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 인문학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쉽게 해석해서 여러분이 실생활에서 바로 참고하실 수 있게 도와드리려는 강의들이 현재 한 800개 정도가 무료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동양고전들이나 기독교도 경전들, 불교 경전들은 좀 특히 많구요, 기타 서양철학이나, 아무튼 여러분들이 인문학적으로 고민하시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철학적인 답이나 인문학적인 답을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제가 또 질의응답을 많이 한 것들에 대해서 다 그것을 공개해 봤습니다.
저도 제 얼굴과 이름 걸고 공개했을 때는, ‘이런 지혜는 이런 정보는 공유하고 싶다.’라는 어떤 간절한 확신이 있었거든요. 제가 한 인문학공부를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해서 퇴계집, 율곡집사서 보면서 시작이 되었는데, 대학가서 역사학과를 먼저 갔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공부를 했던 건 대게 중요한 거 같아요.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료를 판단하는 거나 자료를 검토하는 버릇을 그때 좀 배웠고,
그런데 철학에 대해 더 목말라서 대학원은 철학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역사학과에서 공부한 거하고는 또 달라요. 아주 철학적으로만 연구하니까 좀 시공을 초월해서 사실은 현실감이 없는 거예요. 이론으로만 따지고 계시더라구요. 두 공부를 제가 겸하면서 제 안에서 소화를 다보니까 "아, 이게 좀 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 이러고. 저는 고등학교 때 소설 '단'을 제가 지방에 살았는데 보고, 그 책이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그 책을 보고 제 인생이 좀 꼬였는데,
그 선생님이 백발 어르신, 책 표지에 있는데, “이 분을 만나서 좀 도를 배우고 싶다.” 해서 대학을 붙자마자 바로 찾아갔어요. 그래서 배웠더니. 그분한테 단전호흡이나 명상법을 배운 거죠. 그래서 동양철학을 저의 식으로 몸으로 겪으면서 공부하는 그런 동양철학을 저는 좋아했고, 그러다보니까 대학원에서 배운 역사나 철학적인 어떤 정보들이 저한테는 조금 너무 지식적인 공부로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 몸에서 마음에서 그걸 체험하고 싶다.
진짜 부처님 같은, 공자님 같은 분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좀 실전적인 지침으로 고전을 읽었거든요. 제가 살 길을 열어주는 메뉴얼이라고 생각하고 고전을 공부했더니, 나중에 이런 고전공부법을 가지고 제가 인문학을 설명 드렸더니 너무 좀 다른 거예요. 지식으로 공부하신 분들의 이야기하고.
그런데 저는 장담하건데 소크라테스가 지식으로 공부한 분 아니죠? 자기 온몸으로, 진짜 옳은 게 뭔지 궁금해서 명상하고, 연구하고 했던 분입니다. 그분이 한번은 어떤 주제에 집중을 하면 아고라광장에 서서 밤새 서 있는데요. 명상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냥 멍한 명상이 아니라, 진리를 찾는 명상이에요. 답이 풀릴 때까지는 안 움직인데요.
그럼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다 "아, 소크라테스 또 저러고 있구만."하면 아침 되어서 답이 풀려야 그때 움직이는 거에요. 시간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잊어버리고 그 문제에 몰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명상의 핵심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좋은데,
몰입을 통해서 창조력을 끌어내어서,
내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거라고 봤습니다.
그렇게 배웠습니다. 인문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커스 윤리학, 그 후반부에 가면 ‘명상이 최고의 행복한 삶이다.’라는 얘기를 합니다. 관조의 삶이. 왜냐? 아무것도 필요 없고 나와 신의 로고스, 그것만이 현존하는 상태에서 우리가 신의 진리를 음미하는 상태가 진짜 명상 아니냐? 여기에는 돈도 필요 없고 친구도 필요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돈도 있어야 되고, 친구도 있어야 되고, 도와주려면 도움을 받을 사람도 있어야 되고.
조건이 맞을 때만 펼쳐지는 그 행복의 덕이 있는데, 이 명상이라는 건 혼자서 그냥 누릴 수 있는 거죠.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면. 이런 얘기들을 쭉 보면서 동서양이 차이가 없다는 것도 배웠어요. 동양선비들은 당연하구요. 율곡, 퇴계 이런 분은 명상의 달인입니다. 조선선비들은 이 명상을 경이라고 불렀어요. 경. 잘 아시죠? 경건할 경. 마음을 경건하게 해서 퇴계나 율곡이 똑같이 한 말이 있습니다.
경은 뭐냐?
마음이 정신이 바짝 차려서
딴 데로 가지 않고,
맑고 순수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조선 500년간 명상의 달인들이 계속해서 내려왔던 겁니다. 요즘은 새삼스럽게 서양에서 마음챙김이니, 뭐니 자꾸 들여와서 우리가 공부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우리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에요. 이런 것들을 제가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하나씩 점검하고, 실제로 그분들의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접해서 보면서, 이제 확신이 들어서 저도 저대로 수련을 계속 해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명상과 고전을 항상 함께 진도합니다. 홍익학당은. 왜냐?
명상을 안 하시고는
고전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고전을 쓰신 분들은 다 명상의 달인이신 거예요. 그분들 마음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합니까? 지식으로 그분들의 명언을 아무리 외워도, 내 마음에서는 그게 구현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먼저 명상을 하시면서 본인마음을 본인이 컨트롤을 하는 주인공이 되시면서 이 인문학적인 정보들을 얻으시면요, 여러분은 인생의 메뉴얼을 얻으신 것처럼 아주 잘 활용하실 수 있게 될 거라는 겁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 강의핵심도 모든 인문의 고전에 지혜의 핵심을 말씀드릴 거고, 겸해서 아주 손쉬운 명상법을 말씀드릴 거예요. 이 명상법은 동서양 모든 고전에서 강조되는 건데, 다들 이게 현란한 명상을 좋아하시는데 동서양의 고전의 대가들은 다 이 명상을 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론 보셔도 마음을 내려놓는 달인이에요, 이 사람이. 그런데 그 말만 들어서는 “나는 안 내려놔지는데 그 사람은 잘 내려놓더라.” 요런 얘기로는 여러분한테 도움이 안 되니까, 그 내려놓는 방법을 제가 오늘 말씀드릴게요.
이게 불교에서도 쓰던 거고, 기독교에서도 쓰던 겁니다. 종교는 다른데 다 똑같은 것을 써요. 그거 바로 지금 한번 해드릴께요. 왜냐하면 여러분 마음을 내려놔야 된다는 이 생각 자체도 사실 내려놔야 되죠. 그런데 왜 이걸 우리가 힘들게 명상을 하고 있느냐 이거죠. “내려놔야 되는데, 잡념이 없어야 되는데, 왜 나는 잡념이 들까? 언제쯤 내 마음은 고요해 질까.” 이거를 싸우는 걸 명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고
동서양의 인문학의 달인들이 한 명상은 진짜 내려놓는 거거든요. 그럴 때 쓰는 방법이 [몰라]입니다. [몰라]만 잘 쓰시면. 노자에 이 말이 나와요. 백성들은 무지무욕하게 만들어라. 이 말을 현대말로 바꾸면 [몰라, 괜찮아]에요. 무욕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로 만들 것. 진짜 바라지 않으시면 된다는 거예요. 무지는 진짜 여러분이 지금 당장 여러분 이름만 모르시면 되요.
여러분이 다 여러분이라는 이름 때문에,
누구 아무개를 위해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욕망은 누구를 위한 욕망이죠?
나를 위한 욕망.
그런데 내가 아무개 누구라는 걸
“모르겠다”하고, “배째!” 하고 계시면,
어떤 잡념도 여러분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잡념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른다.’ 라는 자세.
잡념과 싸우지 말고
잡념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잡념이 일어나든 말든 ‘난 몰라’라는
‘몰라’에 일관된 태도만 유지하시면
어떤 잡념도 여러분을
흔들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여러분 게 되요.
여러분은 마음을 리셋 시키실 수가 있어요. 자, 한번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성함 여쭈어보면 저 똑바로 보시고. 눈빛 보면 아니까 똑바로 보시고 [몰라]라고 하셔야 됩니다.
“자, 성함 어떻게 되세요? 모르시죠.”
“성함 어떻게 되세요? 모르시죠.”
“성함 어떻게 되시죠?”
자, 모르는데 존재하시죠?
자, 노는 것처럼 접근해 보세요.
자, 모릅니다. 이름도 몰라요. 지금 몇 시인지 모릅니다.
자, 여기 지금 어디인지 몰라요. 옆에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돈 걱정 되십니까?
이름도 모르는데 돈 걱정이 있어요? 모르시죠?
‘몰라’로 계속 버티세요.
돈 벌어야 되지 않아요? 지금 흔들리시는 분들 계실 수 있는데, 보이스 피싱 같아요. 잡념은. 슬며시 다가옵니다. 대게 심각하다는 듯이. 그때 [몰라]하실 수 있냐 이거죠. “모릅니다” “난 내가 누군지 모릅니다.” 라고 진짜로 모른다고 한번 잠깐만 상상을 해보세요. 재미있어집니다. 내 마음이 리셋 되요. 초기화 되요. 자, 눈 한번 감아보세요. 제가 한번 유도해드릴게 따라와 보세요.
자, 지금 몇 시인지 모릅니다.
여기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름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없습니다. 이름도 모르는데요.
돈 걱정 없습니다. 이름도 모르는데.
난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르겠습니다.
남편? 자식? 모르겠습니다.
승진, 걱정 되십니까? 이름도 모르는 분이?
앞날이 걱정되십니까? 이름도 모르시는데?
자, 지금 부족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하세요.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해보십시오.
잡념이 일어나도 싸우지 마세요.
네가 일어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다.”라고만
태도를 분명히 하십시오.
자, 모릅니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분이 실제 좋아시실 거예요.
걱정이 없으니까.
걱정이 뭔지 모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기분이 좋아지시게 됩니다.
기분이 실제로 좋아지신 다는 건 호르몬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세로토닌이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세로토닌이 나옵니다. 걱정을 안 했기 때문에.
자, 괜찮아도 같이 써볼게.
몰라. 그런데 괜찮습니다.
지금 딱 좋아요.
괜찮다라고 말하실 수 있죠.
자, 괜찮다라고 해버리세요.
괜찮다. 괜찮다. 모른다. 괜찮다.
자, 이런 분을 어떻게 건드립니까? 저를 보세요. 보이스 피싱이 전화했어요. "아들이 잡혀있습니다." "몰라요." "아들이 지금 생사의 위기에 처했는데 그러실 수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자, 보이스 피싱이 이 사람한테 무슨 해를 줄 수 있을까요? 못해요.
잡념은 꼭 보이스 피싱 같아요. 절박한 문제를 들고 나와요. 여러분이 꼭 중요한 뭘 하려고 할 때, "지금 이럴 게 아니라, 뭘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돈 벌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때 [몰라]라고 못하시면 바로 끌려 나가요. 바로 물건 사고 있다구요. 외판원한테. 띵동, 띵동 문 열어주고 대화 좀 나누다보면 물건을 들고 있다구요. 왜냐하면 제가 딱 원하는 말만 하니까 안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을 안 산다는 것은 진짜 어리석은 짓이라고 느껴지신다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사고 돌아서면 “왜 샀지?” 할 수도 있단 말이죠. 잡념이 이래요. 띵동띵동했을 때 [모릅니다.] “뭐 필요하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때 진짜 괜찮다고 상상해 보세요. 잠깐만. [괜찮다] [모른다] 할 때 힘있게 한번 [몰라] 힘있게 [괜찮다] 한마디씩만 해주실 수 있으면 여러분 마음은 여러분 게 됩니다. 명상의 대가들이 쓰던 거예요.
노자의 1장에서
무욕, 욕망, 바라는 것만 없으면
그대로 도의 본체를 볼 수 있다.
진리와 하나 될 수 있다.
이 말이 왜 나왔냐하면 여러분이 아무개 누구라는 걸 잊고 잠시 존재했을 때, 자, 지금 다시 한 번 들어가 볼게요.
성함 모릅니다. 눈 감아보시구요.
자, 이름 모릅니다. 여기 어디인지 모릅니다.
시간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존재할 뿐입니다.
부족한 것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이가 몇이십니까?
아실 수 있나요? 생각도 없고 이름도 없으신데?
나이 모르시죠?
걱정이 있으세요?
걱정 없으시죠?
존재하실 뿐이죠.
어떤 불순물에도 오염이 되지 않습니다,
이 상태는. 모르는 상태에는.
자, 저를 보세요. 숭산 스님이 이거가지고 미국 가서, 아이비리그 강의 가서, “오직 모를뿐!” 아니까, 사람들이 머리 복잡하던 분들이 시원해졌어요. 그래서 출가해서 우리나라 와서 지금 도 닦고 계신 외국 승려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 [모른다] 한마디에 시원해진 거예요. 그분들은 더 알려고, 더 알려고 머리가 좋아서 더 노력했던 분들인데, 그분들한테 “모른다 할 수 있냐?”라고 한 거예요. “너희 진짜, 너 이름도 모른다 할 수 있느냐?” 이게 예전부터 내려오던 방법입니다. 자, 이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의 본체를 만난다고 노자는 인문학의 최고봉의 경지에 있는 노자는 그런 말을 했는가? 제가 고민해 봤는데, 자 보세요.
우리가 이름도 모르고 있을 때
나이도 모릅니다.
즉 시공의 흐름을 못 느껴요.
존재만 해요. 걱정이 없어요.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입니다.
나이를 모르고, 영원하고,
걱정이 없고, 즉 지복, 즐겁고,
아_나 밖에 없고,
정_오염되지가 않아요.
시공 속의 체험에 오염이 되요.
그 작은 나로 돌아가면
배고프고 돈이 없고 뭔가가 붙어요.
그 스펙에 오염이 안 돼요.
이게 여러분이 모든 인문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하나 된 상태를 묘사할 때 쓰는 말들에 다 해당이 됩니다.
여러분이 [몰라]하는 순간
여러분은 가장 순수한 상태로 존재하시고,
이원성을 초월한 상태로 존재하세요.
그래서 노자에서 무욕,
바라는 것만 없으면 그대로 도의 본체를 본다라고 말했고,
중국 유명한 불경 중에 불경이 인도에서 쓴 것들이 대부분인데, 중국에 와서 멋진 경전들이 만들어지는데 ‘신심명’이라고 아주 유명한 명문이 있습니다. 첫번째 그 말씀이 이래요.
지극한 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으니
오직 따지지만 마라.
따지지만 않으면
그대로 지극한 도와 하나 된다.
자, 이것도 다 지금 인문학 쪽을 한번 접근해 보세요. 이분들이 그냥 빈말로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잠깐 체험해 보셨지만,
이름 몰라하고 한시간쯤 계시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진짜로 팔다리가 있는 것도 모릅니다.
걱정도 없고 황홀해져요, 실제로.
이게 명상가들이 우리는 그 지복상태가 그 상태입니다.
분별을 하지 않으면 뇌가 판단을 멈추면 그 상태로 그 대로 들어가요. 자꾸 따지니까, 뇌가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명상을 한다고 하면 복잡한 그 따지는 생각하고 싸우려고 해요. “네가 좀 조용해줘야 난 들어간다.” 그게 아니에요. 여러분 안에는 원래 그런 상태가 있기 때문에 복잡하게 따는 애들을 무시해버리시는 게 답이에요.
넌 계속 따지고 있어라.
나는 모른다.
요게 다릅니다. 그러게 되면 여러분, 인간 영원하네, 그런 고용한 영역이 있다는 게 모든 인문학이 증언하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 드린 거예요. 그러면
그걸 얻은 사람은 어떨까요?
계속해서 그 자리를 느끼면서 살아가시겠죠.
울고 웃고 떠들다 가도 울고 웃는 나를 바로 붙잡습니다.
방금 여러분이 모른다 할 때 느끼셨던 것은 나라는 존재뿐이죠. 아무것도 거기 옷을 입고 있지 않죠. 맨 나에요. 맨 나. 그게 불가에서 말하는 “본래 모습을 찾았느냐?” 하는 겁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을 찾았느냐?” 자, 순수한 나를 여러분이 느끼실 수 있다면, 순수한 나는, 보세요.
나는 배고파하면
우리 마음은 어디가 있냐하면 배고파에 빠집니다.
그런데 나는 원래 배고팠나요? 배 안고팠나요?
나는 배고프지 않아요.
아는 아무것도 없어요. 존재만 해요.
그런데 이 나가 배고픔하고 만나면
배고픈 나가 되어서 쪼그라 들어요.
제약이 되요. 요것을 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에고는 제약 받은 나에요.
그런데 이 원래 다른 나도 아닌데, 생각이 일어나서 나를 제약하게 되면 작은 나가 되요. 그런데 배고픈 나 상태에 있는 사람이, 배고픔을 내려놓고 무시하고, 모른다고 하고, 나자체로 존재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배고픈 나에서 다시 누가 되요? 그냥 나가 되요.
늘 나인체로 살아갈 수 있는 분이,
이 분이 깨달은 분입니다.
불교에서 확철대우 했다는 경지가 뭐냐 하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데,
순수한 나를 늘 느끼면서 살아가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실 수 있어요. 지금 존재한다는 거 아시죠? 여러분 존재한다는 거 못 느끼세요? 울고 웃고 하는 중에도 그거와 상관없이 오염되지 않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 못 느끼십니까? 혹시? 존재하시죠? 누구나 느끼고 있어요. 고 느낌을 조금만 [몰라]하시면서 좀 친해지시면 그 느낌하고, 여러분도 누구나 울고 웃고 하는 중에도 자기 마음을 금방 리셋 시킬 수도 있고, 자기 마음에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중심을 안 잃어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 여러분은 느끼고 계세요.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는 사실 느끼고 있어요. 특히 인간은 내가 존재한다는 걸 늘 자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여러분은 누구한테 심하게 화낼 때도 냉정한 눈이 있지 않나요? "내가 너무 화내고 있네."하는. 누가 보고 있는 거 같은데, 자기가 보고 있는 거예요. 냉정하게 보고 있는 내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 태풍의 눈은 휘둘리지를 않아요. 배고파 죽겠는데도 배고파 죽겠다는 건 그 감정이지, 나라는 놈은 배고픔이라는 옷을 입고 있을 뿐이지, 옷 벗으면 나는 원래 배고픔도 배부름도 아니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웃었다가, 울었다, 배고팠다, 배불렀다, 하루종이 왔다 갔다 하는데, 여러분 존재의 중심이 흔들리면 여러분이 움직여버리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아닌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 같죠. 가운데 변치 않는 것이 딱 기둥을 잡아주고 있어서 그래요. 기둥이 있어서 중심을 잡아주는데, 자, 보세요. 요 얘기만 드릴게요.
10년 전에 여러분하고
지금 여러분하고 다 바뀌었죠.
몸뚱이, 생각, 감정 다 바뀌었습니다.
왜 10년 전에 그 존재를 여러분이라고 생각하시죠?
동일한 게 뭐죠?
하나가 동일해요. 그것 말고는 다 틀려요.
생각, 감정, 어떤 오감의 그런 작용들 다 달라졌어요.
생각, 감정, 오감 너머에 뭐가 같냐 하면
지금 생각도, 감정도, 오감도 아닌, 나아라고 하는 존재만 같은 겁니다.
그 존재에다 여러분이 계속 다른 옷을 입히고 계시기 때문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죠?
몸뚱이가 똑같기 때문에,
옷걸이가 똑같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른 옷을 입고 있어도 자기라고 생각 하는 거예요.
다른 생각의 옷을 입고, 다른 감정의 옷을 입고, 다른 오감의 옷을 입고 계셔도,
즉 보이고 들리는 모습이 다 달라져도
나는 나라고 확고히 의심하지 않고 알고 계신다는 건요,
중심자리는 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자, 요 내용을 제가 다른 강의가면 안 해요. 이런 어려운 얘기를 왜 해요? 바로 인문학 들어는데. 왠지 여기서는 하고 싶어서 제가 했거든요. 좀 알아들으시는 눈빛이시기에 그냥 한 거니까, 다른 강의는 이런 거안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거 얘기하면 힘들어지세요. "인문학 좀 들으러 왔다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네." 이렇게 느끼실까봐. 그런데 다른데 가면 제가 [몰라]만 가르쳐드려요. “몰라만 잘하시면 됩니다. 마음이 리셋됩니다.” 요 정도만 말씀드리는데, 제가 원리까지 조금 말씀드린 겁니다.
이게 여러분의 가장 순수한 본바탕을 이해한 분들이 사실 다 인문학의 대가들이에요. 그래서 인문학 고전을 보면 어디를 펴도, 유교를 펴도, 불교를 펴도, 기독교를 펴도 그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순수한 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
그 영은요, 순수한 나는
남을 해코지 하려는 마음이 있을까요?
질투할까요, 남을?
사랑하고 남한테 피해를 안주고,
옳은 건 옳다고 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자명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인도합니다.
그게 우리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 때문에, 즉 에고의 마음, 제약된 내가 품고 있는 마음이에요. 배고픈 나는 배부르고 싶죠. 배부른 나는 배불러서 힘들죠. 자, 제약된 나는 늘 불만이 있고, 무상하고, 괴롭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이 제약된 나의 특성으로 무상고 무아라고 하는 겁니다. 무상하고 늘 괴롭고, 무아는 뭐냐 하면요,
내가 없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니라,
모든 게 내 뜻대로 하나도 안 되기 때문에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에고의 마음들은, 그 생각감정오감들은 여러분 뜻대로 하나도 안 되거든요. 제약된 내가 갖고 있는. 그것만 놔버리면 다시 그 제약된 나는 또 뭐가 되요? 그냥 나로 돌아와요. 다른 것도 아니에요. 신기해요. 이게. 인간이 갖고 있는 아주 신비한 마음의 그 특성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니란 말도 하고, 바다와 파도는 둘이 아니란 말도 하지만, 또 파도는 분명히 제약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이 놈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바다가 되요.
자, 이런 원리들을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저는 실전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감정오감이 하루종이 왔다 갔다 하는 중에도, 내가 계속 변한다는 것만 집착하지 마시고, 그러는 중에 나의 본바탕은 조금도 움직인 적이 없고,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존재하는 오히려 마당으로, 바탕으로 존재했다. 이것을 자각하실 수 있으면 여러분 마음을 컨트롤 하는 그런 또 달인 되실 분만 아니라,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을 어떻게 써야 되는지에 대한 지혜가 보이고, 인문학들이 고전들이 제대로 여러분한테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겁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겁니다. 여러분 지금 책 보고 계신데, 보세요.
글자가 제약된 모습이라면,
생각감정오감이라면 여러분 마음에 떠오른, 바탕.
아무것도 없는 바탕이
여러분의 순수한 여러분의 모습이에요.
제가 참나라고 부르는 건데.
그런데 사람들은
책을 보실 때도 바탕은 안 보시죠.
글자만 보고 살아요.
그래서 늘 바쁘고, 늘 무상하고,
늘 괴롭고 하신 거에요.
그런데 그 배경을 보면,
논을 돌려서 글자만 보는 게 아니라,
글자가 어떻게 존재하느냐?
텅 빈 바탕이 있어서 존재한다 하는
그것을 하나 깨달으시면,
여러분 마음속에도
늘 텅 빈 바탕이 있다는 것을 아실 수가 있습니다.
그게 없다면 내가 생각감정오감을
그렇게 자유롭게 굴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오히려 한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마음을 다스리는 아주 지혜가 생기실 거고, 쉬운 요령을 얻게 되세요. 자, 이론은 복잡한데 결론은 하나입니다. [몰라, 괜찮아]만 잘하시면 되요. [몰라, 괜찮아] 제가 고등학교 가서 이것을 가르쳤어요, 애들한테. "수능 떨어졌을 때 어떻게 해?" [몰라, 괜찮아] 그런 거 가지고 흔들리면 안 되죠. 더 험한 일들이 많을 텐데, 살면서. [몰라, 괜찮아]를 저는요, 꼭 가르쳐드리지만. 또 경고를 합니다. [몰라, 괜찮아]에 꼭 뭐가 붙어야 되요? 양심이요.
엄마가 진지한 얘기하시는데, [몰라, 괜찮아] 이렇게 악용할 수도 있죠. 그래서 이 악용을 하면 안 되니까. 인문학은 [몰라, 괜찮아] 즉, 명상도 가르쳐주지만, 그렇게 마음을 순수하게 만들어서 어디다 쓸 건지, 어떻게 잘 살 건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인문학이죠. 반드시 [몰라, 괜찮아]는 양심, 인문학의 결론과 연결되어야 됩니다. 자, 인문학의 결론을 제가 말씀 먼저 드릴게요. 이것만 아시면 여러분, 인문학 공부 다 하신 거예요. 사실은. 왜냐? 여러분 안 사신 게 아니잖아요. 인생을 다 몇 십 년씩 사셨죠. 인생에 대한 지금 체험이 있으시죠.
인문학은 뭘 가르쳐 주냐 하면요, 여러분의 인생의 체험들을 어떻게 멋지게 꿸 건지를 가르쳐줍니다. 그 체험들을 갖고 있던 의미들을 설명해주고, 여러분들이 앞으로 그 체험들에서 얻은 지혜를 어떻게 활용할 건지를 얘기해 주는 거거든요. 자, 인문학의 최고 대가들이 말하는 인문학의 결론입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결론은
양심을 따르자는 겁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이성이라고 하기도 해요.
양심.
선악을 판단하는 마음이 양심이에요.
여러분,
뭐가 선한 건지, 뭐가 악한 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간한테 만약에 욕심만 있다면 우린 선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뭐만 알 수 있습니까? 나한테 유리하다. 불리하다만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선악을 따지고, 도리를 따진다는 건, 인간 안에 또 다른 기능이 하나 있는 겁니다.
자, 인간마음 안에 두 가지 마음의 모습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욕심이에요. 철저히 나만 따지는 마음. 나를 위하는 마음. 이 욕심도 없으면 못 삽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위해야지 누굴 위해요? 이 말도 맞죠. 내가 나를 챙겨야죠, 먼저. 그러니까 자연은 욕심도 줬어요. 그런데 자, 욕심만 줬다고 치고 한번 가정해보시면, 여기 계신 분이 지금 한 100명이 다 자기 욕심만 챙기고 있다면, 우리 서로 대화하고 싶지도 않겠죠. 같이 있고 싶지도 않겠죠.
왜냐하면 나를 보는 저 상대방은 다 “나한테 뭐, 이로울 거 없나. 뜯어먹을 거 없나.” 이렇게 볼 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 안하고 모여 사는 것은,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남을 믿고 살아가는 건, 또 남을 배려하고 살아가는 건, 욕심 말고 하나 더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양심이에요.
자, 양심은 누구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양심은 나만 생각하게 안 만들어요, 우리 마음을. 자, 나만 생각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마음을 자꾸 넓게 만들어주는 게 양심입니다.
양심은요,
남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남은 어떤 손해를 봤을까?
남 걱정을 하게 만들어주는 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하철에 누가 술 취해서 철로에 떨어져 계신 분을 구하겠다고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발생하는 건요, 보세요, 지가 생명이 그렇게 귀하다고 욕심이 얘기했을 텐데, 그걸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 마음엔 뭐가 작동했을까요? 양심이요. 양심은 죽으라고 한 건 아니에요. 양심은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 사람을 살려내라”고 얘기했겠죠. “저 사람 죽으면 너 그거 견딜 수 있어? 살려내.” 모르는 사람이지만,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는 거, 너, 감당할 수 있어? 살려 내.” “그게 네 가족이라고 생각해봐. 너라고 생각해 봐.” 이렇게 외쳤을 겁니다. 양심이.
즉, 양심은
남한테 피해가 되는 것도
못 견디게 하는 마음이 양심이에요.
즉 남을 나처럼 느끼게 만들고, 속성이요. 남에게 부당한 피해를 너무 나처럼 실감나게 느껴져서 못하게 만드는 마음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보세요. 그게 이성이에요. 자, 방금 이 양심을 알아야만 우리는 선악이라는 걸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선악은 모두에게 유리한 게 선이고
모두에게 불리한 게 악입니다.
이건 어느 종교나 다 똑같아요.
초기불경 이래로 불교에서도 똑같이 주장합니다.
선은 뭐냐?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
악은 뭐냐? 모두를 괴롭게 하는 것.
모든 철학자들도
선은 모두를 다 이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
악은 모두를 괴롭고 해롭게 하는 것.
자, 이러니까 그러면 욕심은 뭐라고요? 나를 이롭게 하는 것. 나를 해롭지 않게 하는 것. 자, 욕심과 양심은 당연히 충돌이 날 일이죠. 그런데 이걸 충돌로만 보지 마시고, 자연이 인간한테 욕망을 줬어요. 모두가 다 잘 살아보라고 노력하라고 욕망을 줬어요. 그게 우리 삶의 원동력이죠.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게. 그런데 자, 욕망은 그럼 악이냐? 인문학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욕망은 악이 아니에요.
자연이 준 선물이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이 여러분 욕망을 추구하시다보면 나한테는 너무 이로운데, 자, 어느 선을 딱 넘어가면 옆 사람 얼굴이 찡그러지는 때가 와요. 나는 너무 좋은데, 그렇죠. 그런데 내가 좋아서 했는데, 옆 사람도 응원해 줄때가 있고, 내가 좋아서 했는데 옆 사람이 인상 쓸 때가 있단 말이죠. 즉, 내가 욕망을 추구했을 때,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는 선이 있습니다, 분명히. 그 선을 넘어가시면 여러분,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자, 선악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줬을 때는 악으로 분류가 되요.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여러분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고,
여러분의 욕망을 추구하되,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악이라고 철학적으로 규정합니다.
이게 모든 인문학자가 똑같아요.
그래서 인문학의 결론이 뭐냐 하면 논어 보십시오.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은 남한테도 하지마라.
자, 이게 양심으로 욕심을 경영하자는 겁니다.
자, 모든 인문학은 뭘 얘기하고 있냐하면, 양심경영책들이에요. 즉, 양심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도 있구요, 양심 경영서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모든 인문학은 양심 경영과 양심 리더십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욕망을
어떻게 경영할 겁니다.
양심에 따라 경영하십시오.
자, 남을 어떻게 리드 할 겁니까?
양심적으로 리드 하십시오.
왜? 여러분은 스스로 안에서도 여러분 내면에서도 수많은 욕망이 오늘 하루 엄청나게 여러분을 힘들게 할 겁니다. 그 경영하실 수 있습니까? 거기서 리더십을 발휘하실 수 있습니까? 양심적으로? 그러면 그런 분이 진짜 리더라는 겁니다.
자기욕망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남의 욕망도 관리해 줄 수 있고,
양심적이지 않는 리더는
인문학에서 존재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남위에 선다는 건, 벌써 남의 이익을 내 이익처럼 생각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되요. 남의 마음을, 부하직원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그런 양심 없는 사람이 리더라는 말을 쓸 수가 없고, 리더십이라는 것은 명령해서 말 듣게 하는 건 리더십 없어도 됩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폭력을 쓰면 되요.
진짜 리더십이라는 것은 뭘까요?
양심이에요.
즉, 내가 양심에 맞는 요청을 했을 때, 상대방은 거부할 수가 없어요. 양심에 맞기 때문에. 노자 말하는 무위의 리더십이 뭐냐 하면, 내가 양심에 맞게, 즉, 자연에 맞게 말하고 행동해 버렸을 때, 부하직원은 알아서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거부할 수 없다는 거예요. 따라오다보면 부하직원도 양심적으로 변한다는 거예요. 누가 시켰는지도 모르게, 같이 리더와 부하가 같이 팔로우가 같이 변해 가는데, 누가 했는지 모르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어서, 경영할 수 있느냐? 요 얘기를 하는데. 다른 거 하나도,
노자도
무위라는 것은 양심이에요.
유위는 욕심이에요.
욕심을 부리면 절대 못 다스린다. 노자에 이 말이 나옵니다.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면 절대 못 다스린다. 하지만 천하를 다스리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무위자연에 맞게 행동하면 천하가 절로 다스려진다. 요게 무슨 말이냐는 거죠. 무위라는 게.
동양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마음을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마음.
보세요. 욕심은 나하나 살리겠다는 마음이죠. 양심은 모두를 살리겠다는 마음이죠. 그게 자연의 마음이고, 그게 무위인 거예요. 모두를 살리겠다는 마음이 양심이기 때문에 노자가 무위를 말한 거나, 지금 논어에서 공자가 “내가 당해서 싫은 건 남에게 하지 마라.”고 하는 거나 같은 말입니다. 리더가 저것만 해주면 저절로 다스려진다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서 저절로 리더십이 발현된다는 것.
자, 상대방의 욕심만 배려해서 지금 우리는 경영하려고 그래요. 즉 뭐냐 하면 일 시켜놓고 돈 더 주면 되지 않냐 이거죠. 상대방한테 돈을 흔들면, 상대방은 이롭다고 판단할 거고, 분명히 내 말을 듣게 되어있다. 자, 욕심분석에 의한 리더십. 이게 진짜 리더십이 아닌 이유가 상대방은 진심으로 따르고 있지 않아요. 돈을 따르고 있는 거지, 지금 그 사람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양심이 아니고는 리더십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동양에서는. 그래서 양심적 리더십은 뭐냐? 그 욕심도 헤아려주되 나도 돈 갖고 싶듯이 상대방도 갖고 싶죠? 자, 벌써 이거 헤아려주는 게 벌써 양심이에요. “남도 나처럼 원하겠지.” “내가 당해서 싫은 일, 나도 일하고 돈 못 받으면, 싫듯이 상대방도 싫겠지.” 그걸 잘 감안해서 욕심도 배려해주되, 동시에 양심적으로 그걸 경영하는, 양심에 맞게 처리를 하니까, 상대방이 양심에 맞는, 그 리더에 그 명령을 안 따를 도리가 없어요.
진심으로 따르게 되요. 왜? 이 사람은 항상 양심적으로 나를 대우해 줄 거를 이제 확신하게 되기 때문에. 자, 이게
동양에서 리더라는 말을
한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군자라고 해요.
임금 군. 군자. 이거 군자란 말은 리더라는 듯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기를 군자라 그러면 도덕적인 존재죠. 양심을 달인을 군자라고 부르죠. 논어에서. 그게 힌트입니다. 즉, 동양에서는 리더를 무조건 양심의 달인이라고 불렀다는 거예요. 안 그러면 리더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밑에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리더라는 건 있을 수가 없고, 밑에 사람을 챙기지 않는, 자기보다 먼저 안 챙기는 그런 리더를 리더로 안 봤기 때문에,
대학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임금은 백성의 부모시다.
임금은 진정한 임금, 리더는 백성의 부모다. 부모니까 뭐 마음대로 해라. 이게 아니고 이 말이 나옵니다.
부모란 무엇이냐?
백성, 자녀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해주고,
자녀가 싫어하는 걸 같이 싫어해 주는 게 부모다.
자, 진짜 리더라는 것은 아랫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해주고, 아랫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주는 거예요.
아랫사람의 욕망도 인정하되,
욕망을 양심으로 경영해서
모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그것을 끌고 가버려요.
욕망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자, 요 얘기 하나만 더 살게요. 여기 거론이 안 되었지만, 맹자가, 맹자도 지금 인문학의 아주 대가죠. 맹자가 왕을 찾아갔는데, 이 얘기를 해요. “왕도정치 하십시오.” 하니까, 왕도 정치가 양심정치잖아요. 왕이 맹자한테 한방 먹여야지 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난 여자를 너무 좋아해서 못합니다.” 이래요. 당당하게. “난 여자를 좋아해서 양심정치 못해요.” “나 욕망 많은 사람이에요.” “성욕 충천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맹자가 뭐라고 했게요? 여기서 욕망을 거부하는 철학자라면 "아휴, 상종도 못할 사람이오.'하고 나갔을 겁니다. "왕은 글렀습니다."하고 나갔을 텐데 맹자는 그렇게 말 안 해요. 맹자 눈에는 오히려 이게 왕도의 양심을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싹으로 본 거에요. “저, 걱정했습니다. 왕이 여자 안 좋아할 줄 알고.” 왕이 당황하죠. 뭔 소리야? “왕이 여자 좋아하시니까, 백성들이 얼마나 이성을 좋아할지 잘 아시겠죠.” 모른단 말 못하죠. “예.” “그 마음으로 정치하시면 왕도입니다.”
여민락. 맹자는 여민락만 얘기해요.
백성과 함께 즐기면 왕도입니다.
욕망을 거부하는 게 아니죠.
혼자 즐기지 말고, 혼자 즐기면 욕심이고,
같이 즐기면 왕도라는 겁니다.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은 욕망을 경영하는 거지
욕망하고 싸우자고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싸운 다는 게 양심을 잘 이해 못하고 계신 겁니다. 자, 모든 인문학은 인간이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욕심과 양심의 문제에서 욕심을 양심으로 경영할 때만 인간은 공존할 수 있다는 그 지혜를 얻어낸 겁니다. 그래서 얘기한 게 그 지혜, 단순히 그 지혜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그럼 어떻게 양심적으로 살 거냐? 경영할 거냐? 양심경영을 하는 비법을 얘기해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만 기억하세요.
내가 당해서 싫은 건
남에게 하지 말자.
요거 하나만 기억하면 여러분은 누구나 인격자가 되고, 군자가 되고, 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그걸 장담해요. 철학자가 되실 수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철학자이지, 지금 대학가서 칸트, 헤겔 연구하시는 분이 철학자가 아니에요. 그분은 철학자들이 하는 얘기를 잘 정리해서 외우는, 그런 철학사 전문가이지, 철학자는 그게 아니에요. 철학자는 진짜 말 한마디 할 때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내가 상대방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긍정적인 결과를 낼 수 있겠는가? 수용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해서 말을 다듬어서 하는 분이 철학자에요.
욕망을 지금 양심으로 경영하고 계시죠. 자신의 분노를 양심으로 경영했죠. 그 분이 철학자이지, 역사적으로 인문학의 대가들은 절대 그런 사람을 철학자고 했지, 철학지식이 있는 사람을 철학자라고 안했어요. 소크라테스가 철학과 나왔습니까? 공자가 철학과 나왔겠습니까? 다? 그분들 다 대부분 일생을 백수로 사신 분이에요. 정규대학을 다 나오신 분도 아니고, 백수로 일생을 사시면서 “인간이 왜 이 모양으로 사는가?”를 고민하시다가 답은 이거다 하고 다 똑같은 답을 냈어요.
예수님은 뭐라고 했게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를 내가 가르쳐주마. 그럼 신구약의 핵심이라는 애깁니다.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해라.
네가 상대방이라면 요거 받고 싶겠구나. 그걸 헤아려서 먼저 해줘라. 자, 양심의 두 측면입니다. 요거랑 요거랑 동전의 앞뒤에요. 자, 내가 상대방이라면 싫을 걸 안 해주고, 합쳐서 얘기해 볼게요. 내가 상대방이라면 원하는 그것을 해주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자녀를 대할 때 “자녀가 지금 뭐 원하겠다.” 아시죠? 귀신같이 그걸 알고 안 해주는 마음은 뭡니까? 귀신같이 아는데, 아는데 까지는 알았는데, 안 해줘요. 애써 무시해요. 그러니까 알고 해주시면, 여러분 철학자에요. 여러분이 이미 인문학적으로 살고 계신 거예요. 저는 인문학으로 살아가기를 강조하는 겁니다. 인문학을 지식의 어떤 유희로 삼지 마시고, 이 사람이, 이 친구가 어린 친구지만, 한 인격이잖아요.
인격은 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다 자기 몸뚱이의 주인이잖아요.
다른 나라군주라고 대접해줘야 됩니다.
그러니까 나라가, 군주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통치가 잘 안 되고 있는 거지, 지나친 내정간섭은 안해야 된다는 거죠. 인문학적으로 그래요. 철학적으로 연구를 해보면, 한 인격은 다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해요. 내정간섭을 내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해도 내정간섭을 싫어하는 게 기본입니다. 지금 어느나라나 그렇죠.
아무리 약소국도 강대국이 도와주는 건 좋아하지만 너무 도와주면 싫어합니다. 감나라 배나라하면 싫어해요. 그건 내 주권에 문제거든요. 인간을 원래 그런 존재에요. 자기가 뭔지 모르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 같이 아이들이 조금만 자아가 생기면 어른 무시하는 거죠. 그리고 아이들이 또 어른들 보다 더 컴퓨터 조작을 잘하고 이런 일들이 많거든요, 요즘. 그럼 더 쉽게 무시하는 거죠.
“뭐, 얘기해도 어머닌 잘 모르는 거 같아. 내가 뭔 얘기하면, 다 몰라.” “내가 제일 많이 아는구나.”라고 오판하기도 쉽고. 자, 이 모든 걸 인정하더라도 그 한 군주는 군주이기 때문에, 우리가 군주대접은 해줘야 됩니다. 지나친 내정간섭은 안하면서 도와주는 방법이, 이것을 인문학적으로 고민하셔야, 여러분이 인문학적으로 살아가는 실전적인 팁을 얻으실 수 있다는 얘기죠.
자, 이 친구도 하나의 군주인데, 나도 군주라고 봤을 때, “저 친구가 지금 여기까지는 도움을 원하겠지만, 이 이상 내가 뭐라고 요청하면 싫겠다.”하는 게 있겠죠. 그 선에서 멈춰주실 수 있는지. 그게 인문학적 지혜입니다. 자, 이 논어와 성경이 양심의 양 측면을 얘기해주는데 이거는 사랑의 측면이에요. 자, 보세요. 상대방 마음을 헤아려서 내가 상대방이라면 이것을 원하겠다는 것을 해준다는 것은 무한하겠죠. 어디까지 한이 없어요.
그런데 공자가 말한 측면은 정의의 측면이에요. 즉, 하면 안 되는 거죠. 내가 당해서 싫은 걸 상대방한테 하면 안 되는 거죠. 안한다는 건 좀 더 선이 분명해요. 그거 어기면 분명히 죄가 되고 벌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건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을지는 무한해요. 여러분이 하는 만큼 또 할 수가 있어요. 더 배려하고, 더 배려하고, 그래서 예전 철학자들이 다 동서양, 다 이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애덤스미스나 이런 철학자들도 루소같은 철학자들도 이걸 정확히 알았어요. 그래서 사랑은 무한하고, 정의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고, 사랑은 역량껏 하는 것. 이렇게 정의를 해줍니다. 이게 근대철학자들까지도 다 연구했던 주제에요. 내가 당해서 싫은 걸 남한테 안하는 것은 반드시 해줘야 되고. 하면 분명히 상대방을 비난하게 되니까. 사랑이라는 건 칭찬의 대상이에요. 하면 할수록 칭찬을 받는 거기 때문에 너무 잘하려고 하지마시고 역량껏 하시라는 거예요.
자,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여러분이 경영하시면, 이 이상의 도덕률이라는 건 인간이 찾아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해되시죠? 이 이상의 도덕률, 이것보다 더 잘하려고 하지마세요. 딱 요 정도만 하시면 되요. “난 더 잘해야지.” 하면 과유불급이라고 논어에서 과한 거는 니코르입니다. 같을 유. 불급. 모자란 거랑 과한 건 똑같아요. 아니기는. 자, 여러분한테 누가 뱀 그리라고 했더니 뱀 대가리만 그려놨어요. 부족이죠. 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남아서 발까지 다 그려놨어요. 날개도 그려놓고, 멋진 뱀을.
자, 과하거나 부족하거나 뱀이 아닌 건 똑같아요. 그건 뱀이 아니에요. 자, 양심이 아니에요. 여기다 멋지게 여러분이 더 포장을 하셔도 안 돼요. 딱 여러분 느낌에
내가 상대방이라면 원치 않겠다.
하는 딱 고 선,
그 선을 넘으면 신기하게
인간의 마음이 찜찜해집니다.
찜찜하지 않게만 살아가시면 되요.
너무 잘하려고 하시다가는 “다시는 양심 안한다.”는 상태로 빨리 가실수가 있어요. 맹자에 이 말이 나옵니다. 맹자가 양심 배양하는 비법을 얘기해줘요. 그게 호연지기라는 건데요, 호연지기장에 보면 호연지기 많이 아시죠. 호연지가가 뭔지는 정확히 설명을 해보라고 하시면 잘 몰라요.
호연지기를 맹자가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그 놈은요,
매일 매일 내가 양심을 실천할 때 생기는
도덕적인 기운이라고 합니다.
에너지. 포스.
매일매일 양심하는 사람은
뭔가 좀 다르겠죠, 몸에서.
풍기는 그 포스가 다르겠죠.
그것을 호연지라고 그래요.
탁 트인 에너지.
자, 무엇으로 바로 아시냐하면 오늘 길가다가 길에다 여러분이 집에서 들고 나온 쓰레기봉투를 길에다 놓고 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좀 쪼그라 들어 있겠죠, 마음이. 호연지기가 위축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런데 길가다가 누군가한테, 만원을 줬어요.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동냥을 하고 있기에 만원을 딱 줬어요. 뭔가 허리가 딱 펴지겠죠. 누구 보라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내가, 이게 호연지기에요.
양심을 하나할 때마나
뭔가 내 위축된 에너지가 펴지는 거 있죠.
그래서 호연히 탁 트인 에너지라는 소리입니다.
도덕적인 삶을 살 때만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에 가도 뭔가 탁 트이니까 호연지기라고 하지만, 진짜 호연지기는 내가 양심적일 때만 위축되지 않고, 우리 기운이 탁 트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맹자가 이 얘기를 해줘요. 그러면 제자가 묻죠.
호연지기 어떻게 기릅니까?
날마다 마음의 찜찜한 거를 하지 않고
양심을 실천해서
마음을 찜찜하지 않게 만들고 살아가면 네가 생긴다.
하지만 너무 잘하려고 하지는 마라.
조장하지 마.
자, 그 얘기를 한 다음에 이걸 해요, 맹자가. 하지만 너무 잘하려고 하지는 마라. 요 말이 대게 묘한 말입니다. 잘하라고 해놓고, 그런데,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 이 말을 해줘요. 그다음에 이 말을 해줘요. 유명한 말인데. 조장하지 마. 라는 말을 하면서, 송나라 사람이 옛날에 밭에 나갔데요. 그런데 싹이 안자라고 있어요. 답답해서 다 올려줬어요. 반나절을 올려주고 나니까 얼마나 피곤하고 뿌듯해요. 피곤하기는 한데, 뿌듯하잖아요. 집에 돌아와서 자녀한테.
“내가 오늘 일했다. 너무 피곤하다. 일해서. 내가 조장해줬다. 도와줬다. 도와줄 조. 자랄 장. 싹 자라는 것을 도와줬다.” 했더니 아들의 이 얘기를 듣고 사태가 그려져서 밭에 가봤더니 싹이 다 말라 죽어있더래요. 그 얘기를 맹자가 왜할까요? 양심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만 하시면 되요. 내가 누구를 봤는데, “나라면 정말 이것을 원할 거 같아요. 내가 꼭 해주고 싶어요.” 그거 해주시고요, “그거 안하면 찜찜할 거 같아요.” 자, “내가 상대방한테 이렇게 하는 것은 진짜 내가 하고나면 후회할 거 같아요.” 그거 하지 않으시면 되요.
매일매일 이렇게 살아가시다보면 이게 인성교육의 핵심입니다. 인성이 계발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우리 안에는 원래 양심이 있기 때문에. 외국 사례인데, 조사된 걸 봤더니 18개월 이상 된 자아가 성숙된 아니는 양심이 다 표현되는 것으로 봤어요. 인의예지 우리가 따지잖아요. 인의예지의 마음이 다 자연스럽게 나타나더래요. 욕심도 나타나는데, 양심도 나타나더래요. 그러니까 이게 인간한테는 기본적으로 탑재되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만 적절히 해주면 누구나 대항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는 모토만 제시해 줄게요.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은 남한테 하지 말라.
법구경에 자신의 마음으로 남을 헤아려서, 그러니까 내가 당해서 싫은 거 가지고 남을 헤아려서 남도 이것이 싫겠구나 하는 것은 절대 하지마라. 자신의 마음으로 남을 헤아려 남을 헤치지도 말고, 헤치도록 시키지도 마라. 칸트는 이것을 멋지게 말을 어렵게 했죠. 멋진 말로 정리했는데 이 말, 별말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 원리에 타당하게 행동하라. 자, 무슨 말일까요? 도둑질 하지 마라는 얘기에요. 내가 행동을 하나 할 때, 나의 의지에 준칙, 자, 내가 어떤 의지를 품고 행동할 때, 그 원칙이 보편적 입법원리라는것은 누구나해도 좋은지를 먼저 점검해보고,
누구나 해도 좋은 것은 하고,
누구든지 하면 안 되는 것은 하지마라.
즉 이것을 다시 얘기해 볼까요? 칸트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이게 황금률이죠. 성경에. 황금률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다들 봤어요. 뭐냐 하면 같은 얘기라는 거예요. 자, 여러분이 행동을 할 때 보편적 입법인지 아닌지 이것만 보시면 되요.
내가 뭔가 행동을 할 때,
상대방도 나한테 그렇게 했을 때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맞다고 할 수 있는지만 보시면 되요.
그러면 보편적인 거예요.
도둑질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남의 것을 훔칠 때 남도 내 것을 훔친다고 가정 했을 때, 싫을 행동이거든요. 그럼 보편적 입법원리에 타당하지가 않은 거죠. 그런 짓은 하지 마라는 거죠. 자, 이상 말씀드린 이 양심이라는 것이 칸트는 이것을 선의지, 양심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의지, 양심. 인간한테 선한 거 딱 하나, 선의지밖에 없다. 나머지는 다 왜곡되어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에서.
양심밖에
선한 게 없다.
이해되시죠. 자, 칸트건, 누구건 간에 모든 동서양철학자들의 결론은
이간은 이성을 따를 때, 양심을 따를 때, 진짜 인간이 된다.
안 그러면 진짜 인간이 아니고 짐승만 못하다고 봤어요.
자, 요것을 간단하게 설명 드릴게요. 여러분이 핸드폰 하나 사셨어요. 그런데 그게 전화만 걸리는 폰이에요. 피쳐폰이에요. 그런데 어떤 분은 스마트폰을 사셨어요. 스마트폰인데, 전화만 되는 폰을 가지고 열심히 전화만 거신 분은 그 전화기 입장에서는 기능을 다한 거죠. 자기 재주를 다부린 거에요. 그런데 스마트폰을 사신분이 전화만 걸면 어떻게 될까요? 그 스마트폰입장에선 억울하겠죠. 난 원래 그러라고 나온 게 아닌데. 자, 철학자들은 인간을 딱 그렇게 봤어요.
인간이 만약에 욕심만 따른다면 짐승과 같다가 아니구요, 짐승만 못하다. 왜냐?
짐승은 욕심만 따라도 괜찮아요. 우주가 짐승한테 원래 기대를 안했기 때문에.
짐승은 최선을 다해 산 거에요.
인간은요? 최선을 다한 게 아닌 게 되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이 양심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진짜 인문학적 의미의 인간은 멸종되었다라고 봐요. 그래서 마르크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보면
인간이 이성을 따르지 않는 날,
그 날로 인간은 멸종한 것이다.
맹자에 보면 인간이 짐승하고 다른 게 아주 작은 데,
군자들은 그것을 지키고,
소인들은 그것을 버린다.
동서양 철학자들이 똑같이 본겁니다. 요것만 그 다른 게 뭐냐? 요거 할 줄 아냐에요. 그런데 심지어 짐승도 이거 할 줄 압니다. 실제로는 동양철학에서도 조선시대 선비들이 공부한 게 성리학이죠?
성리학에서 다 인정했어요.
짐승들도 인의예지있다.
다만 제약되어있다.
인간은 온전하게 구현할 수 있고,
짐승들은 그 역량이 약하니까
자기들이 허락하는 안에서
제약적으로 발현된다.
그런데 실제로 그 강하지 하나 노는 것 봐도 요런 거, 나름 지킵니다. 자기들끼리 룰 지켜요. 밥 함부로 먹지 않아요. 전체 분위기 봐가면서 먹고, 조직적인 마인드를 갖고 살아요. 다른 동료를 또 배려하고, 동료한테 피해 안주려고 하고, 집단의 룰을 깼을 때는 또 뭔가 벌도 받고, 자기들끼리 뭔가를 지켜요. 이게 본능적으로 이게 있다는 겁니다. 인간한테 이것이 구현될 때는 얼마나 아름답게, 진선미하게 구현될 것인데, 이것을 제대로 못 구현하면 짐승 볼 낯이 없다. 이런 식으로 예전 찰학자들은 생각한 거예요.
짐승보고
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정신을 못 차려서 지구가 이렇게 힘들고,
너도 이렇게 고생하는구나.
이런 시각으로 보실 수 있냐, 이거죠.
철학자들은 그렇게 봤어요.
그래서 이 소크라테스는 진선미라고 불렀어요. 이 양심의 마음을. 보세요. 욕심은 진리다. 선하다. 아름답다가 서로 좀 다를 수 있어요. 욕심으로 보니까. 나한테 유리한 게 진리고, 유리한 게 선한 거고, 나를 자극해주는 게 아름답다고 생각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다 다를 수 있는데, 모든 인간이 양심에 있어서는 보편적입니다. 진선미를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은 양심밖에 없어요.
진리이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양심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양심적인 사레들 기사를 보시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합니까? 진리라고 생각해요. 선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름답다고 느끼시는 게 그 양심의 영역에 있어서만 우리는 하나로 의견이 통합니다. 개별적인 미의식은 다 다르더라도, 진선미가 하나 된 이 양심에 있어서만은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낀다는 거죠. 그래서 이 진선미,
소크라테스가
진선미라고 얘기는 하는 것도
결국 양심이라는 겁니다.
자, 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말씀드리면, 요게 인문학을 이해하시는데 훨씬 도움이 되시겠죠. 여러분 지금부터 양심이 답이라는 것과 양심은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아시고 인문학 공부를 하시면, 인문학의 어떤 고전이건, 바로 활용해 먹을 수 있는 메뉴얼이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이 정도는 확고히 알고 계셔야 되요. 별거 아닙니다. 인의예지에요. 여러분 인의예지신 아시죠?
인_사랑, 의_정의, 예_예절, 신_성실, 지_지혜. 그리고 인의예지신 외에 선비들이 닦았던 게 뭐죠? 경_깨어있기, 명상.
어느 종교나 깨어있으라 그래요.
성경에도 부처님도 늘 깨어있어라.
서양철학자들도 명상하라.
자, 요게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 덕목과 나머지 덕목들이 만날 때 양심이 온전히 구현 되요. 자, 한번 미리 말씀드리면, 뒤에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사랑, 상대방의 입장까지 배려하자는 게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건 뭘까? 라고 느껴보는 거예요.
정의,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은 안하는 게 정의입니다. 남에게 피해주지 말자.
예절, 상대방과 조화를 이루자. 아무리 좋은 마음, 좋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하 직원한테 조언을 해주더라도 무례한 방식으로 해서는 안 먹힙니다. 내가 아무리 뜻이 좋아두요, 무례해서는 안 먹혀요. 즉, 실제 언행, 생각하거나 언행을 표현할 때,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시면, 아이들도 싫어합니다. 아이들도 여러분 인상 쓰면서 뭐 하라고 하면 싫어해요. 그것은 예절이 아니라는 거죠. 아이들 다 알아요.
“그건 아니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한테 얘기하는 건 아니야.”라고 느껴버려요. 그것을 여러분이 막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이들도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자연에 의해서 그렇게 프로그램된 거예요.
자연이 해놓은 프로그램을
존중해주는 게 무위의 삶이고,
그게 인문학적인 삶입니다.
자연이 어떻게 인간마음에다 프로그램을 했는지 이해하시면, 결을 알면, 다 경영할 수가 있고, 다스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욕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아는데 양심에 대해서는 연구를 잘 안합니다. 자, 연구해 보세요.
성실, 항상 아무거나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니라, 양심적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자, 몰입은 늘 깨어있으면서 평등심을 유지하다.
지혜는 모른 건 모른다고 하고, 아는 건 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옳고 그름을 자명하게 꿰뚫어 보기인데, 자, 자명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나 드리면, 여러분 뭐가 자명할까요? 인간이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인간들이 뭘 자명하다고 하는지 철학책을 다 뒤지면서 연구해봤더니 간단해요. 여러분 과학자들은 가설을 먼저 세우죠. 그런데 가설 단계에서는 자명하다고 안하죠? 실험을 거치면 자명해지죠.
개념과 체험이 만날 때
자명하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라고 말하시려면 개념이 있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체험도 있으셔야 되요. 자,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개념만 있어요. 즉 요리를 글로 배웠어요. 자, 어떻게 되요? 개념은 있어요. 계란 넣고 뭐하고. 그런데 재료를 만나면 떨립니다. 손이 떨린다구요. 왜? 체험이 없으니까. 그걸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나 알아. 김치찌개 만들 줄 알아.” 글로 봤다는 거, 그것을 안다고 하시면 큰일 난다는 거예요. 그것은 찜찜한 거예요. 모른다라고 하셔야 되요.
찜찜함이 있을 때
모른다고 하셔야 되요.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체험만 있어요. 할 줄은 아는 데 설명을 못하세요. “어떻게 만들어야 됩니까?” “재료만 있으면 할 수는 있는데” 말은 못하면 이것은 안다는 못해요. 제대로 안다는 아니에요. 자,
제대로 안다는 것은
체험을 했고,
그 체험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 할 수 있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제가 정한 게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거죠. 본능적으로. 여러분, 애들도 다 알아요. 그렇게 배운 적이 없어도. 여러분이 만약에 말로만 하고 행으로 안보여주면 아니라고 할 겁니다. “그건 아니에요.”라고.
뭔 기준이 있어요.
우리 내면에.
그 기준에 모자라면 아니라고 그래요.
그 기준을 연구해봤더니
자명할 때 우리는 인정하는 데,
그 자명함이라는 것은 체험+개념일 때만
우리 내면에서 생기더라는 거죠.
그럴 때 내면이 밝아져요.
시원해지고요,
실제로 감정적으로도 대게 기뻐집니다.
뭔가 의심이 풀렸다는 기쁨이 와요. 자명하다.
그게 안 오면 가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뭔가 고민하시고, 답을 내려도, 억지로 쥐어짜낸 답은 기쁘지가 않아요. “이게 답이야.”라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없고, 기쁘지가 않고. 확신이 안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명한 것을 대게 중시하셔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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