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은 세간의 욕망을 일으키지만
수행자들은 출세간에 대한 욕망을 일으킨다.
그러면 욕망의 대상은 바뀌었지만
구조가 같다.
에고와 욕망의 대상이라고 하는 구조가 같다.
그 욕망의 대상은
일반인들은 세간적인 가치고
수행자는 출세간의 가치
근데 그걸 추구하는 것은 구조가 같다.
근데 부처님께서도
이 구조 안에서는 해결을 못 봤다 이거죠.
그래서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신 거죠.
그래서 그 구조 자체를 놓았던 것이.
그래서 부처님이 구조 자체를 놓아버리고
그 당시에 수행림에서 이걸 하다가
거기서 아예 나와버린 거죠.
그래서 금지된 목욕을 하고, 죽을 먹고,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그냥 들판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수행림은 숲속인데 시체 버리는 곳이에요, 인도에서는
시체 버리는 곳에서 수행을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무서워서 사람들이 안 오니까.
그리고 숨어 지낼 수 있으니까
근데 거기서 벗어나서
그냥 들판에 나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했다,
이 말은 그 시스템을 버렸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이 일어난 것은
쌍차에요.
그러니까 모든 깨달음은 쌍차에서 일어나요.
이거는 이제 뭐냐 하면
보세요.
그 대상이 세간적인 욕망이 되든
아니면 출세간적인 욕망이 되든
출세간적인 욕망의 대상은
소위 말하는 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진리라고 하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 진리가 우리를 또 구속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다’ 하는 거 있죠.
의식을 예로 든다면
“아, 이게 의식이구나” 하고
이거를 의식으로 정의해 놓고
계속 의식, 의식하면서 그 의식을 법으로 삼는.
따라옵니까?
그러니까 의식을 법으로 삼는 것이 법상이에요.
쌍차는
쌍으로 차_막는다는 뜻이에요.
쌍으로 놓는다.
이거는 뭐냐 하면
아상을 내려놓으려면
아상이 좋아하는 대상을 내려놓아야만이
아상이 같이 떨어져요.
이해되나요?
그래서 양쪽으로 막는다.
아상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상을 막아야 돼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이것이 법이다’라고 이렇게 쥐게 된다, 이거예요.
왜냐하면 에고가 있으니까.
그 에고는 교묘하게 법을 가지고
법상을 만들어서 그걸 딱 쥐게 만들어서
에고가 존재하는 거예요.
에고의 존재 방식,
되게 교묘해요.
그래서 이거를 양쪽을 놓는다, 쌍차
양쪽을 놓는다.
원래 차는 막을 차,
차양 하면 가게에서 햇볕 막는 차양, 차일
일은 일_ 태양이네, 태양
차는 막을 차, 양쪽을 막는다.
그래서 여러분 공부가 진행되면 처음에는
의식을 “이게 의식이구나” 해놓고
그다음에 자기도 모르게 의식을 탐구하게 돼요.
탐구해야 돼요.
근데 탐구하다 보면
에고가 의식에 대한 도예를 그린다니까
일심 지금 불이, 이문,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의식에 대한 진리 도예를 그려놓고
그걸 품에 지니고 있는 시간이 몇 년 걸려요, 사람들마다.
진리 도예를 만드는 데 몇 년 걸리고
이걸 딱 품어서 지키는 데 또 몇 년 걸려요.
근데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에는 지켜야 되잖아요.
잊어버리면 안 되고, 또 지켜야 되잖아요.
그럼 지키는 놈이 있어서 마음은 뭔가가 답답해요.
이걸 가지고 있는 한은
일종의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거든.
잃어버릴까 봐, 까먹을까 봐.
거기에 대한 불편함이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나라고 하는 분리감이
이 법을 통해서 살아남는 거예요.
이해되나요?
공부가 깊어지면.
그래서 이걸 알아차리는 것이
또 하나의 공부의 고비예요.
그래서 딱 그거를 놓으세요.
그래서 그 놓는 방법이
앞 시간에 소개해 드린 대로
생각 끊어진 자리가 따로 있고, 나가 따로 있으면
내가 그 법상을 쥐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법상을 쥐고 있으면
여전히 아상이 남아 있어서
마음은 께름칙한 거야.
그걸 쥐고있는 한은
에고가 딱 거기에 붙어 있는 거야.
거기 숨어 있어.
그래서 쌍차를 하려면
내가 나도 모르게 쥐고 있는 거
그것을 놓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법을 놓아야 돼.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인다.
왜냐하면 스승의 말에 잘 속으니까.
여러분도 지금 제 말에 다 속고 있는 거죠, 지금.
저를 죽여야 돼.
청출어람을 하셔야 돼.
그래도 어쨌든 간에 죽이려면
소화를 시켜놓고 넘어가야지.
그렇잖아요?
이거를 선에서는 비유하기를
의식을 소라고 해요.
소를 발견하고, 그리고 소를 길들이고 뭐 하잖아요.
그 소를 타고
소를 타면 소가 또 집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십우도가 쭉 깊어지면 후반부 들어가게 되면
딱 소하고, 소를 찾아 나섰던 사람하고
그 둘이 딱 남는 것이, 그게 7번이네요.
7번 되면 소하고 사람이 남는데
이때 소는 소위 말하는 진리로서의 의식이에요.
그리고 사람은 이게 진리라고, 이게 의식이라고 쥐고 있는 한은
그걸 쥐고 있는 사람이 같이 있다, 이거예요.
그게 거의 쌍차
사라지는데, 사라지는 순서는
“진리를 내가 쥐고 있구나” 하는 그 자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먼저예요.
“나도 모르게 또 진리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여튼 그거 집착하고 있어, 뭔가.
그런데 그걸 거룩하게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있어.
딱 합리화시켜 놓고.
그 소가 사라지는 게
소와 사람이 마지막에 남는데 소가 사라진다.
이게 망우존인忘牛存人이네요.
키보드 중에 7번이
망_ 잊어버린다.
우_ 소를 잊어버린다.
그런데 사람은 남아 있다, 이렇게 표현해요.
그러니까 7번이 망우존인
그럼 8번은 쌍차 중에서 소하고 사람인데
소는 소위 말하는 진리예요.
그러니까 진리하고 사람이 남는데
진리를 먼저 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무엇이 가능하냐?
진리를 버릴 수는 있어요.
다시 말하면 “진리도 한 개 생각이구나” 이거예요.
신도 한 개 생각이고, 부처도 한 개 생각이고
진리도 그냥 한 개 생각이고.
제 말 들어옵니까?
따져보면 그래요.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것도 생각이라니까, 결국에는.
근데 자기도 모르게 그 생각을
딱 애지중지 쥐고 있음으로써
에고가 존재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에고가 사라지는 방식이
진리가 먼저 잊어버릴 때 에고만 남죠.
그럼, 그다음 단계가
인_ 사람하고 소가
구_ 모두 잊어버린다, 모두 잊어버린다, 이 말이에요.
처음에는 애써서 발견하고 챙기고 막 돌보다가
잊어먹지 않으려고 막 하다가
결국에는 의식도 놓아야 된다 이거야.
의식을 쥐고 있는 한은, 의식을 챙기는 한은
챙기는 놈이 딱 숨어 있는 거죠.
에고가 끈질기게 붙어 있어요.
그래서 진리를 버리고, 나로 돌아오고
그러면 그 나도.
이때 이 나는
나라는 것이 사라져야 딱 진짜 하나만 남지.
그러니까 불이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쌍차_ 쌍으로 막는다.
그 쌍차의 방법은
자기를 돌아봤을 때 나도 모르게
‘이거다’라고 쥐는 게 있다, 이거예요.
남한테 말은 못하지만
이걸 쥔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엔가는 의지하게 돼 있어요.
약해요. 인간이.
그래서 임제 같은 경우는
무위_ 의지하지 않는 도인
도인의 특징은 의지하는 바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진리에 의지해요.
근데 그 진리를 교묘하게
“이거다”라고 배워서 쥐고 있다, 이거예요.
근데 그거를 7번에서는
진리를 놓고 사람만 남았는데
그러면 상처가 되어서
사람하고 진리 둘 다
인우구망을 십우도에서는 일원상으로
(왼손으로 그러니까 훨씬 자연스럽네.
빼뚤빼뚤빼뚤 달항아리 그린 것 같으네
달항아리가 매끈한 거 없어요. 다 빼뚤빼뚤해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래요.)
이 일원상, 인우구망이 일원상이에요.
그래야지 정말로 텅 빈다고 하는
그러니까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한번 드러날 때는
텅 빈 채로 인우구망의 일원상으로 상징이 되는 거예요.
근데 당연히 이것이 끝이 아니고
9번은 반본환원返本還源_ 처음 그대로 돌아간다.
처음 그대로 돌아간다, 이 말을
초심이라고 불러, 선에서는.
그래서 선심은 초심이라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완전히 이런저런 특별한 것이 다 떨어져 나가면
본래부터 이렇다는 거에요, 정말로.
“정말로 처음부터 이랬네. 처음부터 이거 하나밖에 없었네” 하는
그 자각이 분명히 와서
그래서 화엄경 첫마디에서 부처님이 하신 것처럼
“놀라운 일이다.
여래가 정말로 원만한 정각을 이루었더니
일체 생이 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모두 다 처음부터 다 이 불상을 다 가지고 있구나” 하는 그런 말씀이
정말로 소화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야 정말 법이 평등해지고
더 이상 이거라고 안 쥐고
그리고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없어져서
반본환원은 정말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진짜 모든 인간이 불성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그래서 오히려 공부하기 전하고 똑같다고 하는 것이
9번의 메시지예요.
“공부하기 전하고 공부하고 난 뒤가 똑같구나”
“조금 더 분별이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그 자각이
쌍차 뒤에 쌍조를 말한다, 이거예요.
쌍차_ 인우가 구망하는 거고
모두가 다, 이 모든 대상들이, 이분법적인 분별들이 사라지는 거고
그리고 반본환원이 되면
반본환원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십우도에는 수류화개라고 이렇게 또 쓰여져 있어요.
그림에 수류화개水流花開_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자연 그대로다 이거예요.
그리고 구도의 그림은
거의 자연 그대로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걸 그려놨어요.
이 말은 자연 그대로라는 말이에요.
알고 봤더니 인간도 자연이다.
그래서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다.
깨닫고 나면
하나도 없이
그러니까 중생이 그대로 부처지
이게 뭔가 바뀌어서 번쩍번쩍번쩍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도인들은
오히려 원효가 그런 말을 했죠.
원효가 공부되고 난 뒤에
자기 보림하는 기간에 숨어 살았거든요.
숨어서 어느 절에 가서 부목했어요.
원효 스님이 처음 깨닫고.
깨달은 건 우리가 알다시피
그 무덤 속에서 물 먹다가 깨달았잖아요.
다시 말하면 이거예요.
도인이 진짜 공부가 되면
쌍조의 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의식 하나이기 때문에
전부 다 의식 하나라서
쌍조라고 하는 말은
모든 게 의식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게 검증된다 이 말이에요.
지금 주관 객관
주관 객관의 분별이 쌍차가 되고 나면
모든 것이 주관 객관이
다 한 개 의식이 주관 객관으로 연기되어서 나타나는 게 이 세계다.
지금 따라옵니까?
완전히 현상에서 한 번 탁 벗어나면
현상에서 벗어날 때는
주관 객관이 탈락하는 거고
그럼 인우구망에 그냥 이렇게 일원상이고
근데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살 수는 없어요.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움직이기 때문에
현상계를 다시 나투거든요.
한 번 본질이 되었다가 현상계에 나툴 때는
똑같은데 뭐가 달라지느냐 하면
주관도 객관도 둘 다
한 개의 의식의 나툼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로 평등하다고 하는 이 사실이
드러난다 이거예요.
자연 그대로인데 눈은 변해 있어.
그래서 눈이 변했기 때문에
모든 주관이든 객관이든, 모든 것에서 의식을 보는 거예요.
*!
의식이에요.
쌍조라는 말은
모든 것이 의식이다, 이 말이에요.
이것도 의식이고
소리도 의식이고
나도 의식이고.
근데 의식은 본질로서는 불생불멸이지만
현상으로는 찰라생 찰라멸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하여튼 멀쩡한 모든 것이
그래서 번뇌가, 번뇌 즉 보리가 저절로 되는 거
상황 이해되죠?
그래서 수류화개, 이 숨어 있는 뜻은 반본환원
본으로 거꾸로 가서
환_ 원으로 돌아가고 본으로 돌아간다 이 말이에요.
그걸 두 번이나 쓴 거잖아요.
본래대로 돌아간다, 이 말은
변한 건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자연 그대로 가니까 안목은 바뀌어서
자연 그대로가
자연 그대로를 선에서는, 불교에서는
여시_ 있는 그대로라고 해요.
‘여시아문’ 그러잖아요.
‘있는 그대로’
깨닫기 전에는 ‘있는 그대로’가 분별세계, 차별세계고
그리고 깨닫고 난 뒤에는
모양은 다 달라도, 그 모양은 달라도
본질은 한 개 의식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이 분명히 되고 있는 상태
이게 쌍조예요.
모든 것이 검증된다, 이 말 이해되나요?
깨닫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부정되고
깨닫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긍정된다.
9번은 비밀이 하나 숨어 있어요.
9번의 비밀은 뭐냐 하면
9번 전에는 이 세계가
법신과 법신의 나타남인 화신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세계가 법신과 화신으로 이 세계가 이루어져 있어요.
근데 9번부터는 뭐가 되느냐 하면
모든 것이 한 개 의식의 나툼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지금 내가 일으키는 한 생각이나 나의 한 행동이
이것도 본질인 의식의 나툼이죠.
맞나요?
그럼 그걸 알고
내가 한 생각을 일으키고
제스처를 움직이면
본질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거죠.
그것이 자각되고 있는 사람한테는
일거수일투족이 본질에 나타남으로 드러나겠죠.
그전에는 작각 안 해도 화신이에요.
자기가 알건 모르건
한 개 본질의 모든 현상은
화신이에요.
법신 화신의 관계였다면
법신 화신의 관계에서
새로움이 하나 출연하는 게 이 9번이에요.
수류라는 말이
이때 수가 마음이거든요.
마음이 나타나는데
그 나타난 마음이
이제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집착하지 않아.
아니 지금 다 예쁘건 밉건 다 본질이니까
어디에도 집착하지를 않는다.
이 말 들어오나요?
그러면 내 마음이 어디 가서 마음을 뺏기지 않으니까
고이지 않는다.
그 말도 들어옵니까?
그러면 흐른다.
내 마음이 물처럼
수류_ 흐른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이 세상에 개입하는 하나하나가
일종의 본질의 나툼이 되는 거예요, 본질의 나타남.
그때 나의 행동, 생각 하나, 감정 하나
이걸 보신이라고 해요.
그래서 보신이라고 하는 말은
‘수행의 결과로 얻는 몸’이에요.
수행을 하건 안 하건 법신, 화신인데
우리가 본질로서는 법신이고, 현상으로서는 화신인데
쌍차가 되고 난 다음에 쌍조 할 때는
내가 하는 행동 전체가 다 하나하나가
쌍조_ 대긍정의 메시지 에너지가 나온다 이 말이에요.
그럼 그 에너지가 보신이라는 거예요.
그럼 보신을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수류화개 할 때 ‘꽃이 핀다’, 이 말은
보신이 이 열매를 맺어 나가는
이 세상에 개입을 해서
불국토를 만들어 나가는
구체적인 실행이 펼쳐지는 세계
그게 보신의 세계예요.
이게 수행의 결과로 얻는 몸
수행하지 않아도
누구나 본질은 법신이고, 현상은 화신이에요.
근데 수행의 결과
이런 걸 통해서
이제 8번을 완전 쌍차를 나고 난 뒤에, 쌍조로 전환되면
그때부터는 이럴 때 또 제가 무섭다는 표현을 쓰네.
그런 자각이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이 보신이 등장하고 있다는 이런 자각이 있어서
보신이 보살행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보살행이라고 하는 것은
9번이 되어야만이 일어나는 거예요.
10번은 입전수수入廛垂手잖아요.
입전_ 시장에 들어가서
수수_ 손을 긋고 사람들을 도운다.
실제 행동의 세계가 펼쳐지는 거.
입전수수.
그러니까 공부에서
한 번만 그냥 복습합시다.
처음에 1번이 심우_ 소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2번이 견적_ 발자국을 본다.
발자국은 주로 경에 남아 있어요.
우리가 모든 사람이 제일 처음 공부하는 게
반야심경부터 무슨 경 해서
조사어록도 마찬가지고 경을 보잖아요.
그게 이제 흔적을, 발자국을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조사나 불조가 말씀하신 것이
진리의 발자국들이니까. 이해되나요?
발자국을 보고
세 번째는 이제 소를 얼핏 봐 얼핏, 일별한다.
얼핏 본다.
일별은 지금 여러분
*!
소리 들려요?
듣는 거예요.
알아들었으면 일별이에요.
의식을 한번 알아듣는다, 알아차린다.
이게 견우_ 소를 한번 본다.
그리고 득우는 “아 이거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 하고
스스로 “아, 이거구나” 하고 딱 이렇게 점 찍는 순간이 와요.
“아 ,이거구나” 하고 딱 그 점을 한번 찍어야 돼.
득우, 이거를 표시하기를
소에다가 코뚜레를 딱 꿰서 끌 수 있게 되는 거
“아, 이거구나” 하고 딱
그러니까 이렇게 법문 듣다가 그냥 알아차리는 것은
일별_ 한 번 흘낏 보는 거.
근데 득우는 소에 코뚜레를 꿰서 밧줄을 쥐는 거예요.
그게 득우, “아, 이거다”라고 딱 한 번 확실하게.
그리고 5. 목우,
목우는 우리들의 분별심이 여전히 치성합니다.
이해되나요?
의식이라는 걸 알아들어도 분별심은 여전히 치성해요.
그래서 경계에 닥치면 분별심이 막 날뛰어.
이해되죠?
그 목우라는 것은 그 분별심을 겪어내는 거예요.
목우라고 하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겪어내는 것.
근데 이걸 겪어주면 얘네들이 숨이 죽어요.
만약에 피하면 숨이 더 거세, 따라다녀요.
근데 피하지 말고 한번 겪어준다.
도망 다닐 때는 공포심이 있어요.
근데 겪어버리면 어때요?
진짜 한 번 겪어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별거 아니네” 하는 또 그게 올라와.
그래서 자기 분별심에 스스로 뒤집어지는 것을 겪어주는 게 목우에요.
도망가는 게 아니고,
없애는 게 아니고.
그래서 하여튼 지금 공부한 뒤에 자기 분별심을 겪는다.
근데 이 의식의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겪으면
거의 못 이겨요.
근데 자각 상태에서 겪으면 훨씬 더 겪을 만해져요.
상황 이해되나요?
그래서 깨닫고 수행하라는 거예요.
이 겪어내는 게 수행이고
자기 본질이 깨어 있으면 깨어 있을수록
현상의 농도는 옅어져요.
왜냐하면 본질은 의식은 불생불멸에 여여한데
이게 정말 진짜 말하자면
이게 리얼리티고
여기에 인연 따라 지금 이렇게 모든 현상은 나타났다 사라지거든요.
그러니까 갈수록 농도에서
그전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살다가
이것이 있는 줄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현상은 옅어진다, 농도가.
왜냐하면
찰라생 찰라면이 보이기 때문에
제행무상이 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여튼 분별심을 겪어내는 거.
이때 가르침은 감인대堪忍待에요, 감인대.
감인대 이 말은
보문사 주지였던 용성 스님의 제자였던 동상 스님의
평생 그분의 좌우명이에요.
감인대.
이거는 본질을 본 사람
자기가 의식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이 하는
그다음 공부는
감_감내한다, 감내
인_참는다
대_ 기다린다
겪고 참고 기다린다.
왜냐하면 눈이 밝아져서
그전에는 모르고 지나가는 것들도
이제는 밝아지니까 보인다.
카톨릭에서는 그러지 않아요.
성인일수록 더 자기를 죄인이라고 한다, 이 말이에요.
일반인들은 자기 죄도 못 봐. 몰라 그냥, 안 보여.
근데 눈이 밝아질수록 자기 죄가 보인다.
근데 그 죄를 어떻게 하는가?
감내하고 인_ 참고, 대_ 기다린다.
그래서 감인대가 목우하는 과정이에요.
감_ 감내한다, 겪는다.
여러분 겪는다예요.
실망했어요?
에고는 실망해.
번쩍 하면 뭐 이런 것이 다 사라지고
삐까뻔쩍할 거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런 도리가 아니라는 거죠.
그대로다.
그대로다, 이 말은
낙의 일이 지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왔다, 이 말은
깨달아도 업장은 그대로다.
이걸 이제 겪어내는 일이 남아서
그래서 사실은 공부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깨닫는 것은 시작이고
그 뒤에 자기 업장을 이렇게 겪어내는 게.
하다 보니 십우도 강의가 돼 버렸네.
6번은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겪어내면
얘네들이 왜 있느냐 하면
내가 살면서 내가 나의 나쁜 점을, 나의 약점을
내가 그토록 싫었기 때문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 약점을 싫어해요.
이상하게 어떤 사람 만나면 화가 나
그거는 나의 약점이 그대로 드러난 거라서
그걸 보면
내가 평소에 억압하고 있거든
이해됐나요?
나의 약점을 억압하고 있는데
그걸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화가 완전히 자기도 모르게 확 치솟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대개
자기 약점을 억압하고, 억누르고, 지하실에 가두고 있어.
근데 걔가 운다고요.
그 억압할 그 나이에서 더 이상 생장 안 하고
거기서 갇혀서 지하실에서 울고 있다고.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내면아이’
울고 있는 내면아이라고.
목우라고 하는 것은
그것들을 지하에서 다 끄집어 내는 거에요.
햇볕을 쪼이는 거
그러면 천도 돼요.
그래 되면 생각 감정이 일어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면
그것들이 두려워지지 않고, 그리고 맡길 수 있게 되요.
그전까지는 내가 컨트롤하려고 해요.
내 약점이 남한테 보일까 봐.
계속 신경 쓰고 컨트롤하고 사는데
이제 그것이 어느 정도 되면
그다음부터는 자기를 열어도 돼.
공부하다 보면
어느 정도 이런 문제에서 좀 정리가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그다음부터는 자기를 열어요.
그래서 자기 약점을 말하게 돼.
그러면 그때부터는 내가 잡아서 억압하고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또 나의 약점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없어지잖아요.
그럼, 그때는 소를 탄다, 그래
그전까지는 고삐를 쥐고 계속 이걸 단속하려고 했는데
소를 타면 그러고 있으면
이제 소가 알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본질로
저절로 우리 마음이 순숙해지면서
본질로 돌아가서
기우귀가_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해되죠?
자연스러운 과정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 돌아가서 나머지 숙제가
그래도 쥐고 있는 자기 법을
7번 소를, 그래도 뭔가 소를 쥐고 있다 이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게 집이다라는 것도 있어.
여러분, 참, 참 골치 아프죠?
진리를 깨달으면 그게 끝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자기도 모르게 진리에 또 집착한다, 이거예요.
이 에고가 진짜 끈질겨서.
그러니까 이게 진리다. 이게 집이다.
이게 한 생각에 이런 끊어진 자리라고 하는 그것에
자기도 모르게 또 집착고 있어서
그거를 보고 소가 사라진다.
상황 이해되죠?
법상이 사라진다.
이걸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강을 건넌 다음에 뗏목도 놓아라
이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무유정법_ 법이라고 정해서 세우지 않는다.
요방심_ 유교하고 비교해서 많이 말을 해요.
일반인들은 방심해서 산다는 거예요.
마음을 그냥 탁 놓아버리고
그냥 마음 따라다닌다.
이해되나요?
마음 따라다닌다.
술 마시고, 뭐 하고
그러다가 유교에서는 구방심
놓아버린 마음을 구_ 찾아라, 이거예요.
이게 지금 유교에서 맹자사상이에요.
맹자 사상 한마디로 구방심
사람들이 자기 집 저녁에
닭 한 마리 없어진 것에 놀래서 온 천지를 다 찾으면서
자기 마음 방심한 거는 안 찾고
저렇게 넋 놓고 산다고
그래서 맹자사상, 이해되죠?
이게 유교예요.
근데 구방심한 다음에는 여기 끝이지만
우리 불교에서는 요방심_ 방심을 마음을 놓는 것을 해라 이거예요.
왜냐하면 방심한 마음을 구해서 쥐고 있으면
그것에 구속돼.
그래서 유교는 “에햄”이 나온 거예요.
이거를 딱 쥐고 있는 삶.
그래서 무슨 형식, 예절,
우리가 좀 답답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구방심, 맹자 가르침인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찾았으면
그 법을 놓아라.
법을 쥐고 있는 게 에고다.
우리의 지금 타깃은 에고인 거예요.
그러니까 법을 놓아라
이게 요방심_ 오히려 마음을 놓는 것을 하라.
그래서 요방심 하면
이게 소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자연스럽게 같이 가는 것
소고삐를 채우고 채는 거라면
유학자의 삶은 이 고삐를 놓지 않는 거라면
이제는 고삐가 아니라 올라타고 그냥 같이 가는 것
그러면 저절로 우리 본연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거예요.
그다음에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마지막 알아차려서 놓고
그러면 에고만 남고
그러면 쥐고 있는 게 없으면
자연의 에고도 같이 사라진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가서 그때부터
보신을, 보신의 세계가 열리는 거.
보신의 세계도 무서운 세계예요.
그러니까 정말 마음 비운 사람이 한 생각 일으키면
엄청난 에너지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세계를 펼쳐서
이제 남 도우면서 살아야지.
여러분께서 공부가 앞 단계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설명을 하고
처음에는 이 어록도 정밀하게 강의도 하고
중도의 원리를 제가 계속 또 설명도 하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 왔는데
어느새 이제 여러분이 살짝살짝 깨어나고
이렇게 슬금슬금 진도가 막 나가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할 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지금 단계에 와서 이렇게 하다 보니까
하여튼 법문 자초지종을 다 말하게 되는.
그래서 그 단계에 있는 분들이
그것만 말하면 참 좋은데
왜 법문 내용이 갑자기 넓어져서
“나한테 해당되는 건 요거밖에 없어서 어떡하죠?”
이런 사람들도 있어.
지금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건 할 수 없어.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의 층이
이제는 상당히 이렇게 쌓여서
하여튼 이런 과정을 Iternary
공부 과정을 저는 다 설명하고, 여러분은 소화해서
“내가 어떤 단계에 있구나” 하는 걸
여러분 스스로 양심적으로 하셔서
거기에 맞춰서 쭉 하는데.
그러나 우리 공부의 좋은 점은
결론을 알고 하는 게 좋다 이거예요.
그래서 중간에 세지 않잖아요.
그 시간 허비가 엄청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중도불이에요.
중도불이의 마지막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에요.
나, 나를 제외하고 뭐가 없어.
그런 부처 없고, 그런 신 없어요.
다 내 생각이야.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다 내 생각이에요.
그 생각이 딱 끊어지면
뭐가 남아 있느냐 이거죠.
그 생각이 끊어져야 진짜만 남아요.
딱, 이 하나
딱 ,이 하나
있는 그대로의 이거.
그렇게 공부가 완성되니까
여러분 참고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김홍근_육조단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조단경52] 수용의 힘을 기르자 | 깨어서 꿈을 산다 (0) | 2024.11.06 |
---|---|
[육조단경51] 지금 이 의식이 전부다 | I am no thing (0) | 2024.10.31 |
[육조단경49] 생각이라는 윤회를 벗어날 때 | 불이법(不二法)이 기준이다 (0) | 2024.10.24 |
[육조단경48] 무심이 끝이 아니다 | 보신(報身)을 일으키다 (0) | 2024.10.23 |
[육조단경47] 모든 것이 나로 수렴된다 | 이제 집을 나가지 않는다 (0) | 2024.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