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아주 간단명료한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인생 100년, 매년 365일, 하루 24시간,
순간순간 보고, 듣고, 경험하는 주체는
이 생시 속에 나타나 있는 이 아무개가 아니라
이 생시 자체를 꿈꾸고 있는 의식이
지금 모든 것을 하고 있어요.
그럼 이거 외에는 없는 거예요.
따로 이거 외에는 다른 진리는 없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것을 알아도, 이해하고 알아채도
여전히 이 헐떡이는 마음이
헐떡이는 마음이 여전히 있어서
이것 가지고 만족 못하고
계속 또 무언가를 구하고 있는
그러니까 이게 지금 핵심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요 헐떡이는 마음이 멈추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를 지금 점수라고 하는 거 잖아요.
그러니까 알아채는 건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깨어 있는 자기의식을 알아채는 것은
돈오는 찰나적이고 어렵지도 않다, 이것은.
이거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
그냥 알아채면 되니까.
의식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말도 이 말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에 LA 가서
LA에도 불교 공부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한국 교포.
물론 그 미국인들도 이번에 들었지만
그분들이 불교 신행생활을 오래 했지만
결국에는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이 의식, 즉심
이 의식이 곧
즉심이 곧 부처다.
둘 다 마조 스님의 말이네요.
즉심은 지금 의식, 이 의식
즉이란 말은 이것
이 의식, 즉심, 이것이 부처다.
요 말을 한번 확신한 사람이
여러분, 깨달음은 확신의 전염이더라고요.
이해되나요?
깨달음이란 확신의 전염이에요.
그러니까 확신한 사람,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지금 이 의식, 지금 멀쩡한 이 의식
그러니까 제가 모션도 보여드리잖아요, 가끔.
그냥 콱 넘어지면, 숨 딱 끊어지면,
콱 넘어지면서
이거 화장장에 넣어도
“아야” 소리도 안 한다.
그러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지금 툭 넘어진 거 하고
지금 살아서 이러고 있는 차이는
딱 하나
의식이다 이거예요, 의식.
딴 거 아니고
그러면 “이 의식입니다”라고
이렇게 딱 확신을 가진 사람이 말을 하면
거기서 전염이 돼서 알아듣더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LA에서 불교공부 오래 하신 분이
10년 20년 30년 된 분이 계시던데
모르고 있다가 “이겁니다”라고 딱 정색하고 말을 하면
알아듣더라 이거예요.
그리고 변화가 오더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오 자체는
먼저 이걸 확신하고 있는 사람한테
이 말을 한 번 들으면
이것이 제일 직접적인 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럼, 그다음은 뭐냐?
이걸 알아들어도
여전히 욕심이 각 개인마다 욕심이 있어서
그 욕심이 “아, 이거는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한테 다 같이 있네.”
그렇지 않나요?
“이 의식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한테 다 같이 있네.
이걸 내가 원하던 게 아닌데
나는 다른 사람한테는 없는
나만 있는 좀 특별한 걸 원하는데
겨우 이거라고?”
하면서 만족 못하는 그 욕심, 치구심
치달려서, 말처럼 치달려서 구하는 마음
그게 오염이다 이거예요. 오염.
그러니까 도라는 것은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다만 오염시키지만 말라.
근데 오염이 진짜 강력하다, 우리한테는.
이게 지금 문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하여튼 금방 까먹었어, 또.
문제가 금방 까먹어버려 이 말을.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것이
바로 이 의식이 부처다.
여기서 그냥 끝장 나는 거예요, 공부는.
이거 알아들으면 돈오예요, 사실은.
근데 문제는 욕망이라는 게 있어서
이것으로서 만족을 못하고
“뭔가가 더 있을 거야” 하고
뭔가 특별한 경지를 추구하는.
이번에 가서 미국의 지성인들하고 대화를 좀 했거든요.
그러니까 미국 지성인들하고 대화를 하니까
그분들은 명료하게
의식, consciousness하고
마음 mind하고
이걸 아주 명료하게 구분해서 쓰고 있어요.
그거는 이번에 확실하게 경험을 했네요.
의식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고
마음의 핵심은 의식인 거예요.
인간 마음의 핵심은 의심인 거예요.
그래서 “지금 깨어 있는 의식이
이게 모든 것입니다” 하고 이 말을 했을 때
제가 그 표현했잖아요.
밴드에도 올리고 했는데
그거 아주 통쾌했어요.
제가 “지금 깨어 있는 의식이 전부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이 모든 것으로 지금 나오고 있는 것
이것이 이 세상의 실상이고
이 이상은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분이 딱 맞장구를 치면서
“여기에 토 달면 다 마음입니다. 나머지는 마음입니다.”
이 말이 굉장히 통쾌했어요.
그분도 오랫동안 공부를 해서
양자물리학자인데, LA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에요.
근데 나이도 한 80쯤 됐어요.
근데 그분하고 대화의 결론이
“지금 깨어 있는 이 의식 하나가
이렇게 삼라만상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나타나고 있는
이것이 다입니다”라고 제가 결론을 딱 내리니까
그분이 거기다가 맞장구치면서 덧붙인 말이
the rest is mine
여기 이거 외에 뭔가 덧붙이는 말은
이제 마인드다, 의심이다 이거에요.
인간의 의심
그러니까 이게 지금 우리 공부의 가장 핵심인데
그러나 이 따라붙는 의심의 정체가 아귀예요.
이해됐나요?
지금 아귀라는 말이 오늘따라 착 꼽히거든요.
보통 때면 싹 지나갔을 말인데
이거 너무 당연한 말로 그냥 싹 지나갔을 텐데
지금은 딱 걸려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진리는 간단명료한데
문제는 인간의 마인드가 이게 아귀라서
끊임없이 여기에 “맞나?” 하고 의심한다 이거예요.
그 의심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제가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로 바르게 법을 가르치는 그 회상에
여지없이, 예외 없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간다는 거예요.
왔다 가는데,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에게게 이게 다인가? 너무 시시한데?”
너무 이게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역사적으로 평등해서
만족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심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흔드는, 우리를 흔드는
그런 것이라서
이거 이기는 게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것을 이기는 데는
아마도 옮겨 다니면
계속 못 이기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딱 정법 그리고 정견이 있는 그런 곳에서
도반들과 손잡고 함께 버티기
그게 공부라고 할 수 있고
이게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멀쩡하게 제 말 들립니까?
제 말 듣는 그것
그것이 다예요.
그것이 다인데 이것을 두고
여기에 만족을 못하니까
뭔가 다른 특별한 걸 찾는다.
그래서 그 세월이
그 찾아다니는 아귀로서의 생활
그러니까 오늘도 신난다.
아귀라는 말이 남 이야기가 아니고
저도 지금 반성하고 있어요.
“아귀로 사는 세월이 오래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귀가 남의 말이 아니고 게걸스럽게 무언가를 지금 추구하고 있다면
그게 아귀다.
그것이 멈추는 게 그게 중요하고.
저의 경험에는 언제 멈추었는가?
정말로 지금 이 순간에 깨워서 이렇게 보고 있는
“이렇게 깨어 있는 이것이구나”라고 한 번 딱 방점을 찍었을 때
그때부터 쉬기 시작하더라고요.
그전에는 못 쉬었어요.
그러니까 진짜 아귀의 생활이 오래됐어요.
근데 딱 한 번 이거구나 하고 찍었을 때부터
마음이 쉬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만큼 우리는 욕망의 조건을 타고난 것.
인간의 조건 중 하나가 욕망이고
이 욕망의 힘은 강하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돌아와서 다시 텍스트로 오겠습니다.
공부는 자기 아귀를 보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내 속에 아귀가 있구나” 하는
그거 보는 거예요.
하여튼 부처님도 수행할 당시에는
사람들의 믿음이
“이 세계는 깨끗하고 더러움이 섞여 있는 세계라서
고통은 더러움 때문에 고통이 일어나서
더러움을 씻어내는 게 청정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는
사고 방식하에서 살았다 이거예요.
여러분, 지금도 대부분 이렇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이래요.
그래서 미국을 가니까
확실하게 알겠는 것 중에 하나가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단멸론적이더라고요.
단멸이라는 건 뭐냐 하면
죽으면 끝이라는 거예요.
‘죽으면 끝이다’ 이게 단멸론이에요.
근데 미국인들은 자본주의 세계는
있는 동안에 최대한 많이 가지고 즐기고 누리고
죽으면 끝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확실히 보이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는
그 안에서 조금 잘 살려면
그래도 오염을 줄여나가는 게.
그 안에서 최선은
오염을 청정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그래서 아무튼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큰 산업이 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근데 그런 거 보면
참 부처님이 대단한 사람 같아요.
모든 사람이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혼자서 다른 걸 발견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아주 핵심이네요.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이 세계가 다가 아니다”는 거예요.
단멸론이라는 말은
“이 인생이 다다.”라는 거예요.
이거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게 단멸론이에요.
그러면 이 인생에서 최대한 잘 누리고 가야 되잖아요.
근데 부처님이 발견한 것은
이게 다가 아니다는 거죠.
이게 꿈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꿈이고
오히려 진실은 멀쩡하게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이 의식이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이 발견한 거죠.
말이 났으니까
육도윤회 안에서는 오르락내리락 하거든요.
해결이 안나는 거예요.
부처님이 발견한 것을
원효 스님이 내린 불교에 대한 정의가 참 마음에 들어요.
원효 스님이 뭐라고 했냐 하면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변하기를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라고 했어요.
이때 유_ 놀 유
그러니까 정말 이 인생을 즐기는 거예요.
이 불교란 무엇인가?
진정으로 이 세상을 잘 즐기면서
안_ 편안하고
락_ 기쁜, 도
유심안락도가 불교라는 거예요.
그러려면 이 육도윤회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세계로부터 한번 벗어나는 것이
최선인 거죠.
다시 말하면
[이 꿈속의 세계에서
꿈을 깬 채로 꿈속에서 사는 게
그게 불교다] 이거예요.
꿈을 깬다는 것은
육도 윤회로부터 한 번 해탈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해탈인가?”
지금 보고 듣는 이 의식이
처음부터 해탈해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의 무게 중심이 김아무개에서
지금 멀쩡하게 깨어 있는 의식으로
나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것
이게 지금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에요.
그러니까 한 번 하여튼 알아차려야 돼.
자기 의식을.
어렵지 않아요.
깨어 있습니까?
지금 이 의식이 없으면 몸뚱아리는 폭 거꾸러져요.
그리고 지금 느낌이
이걸 느낄 수 있어요.
몸이 있잖아요.
근데 저의 표현은
미국인도 금방 알아듣대요.
몸이 있어요?
몸만 있냐 이거예요.
지금 뭔가가 이렇게 깨어 있는, 살아있는 느낌이 있잖아요.
이거 없나?
몸은 있는데
내가 있죠. 그죠.
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몸이 스스로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몸 아닌 것이 이렇게 있다 이거예요.
지금 이걸 신령스럽게, 뭔가 깨어 있는 것이.
그러니까 제가 번역을 그렇게 했잖아요.
이번에 미국에서 말하면서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서산대사 선가귀감의 첫 구절
유일물어차_ 여기 한 물건이 있다.
종본이래로
처음부터 소소영령하다
소소영령하다는 걸 제가 늘 깨어 있다
이렇게 번역했어요.
특별한 게 아니고 늘 깨어 있는 거.
처음부터 언제나 늘 깨어 있는 것이 있다.
지금 이거 아닌가요?
여기에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하나가 있는데
이것은 처음부터 늘 깨어 있다.
그래서 몸이 움직이는 것은
이것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알아채는 것이
하여튼 불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나머지는 여기에 따라붙는 이런저런 것들.
여러분 이런저런 것들 중에 핵심이 뭐냐 하면
우리가 배운 불교 개념들이에요.
다시 말해서 아귀의 탐욕의 대상이
불교공부를 하기 전에는 식색명이었다가
불교공부를 하면서부터는
불교지식을 아귀처럼 지금 또 게걸스럽게 탐을 내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벌써 많이 가지고 있죠? 안 그래요?
많이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을 내려놓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려울 거예요.
아귀는 내려놓을 수가 없어.
근데 내 안에 있는 아귀를 내가 자각할 때
내가 미친 듯이 이거를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이 불교 지식을, 꽉 쥐고 있는 거예요.
이거를 놓아야 되는 거예요.
항상 최후에는
나하고
그리고 이 불교 지식을 다 끌어모은
예를 들어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이렇게 상징화시킨다면
나하고 아미타불 사이에서
아미타불을 게걸스럽게 아귀가 추구하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아미타불을 놓아야
아귀가 사라진다는 거야.
하여튼 공부의 마지막에는
내가 알고 있는 깨달음
이런저런 나의 체험
또 여러분이 지금 깨어 계세요?
제가 ‘이게 다’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건 알겠는데
나의 이 추구하는 마음은
나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거에서 나는 뭔가를 더 구합니다.
안 그래요?
그거다 이거예요, 그거다.
그러니까 항상 제가 여러분하고 1대1로 만나면
반드시 여러분께서
“내 공부가 지금 여기까지는 왔는데
이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 거거든요.
이해되지요?
“이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라는 그놈이 아귀다.
그 아귀를 보세요.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하는
그거를 딱 돌아봐서 자각해서 놓아야
그러려면 나하고 불교, 나하고 진리, 나하고 아미타불 중에서
이걸 놓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진짜 나로 돌아와야 돼.
그래서 부처님께서 참 말씀 잘하신 것 같아.
돌아가실 때, 아난이
“어떻게 할까요?”했을 때
자귀의하라, 자귀 법귀
왜냐?
자가 법이기 때문에
자기가 법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귀하고 법에게 귀하다.
이 말이 자기가 법이라 이 말이에요.
근데 우리들은
지금 있는 이대로의 자기를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막 뭔가를 먹으려고 이렇게 한다.
불교 지식, 혹은 깨달음, 혹은 이런저런 체험
이거를 미친 듯이 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거 구하는 자기의 아귀를 돌아봐서
그걸 알아차리는 게 공부의 다다 이거예요.
하여튼 부처님도 6년간 미친 듯이 구했어요.
부처님이 구한 건
우리보다 더 심하게 구했잖아요.
근데 안 됐잖아요.
그래서 부처님도 돌아보셨던 거죠.
부처님도 자기 내면에
미친 듯이 고행하고, 선정을 추구하는
자기의 욕심을 돌아보신 거죠.
그걸 내려놓았더니 대각을 이루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원리는 같아요.
정리하면 여러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진리는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는
이 의식 외에는 없습니다.
이게 다예요.
그러면 공부는 뭐냐 하면
이게 다들 만족 못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자기 안에 있는 이 아귀를 내가 돌아봐서
그것으로부터 내가 벗어나는.
그러니까 그게 전도몽상의 내용은 아귀에요, 아귀.
그래서 빨리 해산합시다. ㅎㅎ
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왜냐하면 이거 이상은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하루 이틀이지. ㅎㅎㅎ
뭐 뻔한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요.
정말 원리는 간단하다.
근데 참 이게 우리들의 갈구하는, 갈애라는 말 쓰잖아요, 갈애.
목마르게 사랑을 갈증 느껴서 추구하는 거.
그 사랑의 대상이
지금 우리한테는
지금 법이니, 진리니, 깨달음이니 하는 이런 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하여튼 원리는 간단한데
핵심은 스스로 오염시키는 거다.
스스로 오염시킨다는 말은
내가 지금 깨어 있는 자기에서 만족 못하고
무언가를 지금 찾고 있는
그게 지금 모든 사단의 원인이다.
그러니까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
결국에는.
돌아옵니다.
/붓다는 현상세계 안에서 깨끗하게 만드는 이 방법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출가 화두인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그 한계를 자각하고
모든 방법론적 모색을 포기했을 때
뜻밖의 해결책을 얻었다.
그것은 깨달음으로
자기는 몸과 생각과 감정으로 구성된 현상의 아상이 아니라, 에고가 아니라
본질인 순수 의식이라는 자각이었다.
본질은 윤회하는 현상계를 해탈해 있다./
이때 본질은 의식이죠.
의식은 윤회하는 현상계를 해탈해 있어요.
여러분, 우리의 의식은
윤회하는 현상계에 물들지 않아요.
물들지 않죠? 그렇죠?
이거 중요해요.
물들지 않죠?
지금 이렇게 깨어 있잖아요.
깨어 있는 이것은
그 현상계의 그 무엇으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물들지 않는다.
이게 구원의 말이에요.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덕분에
이런 말이 나한테까지 전해졌고
나도 확인을 할 수 있다.
‘물들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질은 윤회하는 현상계를 해탈해 있다.
나의 본래면목이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하는 깨달음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생로병사도
이거 안에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죠.
생로병사라고 하는 현상으로부터
본질은 물들지 않는다.
하여튼 되게 통쾌한 거예요.
여러분, 의식이 언제 태어났을까요?
알 수 없잖아요.
의식이 언제 태어났을까?
알 수 없어요, 정말로.
그러니까 내가 몸을 받기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은
이거는 조금만 우리가 면밀하게 따져보면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몸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확실한 거예요.
그러면 그런 의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누구냐? 할 때 의식이에요.
예수님이 누구냐? 의식이에요.
지금 내가 누구냐? 의식이에요.
몸은 왔다가
몸에서 의식으로의 이전
그리고 몸에 집착하는 것이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는 거
그러니까 이게 하여튼 바른 안목의 가 가장 기본이다.
그리고 의식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롭다.
근데 마음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만든다 이거죠.
의식을 의심하게 만든다.
마음은 끊임없이.
그러니까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나는 게
사실은 공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지금 나라고 하는 이 땅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
지금은 의식이 지배하고 있어요, 수업 중에는.
수업만 끝나면 다시 마음이
여러분의 그 영토를, 여러분의 존재를
마음이 지배해요.
그러니까 “요 지배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
면밀하게 깨어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그게 공부라고 하면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자꾸 의심이 일어나요. 자꾸 의심이.
그리고 특히 어떤 의심이 일어났느냐 하면
욕심은 수업 중에는 깨어 있었는데 왜 또 이렇게 흐려졌지?
깨어 있어야지 깨어있어야지.
‘깨어있어야지’ 하는 욕심 부리는 것이 마음이다 이거예요.
마음은 굉장히 교묘하죠?
“깨달아야지 깨어 있어야지” 하고 욕심을 부려서
멀쩡한 것을 그것으로 또 지배하는.
그러니까 참 전략이 교묘해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이상을 추구하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제가 지금 돌아보니까
제가 여러분하고 이런 강의 처음 시작했을 때
저한테 개인적으로 굉장히 제가 중요하게 여겼던 말이 뭐냐 하면
하이데그가 한 말이
“서구의 역사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은 이상주의 철학이다.”
2천 년간 서구를 지배해온 철학은
이상주의, 플라톤주의
이상주의 철학이다는 거예요.
이상주의 철학
이 말은 뭐예요?
모든 인간이 이상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그게 아귀라는 거예요.
이상주의는 인간을 아귀로 만들어.
그래서 자기 딴에는 그럴듯한 이상을 추구하게 만들어서
평생 동안 쉬지 못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그게 서구 철학의 본령이라고 하는
그게 하이데그의 통찰이었거든요.
이번에 가서 카파토스라고 하는 교수가
그리스 사람이에요.
제가 그 사람한테 질문을 했어요.
“보세요, 당신 그리스 사람인데 책임을 좀 느껴봐요.” 하면서
서구 철학이 지금 이렇게 극렬한 물질주의가
이렇게까지 판을 치는데
이 근본 원인에는
당신이 그리스 사람이니까
그리스인 플라톤의 책임이 크다.”
제가 그랬거든요.
그랬는데 그 사람이 뭐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대답을 잘하더라고요.
뭐라고 대답하느냐 하면
“아마도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알았던 것 같다, 분명히 깨달은 사람인 것 같다.
근데 그 자기 스승의 깨달음을 체계화시키려고
플라톤이 하다 보니까
할 수 없이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은 이분법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거예요.
그래서 본질은 meta physics
physics을 메타, 초월하는
physics은 지금 이 현상계예요.
그러니까 형이상학, 그리고 형이하학으로 나누어서
본질과 현상을 나누어서
형이하가 다가 아니고 형이상이 있고
그것을 깨달으면
형이상과 형이하가 하나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 뒤를 못 따라가고
나누는 걸 가지고 집착하다 보니까
이원론이 되어버린...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의 깨달음은
불이법을 소크라테스도 깨달았고
근데 이걸 설명을 하려니까
할 수 없이 이원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어, 플라톤은.
근데 그 뒷사람이 플라톤을 오해해서
이걸 이원주의로 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서
이상주의에 빠졌다고 본다.
대단히 똑똑하지 않나요?
제 질문이 굉장히 날카로웠거든
“책임져라” 그랬거든
그랬더니 “책임은 플라톤의 책임이 아니고
그 뒤에 사람들이 플라톤을 오해해서
플라톤 철학을 이상주의로 만들은 거다”
이렇게 답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깨달았다는 걸 이렇게 설명하더라고요.
이번 여행 가서 수학이 크네.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소크라테스에게 제자가 물었을 때
유명한 말을 했잖아요.
“진리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잖아요.
기억나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이렇게 말했다는 거잖아요.
근데 이 그리스 사람이 하는 말이
그거 오해라는 거예요.
어떤 오해냐?
그리스 법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잘못 번역됐다는 거예요.
그게 아주 애매하대요. 까다롭대요.
근데 자기는 그리스 사람이니까
그 말이 이 말이에요.
소크라테스의 원뜻이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대개 번역하잖아요.
그거는 영어 번역이 잘못된 거고
그리스 원문의 본래 뜻은
The only thing I know_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is that I am no thing_ 나는 thing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이 말이에요.
이거 깨달음이에요.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의식이 The only thing I know_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is that I am no thing_ 내가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는 거예요.
맞아요?
의식이잖아요.
나는 의식이고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의식은 I am no thing
나는 어떤 것이 아니야, 현상에 속하지 않아
이 말이에요.
이게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명료하게 말을 했어요.
이해되나요?
그러니까 의식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이 그리스 말을 번역할 때
no thing을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
not thing으로 번역한 것 같아
이해돼요?
not thing이 아니고 원문은 no thing이라는 거죠.
무엇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무엇이 아니다.
나는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
통쾌하지 않나요?
여러분 지금 따라옵니까?
‘나는 누구인가?’에서
불에 데이지 않고, 물에 젖지 않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니고
크기도 없고 모양도 없고
그러나 이렇게 깨어 있는 이것
이게 우리 모두의 본질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깨달은 소크라테스가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이해되시나요?
이게 소크라테스의 말이에요.
그러니까 알았죠, 그죠?
안 사람이니까 이렇게 말을 하지.
근데 이 본질이라고 하는 이거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번역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오늘 첫 시간 공부의 결론은
I am no thing이라고 하는 거
이거 음미하자는 거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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