지지고 볶아도
항상 안락한 상태에서 하는 거다.
깨어서 꿈을 사는 것이다.
지금 같은 말이죠.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
제가 지금 여러분하고 대화하고 있으면서
지금도 유심안락도예요.
수업 끝나면 산책나갈 거예요.
그러면 인사동에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유심안락도로 그 사람들 이렇게 봐.
이번에 제가 봄에 교토 여행 갔다 오면서
그 불상이 수미단 위에만 있지 않고
법당에 내려와서 법당에 불보살상이 있는 걸 보고
제가 그때부터 제가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수미단에 있을 때는
나랑 관계없는 불보살계가 저기 있었는데
그 불보살님들이 거기 안 계시고 부처님만 거기 계시고
보살들은 다 내려와서
이렇게 법당에 있으니까
법당은 우리가 같은 레벨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계기로 해서
그다음부터는 불보살로 보이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보디사트바를
인도 말 보디사트바를
한자로 번역하니까 보리살타가 됐어요.
보리살타를 줄여서 보+살을 합치면 보살이 됐잖아요.
보디사트바 보디살타
보살의 뜻이 뭐냐 하면
보디는 깨달음이고
사트바는 중생이에요.
이 말은
깨달음과 중생이 같이 있는 것
이게 보살의 뜻이에요.
다시 말하면 대승불교에서 보는 인간관은
보디사트바에요.
모든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중생의 욕망을 가지고서
이것이 서로 같이 지금 작동되고 있는 모습이
대승불교의 인간관이에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현상계에서는 중생이고
본질에서는 의식 그대로라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있는 이대로 사트바이면서 보디예요.
대승불교가 보는 인간관이 무서운 점은 뭐냐 하면
지금의 나를 바꾸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이대로 보디면서 사트바
있는 이대로 부처면서 중생이라는 거예요.
이것을 자각하면
나를 바꾸는 게 아니고
있는 이 인간 조건에 의해서
최선을 다해서 이거를 유심안락도를 누리면 되는 거라는 거예요.
유_ 놀 유.
막 애를 써서 이 현실을 부정해서 이상을 설정해서 바꿔 가는 게 아니고
그게 플라톤 철학의 오해라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
있는 이대로 완벽한 의식이
이 각자의 불완전한 조건에 의해서
지금 이 현상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럼 여기서 내가 이걸 즐기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불안전한 현실을 누가 선택했는가?
여러분,
우리의 이 인간 현상에서의 불완전한 인간 조건을 누가 선택했을까요?
게임할 때, 그 게임 레벨을 누가 정해요?
내가 정했다고.
지금 내가 지금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정했다고요.
왜냐?
이 몸을 가지고 이 인생을 그대로 내가 체험하려고
지금 나타난 거예요.
이게 지금 사실이라고요, 사실.
그러니까 이 점을 우리가 자각한다면
내가 선택한 거를 충실히 잘 즐기면 돼.
말이 좀 무책임합니까?
이 한 생각이 바꿔지면
그러니까 보디사트바라고 하는 이 말 속에는
굉장히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거예요.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있는 이대로 모든 우리 인간 조건이 부처인데
본질에서는 부처인데
현상에서는 중생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이생을 즐길 수 있는 원인이지
보세요.
본질도 부처고, 현상도 부처면 무슨 재미예요?
이 게임을 왜 해요?
부처가 폼 잡고 부처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무슨 재미로 그짓을 해요.
그러니까 속은 부처인데
현상으로서는 중생의 온갖 다양한 버라이어티를 경험하러
이게 지금 인생의 파노라마라는 거죠.
우리가 지금 이걸 알고 살면
모르고 살면 고통인데
알고 살면 이게 유심알락도라는 거예요.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다 본질의 체험이에요.
이것도 희로애락애오욕이 남김없이 본질의 체험이에요.
내가 텅 빈 공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내가 이걸 버리고 텅 빈 공을 체험하는 게 아니라
그건 재미없어.
그게 아니라
있는 이대로 희로애락애오욕이라고 하는 칠정
이 다양한 칠정 자체가
우리가 본질을 체험하는 거예요.
이게 연기라는 뜻이야.
연기라는 것은
현상이 본질이고 본질이 현상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연기잖아요.
연기, 중도.
그 뜻은
우리가 현상에서 체험하는 이 다양한 감정이
그대로 본질의 체험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똑 떨어져야 된다.
본질하고 현상이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니라
이렇게 딱 하나가 되어서 똑 떨어진다.
그러니까 좀 어렵긴 어려워요.
왜냐하면 분명히 나는 현상을 체험하는데
그게 본질 체험이라니까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이게 어려워요.
그렇지만 갈수록, 연기를 터득하면 할수록
이분법을 벗어나면 날수록
현상이 있는 그대로 본질이고
본질이 본질로서 안 있고
틀림없이 현상으로 지금 드러나고 있어서
죽비가 동시에 본질이면서 현상이에요.
이게 연기예요.
죽비가 있는 이대로 현상이면서 본질.
본질이면서 현상.
그러면 죽비만 그런가?
얘도 그렇다 이거야.
얘도 있는 이대로 본질이면서 현상이고
현상이면서 본질이다.
근데 분별심은
“본질은 본질이고 현상은 현상이지
왜 이게 같이 있느냐?” 하고 따진다 이거예요.
그게 마음 마인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 마인드를 극복하기.
그래서 이 연기라는 이 깊은 뜻에
우리가 계속 젖어 들어가기.
이게 지금 공부예요.
이게 하루아침에 안 돼.
우리는 지금까지도 분별심이 강해서
계속 지금 마인드가 분별심을 말해요. 분별심.
분별심은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거예요.
“아니 본질이면 본질이지, 현상이면 현상이지
왜 본질이면서 현상이라고 해서
헷갈리게 만드느냐?” 하고 시비를 걸어와요.
여러분 계속 걸어봅니다, 여러분한테.
그러니까 그것을 뿌리치고
이 연기라고 하는 이 진실에
내가 이렇게 익어 들어가기가 공부예요.
이게 하루아침에 안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알아들어도
돌아서 나가면
다시 분별이 찾아오고
“하나만 선택해” 하고
자꾸 우리 보고 강요를 해요.
이해되나요?
그러면 또 여러분이 막 이게 흔들린다고요.
악마의 유혹이 계속 찾아와서 우리를 흔든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기로 돌아오는 거.
우리 공부에서
제일 마지막에 우리가 삼매에 든다 할 때
제일 마지막 드는 삼매는 수용삼매예요.
수용삼매라는 건 뭐예요?
일진일체진一眞一切眞이기 때문에
일체를 수용하는 것.
아쉽죠, 그놈 원수들을
그놈 원수들을 수용하기가 이게 쉽냐 이거지.
그런데 언제 수용하게 되는가?
자꾸 눈이 바뀌어서
한 명, 한 명한테서 의식을 봐요.
한 명, 한 명한테서 의식을 보는 거예요.
그러려면 내가 나의 의식을 봐야지
남의 의식도 봐.
이해되시죠?
내가 나의 의식을 봐야지
남의 의식도 봐요.
그리고 하나가 참됨에 일체가 참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부정적인 모습을 초월해서
하나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는 걸
이렇게 느끼게 될 때는
그 사람한테서 불보살의 향기를 느끼는 거예요.
수용삼매
이게 우리 공부의 최종 단계예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인간도 그렇게 느껴지지만
더 발전하면
환경도 그렇게 느껴져요.
내가 처한 환경도 수용하게 되는.
그래서 모든 걸 수용하면
모든 걸 수용한다는 것을 [지족]이라고 하죠.
[만족한 줄 안다]고 그러잖아요.
지족이 [열반]이에요.
수용이 될 때 열반이 일어나요.
이렇게 우리가 함께 모여서
이런 에너지를 나누어서
의식에서 의식으로
이 말도 이제는 들어오잖아요.
의식에서 의식으로 교감해서 하나가 참됨에 일체가 참된다고 하는
이 세상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힘을 길러가기.
이게 정말 귀한 시간이라는 걸 느껴서
참 여러분한테 감사드려요.
여러분이 없었으면
제가 어떻게 이걸 느꼈겠어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하여튼 약간 걱정했어요.
어제 제 딴에는 시차를 극복한다고 12시까지 안 잤거든요.
어제 한국시간 12시면 LA 시간 아침 8시에요.
그러니까 한 잠도 안 잔 거죠.
아침 8시까지.
그러고 자려고 하니까 잠이 안 오더라니까.
그것도 희한하죠.
그러니까 잠을 좀 못 자고 지금 섰어요.
덕분에 오늘 밤 잘 잘 것 같아.
조금 걱정하고 지금 수업에 임했는데
더 잘 된 것 같아.
결론 너무 좋아요.
오늘 결론이 일진일체진이면 수용의 힘이 생긴다.
나만 수용의 힘이 생기면...
제일 마지막 결론
수용의 힘이 생기면
대상에 대한 나의 상이 떨어진다.
이해되세요?
대상에 대한 나의 상이 떨어진다.
나한테 중생이라고 하는 상이 없으면
밖에 중생이 없어진다.
중생이 아니면
다 한 분, 한 분 귀한 인연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이 보이기 시작할 때
삶은 진짜 이게 유심안락도
오늘 원효 스님의 이 말로 결론 낼게요.
불교는 무엇인가?
유심안락도
중요한 거는 유_놀 유라고 사실.
감사합니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54] 시공을 초월해서 같다 | 자각의 스위치 (0) | 2024.11.13 |
---|---|
[육조단경53] 언제나 확인된다 | 힘이 들지 않는다 (0) | 2024.11.07 |
[육조단경51] 지금 이 의식이 전부다 | I am no thing (0) | 2024.10.31 |
[육조단경50] 진리도 한 생각일 뿐 | 쌍차쌍조(双遮双照) (0) | 2024.10.30 |
[육조단경49] 생각이라는 윤회를 벗어날 때 | 불이법(不二法)이 기준이다 (0) | 2024.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