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소개 좀 드리면, 저는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양심, 양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종교를 초월해 보자. 그런데 그 양심이 다른 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이죠. 이것을 동양에서는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맹자이래로. 우리가 흔히 아는 양심이 아니에요. 그 양심도 양심이 맞지만, /맹자가 양심이라고 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의 가장 근원에 있는 순수성/ 그것을 양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양심하면 편하게 쉽게 쓰기 때문에, 하여튼 그토록 제가 양심을 들고 다니고 저는 실험을 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제가 추구하는 삶은 보살이에요. 제가 나름 자부하고 있고 열심히 보살도, 죽을 때까지 하다 죽을 거라고 자부하고 있고, 이 얘기를 종교를 초월해서 지난번에 수녀님 연합회 150명 모여 계시는데, 수녀님들한테 드려요. 양심 얘기를 드려 봐요. 기독교식으로. 정말 공감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깊은 사정까지 알고 있냐는 얘기를 들어요.
원불교가서 하죠. 교무님들 중에 제 팬들이 많으시거든요. 다 공감하세요. 제가 뭘 실험하고 있습니까? 종교를 초월할 수 있다는 거죠. 제가 오늘 대승기신론을 들고 왔어요. 왜? 이것을 들고 왔느냐? 어렵지만 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잘 설명한 경전, 인류가 다 읽어야 할 경전이에요. 종교를 초월해서. 그런데 이게 /종교에 갇히는 게 싫어서 양심이라는 용어로 말하고 다닐 뿐이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 그것이 우리의 양심자리죠./
그래서 저도 항상 제 존경하는 분이 원효스님입니다. 항상, 그 한마음 가지고 승속을 넘나들면서 자유자재로 우리가 보살도를 하다 죽을 수 있는가? 저는 극단적인 보살사상가에요. 극단적인 대승불교사상가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감안해서 들어주세요. 초기불교입장,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죠. 저는 극단적인 대승불교의 입장이라는 것만 아시고 들으시면 또 들을 게 있습니다.
왜냐? 대승기신론을 이해하려면 극단적인 대승사상이 아니고는 이해가 안 돼요. 이것을 초기불교 섞고 막 썩어버리면 같은 불교니까 하고 여러 입장을 섞어버리면 이해가 안 됩니다. 워낙 독특한 입장이에요. 대승불교가 처음에는 초기불교랑 큰 차이 없이 시작하다가 나중에는요, 완전히 다른 자신들만의 입장을 만들어냅니다. 고부분의 정수를 이해하시는 것도 저는 분명히 중요하다가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은 불교가 스펙트럼이 너무 넓잖아요. 그 중에 한 극단을 가지고 저는 말씀드릴 거다. 그게 대승사상이고, 이게 다른 종교, 다른 철학하고 기가 막히게 연결됩니다. 인간의 마음이 둘이 아닌 이상, 마음을 깊이 판, 순수하게 판, 편견 없이 판 철학자들은 동서가라지 않고 똑같은 말을 해요. 그래서 제가 서양철학자, 동양철학자 가리지 않고 연구해서 자꾸 발표를 해서 유튜브에 올린 강의가 한 2천개 넘어요. 그래서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유튜브 강의를 다양하게 즐기시면 됩니다.
압도적으로 불교강의가 많습니다. 제가 제일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불교에요. 보살은요, 막힘이 없어야 됩니다. 어디든 가서 육바라밀로 바꾸어 놔야 되요. 바꿀 수 없으면 저는 보살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의 삶을 바꿀 수 없다? 자신의 카르마를 경영할 수 없다? 보살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사회가 힘들어지는데 중생들이 살기 좋게 바꾸어놓을 수 없다. 저는 보살도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정당 중에 이런 정당이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보살당이 있으면 재미있지 않을까 해서 저희 홍익당 받아보시면 6대원칙이 있어요. 육바라밀입니다. 6대원칙이. 제가 생각하는 보살은요, 이 6원칙을 뼛속까지 받아들이고 지키며 살아가는 분입니다. 사실 중생은 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자기도 모르게. 중생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운전 하나 하려고 해도 /보시/ 다른 사람입장 배려 안하고 운전 못합니다.
/지계/차선 지켜야 되요. /인욕/ 욕 나와도 좀 참아야죠. 끼어들어도 좀 참아야 되잖아요. 양보도 해야 되잖아요. /정진/ 멈추어 있으면 안 되죠. 결을 깨는 거죠. 쭉 차를 다 같이 가야되는데, 길을 모르겠으면 잠깐 도로에 서 봐요. 서서 길을 잠깐 생각해 봐요. 그러면 그때 도로전반의 흐름이 깨지죠. 자, 이런 것도 이것도 조화입니다. 이것도 /인욕/이에요.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것도 인욕입니다.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요.
그러면 /정진/내가 할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해줘야 되요. 내가 멈추어 버리면 그게 육바라밀은요, 교묘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상대방과의 배려를 깨고 상대방한테 피해를 주고, 조화를 깨면서 나태해 지고 그러면 깨어있지 못하게 되요. 선정이 약해지고 /반야/ 팩트에 근거한 자명한 결정을 못 내립니다. 이게 다 연결되어있죠. 운전하나를 해도 그거 해줘야 욕 안 먹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여러분 작은 거 운동을 하나 하셔도 농구를 하신다. 보시는 뭘까요? 6원칙만 오늘 강의 때 알아들으시면 여러분 삶에 도움이 되신다면 좋겠습니다. 6원칙만 잘 이해하시면. 대승기신론 다 해서 사실은 6원칙, 육바라밀 얘기 하는 거예요. 그게 결론입니다. 대승기실론의. 조금 있다 제가 다 풀어드릴게요. 다른 종교, 다 똑같아요. 그 본질을 갖고 있어요. 인간의 의식은요, 인종 따라 다르지 않아요. 다 똑같아요.
지금 전 세계 심리학이 하나죠. 심리학에 인종별로 남녀별로 다 다르지 않아요. 기본적인 어떤 심리구조는 똑같다구요. 마찬가지로 이 불교는 마음의 과학, 마음의 철학을 연구해왔죠. 그 결론이 육바라밀이었어요. 이게 대승불교의 꽃입니다. 그전에 팔정도를 강조했잖아요. 초기불교 때. 왜 굳이 육바라밀을 들고 나왔을까? 이것 이해하시면 대승이 왜 나왔는지를 아실 수가 있고요, 저는 대승만이 옳다는 것은 아닌데, 대승을 이해를 요즘 안하시더라는 거예요.
한방에 화두 잡아서 한방에 부처된다는 생각하시는 분은 많은데, 모든 대승경전의 핵심인 육바라밀에 대해서 왜 저런 말이 나왔고 보살이 왜 육바라밀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제가 이해하시는 분을 잘 못 봤어요. “육바라밀 하십니까?” 그러면 “예. 보시, 기부 얼마 했어요.” 지계 “오늘 특별히 계율 안 어겼어요. 오늘 참선도 1시간 했어요. 경전도 조금 봤어요.” 그럼 반야, 이게 다 해당되는 것 같죠. 육바라밀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은 정말 하급의 육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승기신론에서요, 그런 육바라밀은 육바라밀이라는 말을 안 붙여요. 수행이라고 그래요. 그냥. 수행. 바라밀이란 말이 붙으려면 사실은 불성에서 나와야 되요. 보시가 불성에서 나온 보시라야 바라밀이에요. 나와 남을 초월한 그 마음에서, 그 한마음이 작용되어서 나왔을 때 ‘바라밀’ 그럽니다. 한 마음이 작용되어서 참았을 때 ‘인욕바라밀’ 그러지, 억울한데 따질 수가 없어서 정신승리로 참은 거 이것을 인욕이라고 하시면 바라밀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인욕은 사실은 나중에 몸에 병을 일으키죠.
깨끗한 인욕이라는 게 뭘까요? /선정/에 바탕을 두고 /지혜/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일체가 본래 공이구나 하는 것을 깨친 안목에서 나온 인욕이라는 것은 다르죠. 그것을 바라밀이라고 부릅니다. 대승기신론이 왜 제가 강조드리냐하면 그것을 명확히 구분해요. 그전, 즉 깨달음, 견성 이전, 우리 불성을 자각하기 이전에 육바라밀 수행은 그냥 수행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 불성을 깨치고 난 뒤에 이제 선정과 지혜가 갖추어진 육바라밀은 그때부터는 바라밀이라고 불러줍니다.
그래서 이런 게 정밀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이 대승경전의 핵심을 화두만 잡으면 한방에 부처된다는 이론으로 자꾸 이것을 중요시 하지 않는 쪽으로. 그래서 이것을 중요시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교외별전이라는 사상입니다. 대승 그렇게 저렇게 쪼잔하게 뭘 닦고 해서 올라간다고? /교외별전_우리는 교과에 저런 경전 외에 별도로 전수받은 게 있다. 한방에 부처되는 법./ 이게 강조되다보니까 기본적인 전 세계 모든 철학의 핵심인 양심에 6가지 원칙이 육바라밀은 하근기나 하는 수행, 상근기는 화두 잡아야지. 이런 논리로 인해서 이 부분이 대게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저는 강조하는 거예요. 이 부분을 한번 일단 이해를 해보시면, 이해는 해보고 내가 취하건 말건 그것은 그 다음 문제잖아요. 이해를 도와드리는 이런 강의가 한번 있어야겠다. 요 생각에 제가 제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저는 대승입니다. 제가 선문답에 대해서도 책을 냈어요. 선문답에서 배우는 선의 지혜 책을 낸 사람이고, 화두 선이나 이런 것도 제가 실제로 하면서 많은 명상수행을 하면서 책도 내고 지도하는 입장입니다만, 실제로 저는 이 대승사상이 인류가 공부해야 될 제일 고귀한 철학이다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제 입장을 아시면 잘 취사선택하실 수 있겠죠. 저 입장에서는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는 것을 아시고 한번 들어보시면 이게 신기하게 동서철학까지 다 꿰뚫어질 수가 있고, ‘이런 기가 막힌 게 불교 안에 또 하나의 입장으로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삶속에서 아까도 제가 말씀드리다 말았지만 농구하나를 해도 뛸 때 남의 입장 배려하는 게 /보시/죠. /지계/는요, 아무리 힘들어도 룰 지켜줘야죠. /인욕/은요, 힘들어도 참아야 되요. 상황을 받아들여야 되요. /정진/ 뛰어다녀야 됩니다. /선정/ 깨어있어야 되요. 정신 풀고 있으면 게임 못합니다. 자, 그리고 /반야/ 항상 선택을 해야 되요. 현명한 선택. 지혜로운 선택.
자, 왜 이 얘기를 드리냐 하면 중생은 왜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육바라밀 하고 있을까요? 육바라밀 잘하는 사람이 사실은 뭔가 일을 만들어내고 성공합니다. 그런데 아까도 설명 드렸지만 대승에서는 바라밀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왜? 정확히 깨어나서 진리를 알고 하는 바라밀은 아니니까. 하지만 육바라밀을 나름대로 중생들은 다 구현하고 있다는 거예요. 대승기신론식으로 수행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 보편성이에요.
인류는 사실은 육바라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중생이 아무리 어두워도 불성을 지니고 살 듯이,
그 불성에서 중생을 내모는 6가지 진리의 길이 있다는 거예요.
그 길을 알고 활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의식적으로 깨치고 깨달아서 쓰게 되면 보살이 되는 거고,
모르고 쓰고 있으면 중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모르고 쓰면 중생이고, 알고 쓰면 보살이다.
이 입장이 대승불교의 아주 핵심입장입니다.
그래서 제가 창당을 하건, 뭔가 국민들한테 얘기하고 싶은 것도 육바라밀인 거예요. 우리 국민이 다 같이 육바라밀을 의식적으로 지켜버리면 개인적인 문제도 남의 입장 배려하고 /보시/ /지계/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인욕/ 남의 입장 진심으로 수용하면서, 인욕이라는 게 단순히 억울한 것 참는 게 아닙니다. 진리에 맞을 때 진실일 때 수용하는 거죠. “오케이”하고 수용하는 게 인욕이죠. 보통 인욕한다 그러면, 대게 억울한 일만 참아요. 참지 말아야 할 일은 대게 인욕으로 참아요.
사실 왜 참고 있나요? 항거할 방법이 없으니까 정신승리로 사실은 참아요. 얼굴 다 맞은 친구가 뭐라고 하죠? 정신승리로? 얼굴로 다 막았다고 그래요. “오케이. 내가 봐준다. 내가 다 막았다.” 자, 이런 인욕을 말하는 게 아니고, 이것도 인욕의 속성은 있지만 깨끗한 인욕은 뭐죠? 이런 거예요. 내가 노력을 안했어요. 그런데 결과가 참담하게 나왔어요. 보통 사람들은 못 받아들입니다. 노력 안한 것은 생각 안하고 과보가 적다고 한탄하는데 “아, 이게 진실이지. 우주 법계가 이렇게 나한테 대처하는 게 맞지. 오케이.” 진실일 때 “오케이” 할 수 있는 그 힘, 그게 인욕의 제일 핵심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대승경전에서 인욕을 얘기할 때 억울한 것 참는 것 보다 이 얘기를 해요.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경전에서 인욕 얘기할 때 항상 /진리를 인가하는 것을 인욕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인욕바라밀을 제일 잘한다 할 때요, 단순히 억울한 일 참는 것만 애기 하지 않고요, 대승경전은 어디로 가느냐? 진리를 정확히 인정했다할 때 그 똑같은 한자를 쓰죠. 인욕, 그럽니다. 왜 그럴까요?
내 개인적인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른 다는 게
치욕인 거예요. 개인한테는. 치욕인데
그게 진실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오케이!”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죠.
그게 인욕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에서 인욕바라밀에서 다루는 중요한 게 진리를 인가하는. 진리를 들어도 인정을 못해요. 수용을 못한다구요. 그런데 수용한다는 것은 인욕입니다. 그래서 선정을 통해서 마음을 깨어나게 하고 지혜를 통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도 여기서 인욕이 동반되지 않으면 힘을 못 갖습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나와도 내가 ‘오케이’하고 수용을 안 해버리면 인정을 안 해버리면 내 삶의 변화를 못 일으키죠. 그래서 육바라밀은 이렇게 연결되어 가면서 우리 삶을 바꾸고 있다. 이정도만 소개해 드리고요, 한번 진도 나가볼게요.
제가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먼저 일심, 대승의 진리한번 설명드려볼게요. 대승기신론이 특히 독특한 게요, 우리 단순히 소승대승하면 어떻게 이해하나요? /소승/ 소승은 오토바이 같은 거죠. 나 혼자, (탈 승) 적은 사람이 타는 가르침. 즉, 개인만 구원해주는 가르침을 그 승차할 수 있는 인원이 작다는 거예요. 스승 그러면, 수레가 작다. 그래서 개인만 구제한다해서 소승. /대승/은요? 소승이 오토바이라면 대승은 거의 버스나 기차죠. 엄청난 수를 태우고 해탈해 도살시킬 수 있다. 요정도로 씁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에 오면요, 전혀 바꾸어버려요. 한 단계 더 나가요. 그런 의미의 대승이 아니라 /대승은 일체 보살이 타고 가는 위대한 탈것이라는 것이에요./ 모든 보살이 이것을 타고 간다. 이것을 타고 보살도로 간다. 뭘까요? /일심이요. 한마음.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이 위대한 탈것이라는 의미로 대승이라는 말을 써요. 요것은 알아두셔야 됩니다. 대승의 의미의 아주 극치에요. 위대한 탈것. 위대한 보살이 타는 그런 차다. 탈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왜 위대하냐? 그런데 그게 뭐냐? 한 마음이다. 우리 마음의 한마음.
한마음. 자, 뭐가 한마음이냐?
사실 중생심이 그대로 한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울고 웃고 떠들고 하는 그 중생심이 사실은 한마음인데,
모든 보살은 그 한마음타고 보살도의 길을 걸었다.
우리도 그것을 타고 걷자.
그러면 이게 왜 초기불교와 달라지느냐?
열반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에요. 입장이 다릅니다.
초기불교나 소승불교적 입장은요,
이런 육바라밀수행을 해서 열반에 들어가자 잖아요.
대승의 입장은요,
우리는 본래 열반이니까 육바라밀이나 하자에요.
우리는 원래 열반이니까 육바라밀이나 하자.
이해되시죠. 열반으로 가자하는, 원래 열반으로 가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주장했는데, 예전에 초기불교부터 바라밀은 등장합니다. 꼭 육바라밀이 아니라 십바라밀이 등장해요. 초기불교부터 육바라밀 십바라밀이 등장했는데, 대승에 오면 그게 /열반으로 가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열반이다. 이미 부처다. 부처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살자. 그게 뭐냐? 육바라밀이다./ 그래서 왜 사느냐?
보살은 왜 존재하느냐?
열반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미 열반에서 나왔다는 사상이에요.
나는 본래 열반이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펼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라는 거예요.
입장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요 그림 하나 제가 그려놓고 설명 드릴게요. 자, 이게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인데, 우리 마음에 가장 본원에 이 전체가 사실은 한 마음입니다만, 우리 마음에 가장 본원에 때 묻지 않은, 원효스님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둘로 나눌 수 없으니까 하나고,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붙였다./ 그래서 여러분 이게 여러분 내면에 있는 가장 순수한 불성, 참나를 말하고요, 이 참나로부터 작용이 일어나서 웃고 울고 오온작용이 일어나죠. 보고 듣고 맛보고 하는 모든 중생심이 일어나는데, 이 전체가 사실은 이것 또한 한마음의 작용이니까 전체가 사실은 한마음이라는 거죠.
자, 요 말씀을 미리 드리는 게, 원효스님이 대승기신론을 제일 중시했죠. 그게 이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 마음이 그대로 보살도에 위대한 본질이자 수단인 거죠. 여러분 마음이. 다른 데서 구하지 말고, 우리 마음만 연구하자. 우리 마음에 울고 웃고 떠드는 온갖 잡스러운 마음조차도 한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전체가 한마음이다. 그래서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가 유심조라는 것은 세상이 마음먹기 달렸다 이런 뜻이 아니고, 그것은 부차적인 뜻이고, 원뜻이 뭘까요? 일체는 유심조다. 요거 이해하시면 이제 불교에서 법공을 깨쳤다고 하는 게 이겁니다.
법공을 깨쳤다는 게 /일체유심조의 다른 말이 법공이에요. 만법이 공하다는 거와 일체가 마음이 만든 거다 하는 거와 같은 뜻입니다./ 뭔 뜻일까요? 잘 아시겠지만, 제가 설명해드려 볼게요. 잘 아시겠지만, 자, 이런 한마음 사상을 가지고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일체유심조에 대한 자각이죠. 원효스님이 해골물 먹다가 일체유심조를 깨쳤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오해하세요. 뭐냐 하면, 밤에는 해골물을 맛있는 물인 줄 알고 먹었어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해골이에요. “야, 이거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구나.” 이정도 깨치셨으면 고승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다 깨치시지 않나요? 밤에 봤을 때는 대게 예뻤는데 낮에 보니까, “어 실상을 보니까 놀랬다. 아, 역시 마음먹기 나름이구나.” 자, 이것을 가지고 일체유심조를 깨쳤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유심조는 경전에 나옵니다. 뭐냐? 지금 여러분 저 보이시죠. /제가 여러분 마음 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시면 일체유심조를 이해하신 겁니다./ 제가 여러분 마음 작용일까요? 맞죠 사실은. 과학적으로도 맞아요. 여러분 지금 제가 객관적으로 보이시죠. 하지만, 저로부터 나간 빛이 여러분 눈에 망막을 통과해서 뇌에서 전기신호로 가서 뇌에서 다시 입체로 재구성해서 보고 계신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저는 여러분 뇌의 작용이라구요. 이것을 불교는 깨친 거예요. 그 전에. 뇌 또한 도구일 뿐이고, 컴퓨터 같은 것이고, 본질은 정신의 작용이라는 것을./
/내 마음에서 사실은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을 내 마음에서 구성해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게 유식사상이죠. 자, 이게 일체유심조입니다. 일체는 내 마음작용이다./
제가 지금 여러분 마음에 나타난 것은 제가 몰라요.
사실 여러분은 요즘 이렇게 비유하면 쉬울까요?
컴퓨터보고 여러분이 동시에 접속해서
어떤 사이버세계에서 만나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치죠.
객관적 세계가 분명히 있어요.
없다는 것은 아닌데, 여러분이 보는 것은 여러분 모니터밖에 못 봅니다.
모니터에 나타난 것 밖에 못 봐요.
즉, 객관적인 저는 있겠죠. 당연히.
법으로 있겠지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법들은
사실 여러분 마음 작용이에요.
여러분이 오감을 구성하고, 생각을 붙이고, 감정을 붙여서 보십니다.
요것을 자각할 때 대승불교에서 돈오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이론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체험으로 이게 실감나게 와 닿을 때 돈오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론으로는 지금 과학자들도 이해하죠.
그런데 여러분, 아무튼, 어떻게 실감나게 이해하느냐.
참나를 깨치고 보면, 참나 입장에서는 이게 보이는 거예요.
자, 꿈속에서는 분명히 건물도 나랑 별개고, 가족도 나랑 별개죠. 그런데 깨고 나보면 어떻죠? 깨고 나서 보면, 다 내 마음작용이었죠.
그런데 여러분 꿈에서 깬 것처럼,
지금도 깨어나신다면
지금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게
여러분 마음작용이란 것을 아실 수 있어야 됩니다.
꿈에서 깬 것처럼 실감나게. 그것을 돈오라고 합니다.
이것을 못 깨어나면
육바라밀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돈오를 하면요, 진짜 돈오를 하면 일체유심조를 깨치고 나면
여러분이 제 마음작용이라는 것을 알면서
제가 육바라밀을 하는 겁니다.
한마음이 사실 공입니다.
한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면 일체유심조고,
만법이 다 공의 작용이라고 얘기하면, 법공 그러는 겁니다.
만법이 공하다 해서 법공.
법공을 깨치지 못한 보살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여러분이 절에 신자들 오시면 “보살님 보살님” 불러드리지만, 실제 그 분들이 보살이 되시려면, 여러분이 보살이 되시려면 법공은 기본으로 깨치셔야 됩니다. 이게 모든 대승경전이 똑같이 얘기하는 거예요. 법공까지는 깨쳐야 되요. 초기 불교에서는 아공까지만 얘기해요. 아공법공 들어보셨죠. 그 아공이 뭐냐 하면 아공은 생각 감정 오감의 오온작용, 색수상행식의 오온작용이 내가 아니고 그건 무상하고, 다 내려놓고 순수 불성의 상태, 열반의 상태에 머무르시는 것을 아공을 깨쳤다고 그래요. 자아가 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법공은 그 차원이 아니에요.
자, 아공은요,
나의 생각감정오감이 다 무상한 것이고, 생각도 무상하죠. 감정도 무상하죠. 보고 듣는 오감작용도 무상하죠.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죠. 그것을 내려놓고, 그 무상함을 다 내려놓고 떠나면 법구경에 그런게 나오죠. 그 무상함을 내려놓고 떠나면 열반에 도달합니다. 그럼 열반은요, 저 일심상태입니다. 순수한 이원성을 초월한 의식상태, 열반상태에요. 그것을 깨치면 자아가 공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아공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아라한밖에 안 돼요.
보살이 되려면 법공을 알아야 되는데, 법공은 뭐냐? 여기서 한 번 더 나아가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런데 무상하다고 괴롭다고 버렸던 생각감정오감의 오온작용이 사실은 내 공, 내 안에 있는 불성의 작용이더라 하고 다시 껴안습니다. 껴안을 때 법공 그래요.
그래서 보살도는 법공을 모르면 못합니다. 왜냐? 아공까지만 아시는 분은 보살도를 할 수가 없어요. 왜? 현상계에 나가면 그 현상계에 오염될 까봐 어떻게 움직여요. 그 무상하고 괴롭고 내 것이 아닌 세계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보살도를 할 수 있습니까? 보살은 기본적으로 술집에 가서도 중생을 구제해야 된다고 하잖아요. 술집 또한 참나의 작용으로 볼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불성의 작용으로. 이 또한 공하다고 볼 줄 아는 안목은 법공을 깨쳐야 됩니다.
그래서 법공은 간단해요.
실제로 이것을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실제로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제 색깔, 제 소리, 여러분 마음작용입니다. 다른 사람 마음에는 어떻게 들리는지, 사실 어떻게 보이는지 몰라요. /우리는 아무리 윤회해도 세세생생 자기 마음밖에 못 봅니다. 여러분 남의 마음 못 봐요./ 타심통을 해서 볼 수는 있겠죠. 그것도 들어가서 구경해서 보는 거지, 구경해서 보는 그 마음은 여러분 마음이죠. 결국 여러분 마음밖에 못 본다는 겁니다.
여러분 모니터에 나타난 거 외에는 볼 수 없다는 게 일체유심조 사상입니다. /일체는 여러분 의식의 나타난 겁니다. 의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여러분이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유식학의 핵심입니다. 일체는 여러분 의식이 변화한 거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것을 월인천강 그러는 겁니다. 달이 천강에 비춘다. 제 실체는 하나지만, 여러분 마음 마음들이 천개의 강인 거죠. 여러분 마음에 나타난 그게 사실은 결국 여러분 마음작용입니다.
그래서 이 선, 화두선의 선어록들 선문답들 보시면, 요거 아느냐를 물어보는 겁니다. 계속. 이런 경우 있었죠. 마조스님이 제자들이랑 있을 때, 쭉 오리 한 마리가 날아가요. “저거 뭐냐?” 하니까, 제자가 “오리입니다.” 자, 여기 보세요. 선도 분석하실 줄 알아야 되요. “만법이 공하다는 것을 아느냐”를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저 오리도 단순한 오리가 아니죠. 저 오리가 제 마음에 나타나려면 뭐가 있어야 되죠? 불성이요. 불성의 작용이에요. 오리가.
“저거 뭐냐?” “오리입니다.” 그러면 제자는 오리만 본거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마음입니다. 마조스님은 뭐까지 보라고 한 거죠? “저 오리가 너의 불성의 작용인 줄 아느냐?”에요. 그런데 그냥 오리입니다. 그랬어요. “어떻게 됐냐?” “날아가 버렸는데요.”하니까 코를 꽉 꼬집어 버려요. “아야”해요. “날아가기는 뭘 날아가. 여기 있구만.” 뭔 얘기인줄 아시겠어요? /넌 오리만 봤지, 오리는 너의 본성의 작용이야. 그 본성이 지금 아프다고 하고 있잖아. 날아가기는 어디를 날아가./ 요 대화를 이해하시면요, 법공이 뭔지 아실 수 있어요.
이 짓을 선사들 밑에 가서 배우면, 진짜로 깨친 선사 밑에 가서 배우며 이 짓을 계속 수작을 거는 거예요. 제자들한테. 알 때까지. 그래서 어느 날, “아, 이거군요.” 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게 선하고도 연결되었어요. 선도 결국 대승철학의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요 얘기. 지금 육바라밀과 법공 얘기만 제가 지금 계속 드리겠지만, 요 얘기 조금 이해되세요? 아주 재미있는 거죠.
지금 여러분 계속 이게 꿈인 거 같으세요? 꿈이라는 게 아니라 꿈처럼 지금 제가 있고 옆 사람이 있고 이게 다 내 마음 작용으로 보이세요? 어렵죠. 분명히 나와 남이 다른데, 다 하나로. 그래서 중생심에서는 안 보여요. 그런데 여러분도 당연히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불성의 마음, 이 한마음 차원에서는요, 그렇게 보여요. /한마음 차원에서는 오온의 마음을 떠나서 볼 때는 통으로 보여요. 통으로 이렇게 ‘놀고 있구나’하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치려면 선정이 필요하겠죠. 선정으로 이 한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되고 지혜가 필요하겠죠. 법공을 이해해야 되니까.
요 정혜쌍수라는 게 이겁니다. 보조스님이 “정혜쌍수를 어떻게든 해라.” 하는 게 선정을 하고 지혜를 닦아서. 여러분, 꿈에서 깨어났으니까 꿈이 객관적으로 보이는 거 잖아요. 그럼 마찬가지로 지금 삶에 빠져있는 마음으로는 안보이죠. 지금 이 중생심, 겉에 돌고 있는 이 마음 안에서 빠져나와서 본질의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접속이 됐을 때, 상황이 보입니다.
“어,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게 다 내 마음작용이구나.” 하는 게. 그때 선정이 그것을 여러분 중심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은 /선정/이고 /지혜/는 상황을 파악하게 만들어줘요. 팩트에 근거해서. 지혜라는 게 불교에서는 여실지라고 하죠. 실상그대로 아는 것. 즉,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반야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하면 팩트대로 아는 거예요. 팩트 그대로./ 그런데 지금은 팩트 파악이 안 돼요. 중생심 차원에서는 나와 남이 다 달라요.
그런데 불성의 입장에서는 나와 남이 다르다고 하는 이 세계가 전체 통으로 꿈이라는 게 보여요. 그럼 선정이 아니고는 그 체험이 안 되고, 지혜가 아니고는 파악이 안 됩니다. 요것을 알고 나면 육바라밀 중에 선정과 지혜바라밀을 얻겠죠. 그런데 나머지 바라밀이 나오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돈오를 했다고 견성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육바라밀이 다 나오지는 않아요. 안 닦으면. 그래서 돈오 이후 점수가 필요하다는 게 대승불교의 입장입니다.
그 점수는 뭐에요? 선정과 지혜는 닦았는데 그 힘을 가지고 남하고 보시, 남한테 베풀어도 보고, 인욕 억울한 일, 치욕적인 일이지만 진리일 때는 견뎌내도 보고, 정진도 해보고, 실제로 룰을 지키면서 남들한테 부당한 피해를 안주는 삶도 살아보고, 이게 점수에요. 이 짓을 하다가 보면, 육바라밀이 원만해질 때가 오죠. 그때 이제 진정한 보살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래서 돈오만 했다고 보살은 맞지만 진정한 보살이라고는 안 봐요.
그래서 대승불교의 입장은 뭐냐 하면 돈오만 한 보살을 1주 보살이라고 그래요. 육바라밀까지 갖춘 보살은 1지 보살이라고 그래요. 화엄경에서 첫 1레벨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 정도 갖춘 분이 1레벨 보살이에요. 이제 내면에서 육바라밀이 살아 움직여요.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서 써보니까 잘 안 먹혀요. 연륜이 아직 부족해요. 그게 1레벨이에요. 그래서 7레벨, 8레벨까지 가면 자유자재가 와요. 그래서 십지보살, 십 레벨까지 가면 부처님입니다. 현상계에 있는 최고레벨. 게임에서 만렙 그러죠. 만렙에 도달하면 화엄경에서 십지까지 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화엄경 1지부터 10지는 이미 견성해서 6바라밀까지 다 깨달으신 분들이 얘기에요. 그 전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수심결이나 대승기신론이 나온 겁니다. 그 전을 설명해야 되는 거거든요. 거기까지 어떻게 갔는지가 설명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시작할 때 한마음 얘기를 하는데요, 저 한마음의 가운데 부분을 뭐로 이해하시면 되요? 심진여문, 우리의 절대적인 마음. 시공을 초월한 마음. 이 겉에 파란색은 심생멸문, 늘 일어나고 사라지는 중생심. 생각 감정 오감들. 자 그런데 저게 하나라고 했죠. 그래서 전체 하나가 한마음이고, 그게 여러분 마음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대승사상은 중생의 더러운 마음도 한마음 작용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무상하다고는 말할지언정 버리지는 않아요. 한마음 작용이니까. 그래서 생멸문까지도 한마음 안에 넣어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 생각 중에 추잡스럽고 남한테 보여주기 힘든 마음도 조합이 잘못된 것뿐이지, 그것을 육바라밀만 조합해서 넣으면 탐진치도 좋은 보물이 되요. 이게 연금술이죠. 탐진치, 탐욕과 분노와 이런 어리석은 마음도 보시, 사랑과 정의와 지계가 정의입니다. 올바른 룰과 인욕과 진실에 대한 수용과 정진, 반야, 선정이 들어가면요, 요게 순금이 되요. 보살도의 아주 중요한 방편이 됩니다.
그래서 탐진치도 버릴 게 없다는 거예요. 대승사상은. 여러분 탐욕하고 싸우지 마시라. 그 탐욕을 육바라밀로, 한의학에서는 이것을 법제라고 합니다. 독을 법제하면 약이 되죠. 독성을 죽여서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 법제하는 법이에요. 육바라밀이. 그래서
여러분 어떤 탐욕이 나요. 뭔가 성공하고 싶어요.
그런데 거기에다 육바라밀을 써버려요.
/사랑/ 그럼 남들도 다 나처럼 성공하고 싶겠네.
/지계/ 그럼 남들하고 사이에서 공정한 경쟁을 해야 되겠네.
/인욕/ 남의 입장이 그렇다는 것도 수용해보자.
/정진/ 그래도 나는 나대로 양심이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할 거야.
/지혜/ 그러면 뭘 해야 되지? 이렇게 찾아가잖아요.
그런데 처음에 시작은 탐욕이었는데 나중에는 보살도의 아주 훌륭한 도구가 되죠. 이거 법제해서 쓰는 법이 사실은 육바라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탐욕을 대승보살들은 전혀 겁내지 않아요. 탐진치가 올라오는 것을 겁내지 않아요. 제가 처음에 예전에 대학 때 탄허스님 강의 테이프를 구해서 듣다가 충격 받은 게 그거였어요. 제가 아는 불교는 ‘탐진치 버려라’인데, 탄허스님은 ‘대승은 안 그렇다. 탐진치가 그대로 보리다.’ 이러시는 거예요. 불교는 너무 어렵다. 말이 앞뒤가 계속 달라지니까. 여럽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대승사상을 이해하니까 뭔 소리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사상을 우리가 사실은 저는 온 국민이 알아야 된다는 거예요. 중생들이 알고 이것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해야 된다. 아는 만큼. 이것을 지도해주실 멘토들이 보살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위대한 보살 되시는데,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렇게 정리해보는 겁니다. 경전을 가지고.
이 구절 가지고 제가 읽어볼게요. 같이. 대승기신론 시작부분이에요.
/이른바 대승의 법이란, 위대한 수레의 법이란 일체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
그냥 여러분 마음이 위대한 법이에요. 위대한 진리에요. 여러분 지금 “나는 그렇게 고상한 마음 아닌데. 탐진치에 빠져있는데.” 상관없어요. 탐진치가 일어난다는 것이 한마음이 여러분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위대한 법입니다. 그게 왜 위대하냐? 생심이 그대로 일심이라는 겁니다.
/이 마음 안에는 세간과 출세간이 다 들어있다./
출세간은 절대계를 말합니다. 시공이 없는 세계. 세간법은요? 시공이 있고, 나와 남이 있는 세계. 여러분 마음 하나에 여러분 마음 안에 온 우주가 나타나고 있고, 일체유심조니까. 지금 여러분 안드로메다 저편도 여행가시면 가서 뭘 보고 올까요? 여러분 마음만 보고 오시는 거예요. 사실은.
자, 이런 비유 드려볼게요. 제가 양말을 신고요, 신발은 좀 두꺼우니까, 양말을 신고 지구를 다 돌아다니면서 모든 흙을 다 밟아보고 왔다고 해요. 다양한 촉감을 느끼고 왔겠죠. 저는 사실 양말만 밟은 거죠. 제가 양말을 신고 전 지구에 다양한 붉은 것, 미세한 것 다 흙을 밟아보고 왔다고 해도 저는 뭐만 밟은 거죠? 양말만 계속 밟은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 마음 밖에 모르세요. 사실은. 다른 사람 마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 사정인 거죠.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서로 통해요. 그게 중생심은 다르지만, 뭐가 하나라는 거죠? 불성이 하나라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하나씩 우리가 밝혀가자는 거죠. 그 한마음이 있으니까 다양한 중생심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중생심 버리고, 한마음만 취하자면 그런 소승식 발상은 안 된다는 거예요. 전체가 위대한 거다. 그래서 그 위대한 전체는 출세간과 세간을 포함한다. 이게 대승선언입니다.
소승불교는 뭐라고 할까요? 출세간에 집중하는 거죠. 열반, 열반이라는 것은 세간을 초월하자는 거죠. 세간초월에 더 우위를 둬야 되는데, 여기는 안 그래요. 출세간 세간이 다 아우러져 있는 이게 위대한 거다. 보세요. 더 설명을 들어보시면 나옵니다.
/이 마음에 진여는 곧 대승의 본체요, 이 마음의 생멸인연/
인연 따라 생멸하는 온갖, 다양한 마음은
/본체와 형상 작용이 어우러지면 돌아가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이 마음이 전체로 위대하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본체 형상 작용이 뭔지는 더 설명드려볼게요.
그러면 그 위대하다고 하는 게 뭐가 위대하는 거냐? 본체가 먼저 위대하다. 3가지가 위대하다. 요게 절에 점3개 찍어놓은 거죠. 체상용. 우리 마음 안에 체상용이 다 있다. 그래서 위대하다. 자, 본체는요,
/본체가 위대함이니/
이렇게 좀 구분해 주세요. 이해하기 쉽게. 자, 여기 여러분 마음의 본체입니다. 여기는 한마음 자리, 텅 빈 자리에요. 여기는요? 중생심이요. 일어나고 생멸하는 마음이에요. 생멸하는 마음. 여기는 이원성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나하고 남이 하나입니다. 여기서는요? 나하고 남이 다릅니다. 여기는 시공이 없습니다. 여기는 시공이 있습니다. 이원성의 마음입니다.
동양에서 태극사상이 이렇게 이원성, 그려놓죠. 이원성. 이원성이 펼쳐지는 자리, 동양에서 태극이라는 것은 여기도 그려놓죠. 이것은 왜 그럴까요? 이원성의 뿌리인 자리. 그런데 태극도 더 근원은 공해야 되죠. 자, 원래 텅 비었는데, 보세요. 이거 이해하시면 죽입니다. 동양철학도 이해 되요. 원래 텅 비었죠. 동양철학에서는 무극 그래요. 텅 비어 있는 중에 우주 만상의 근원이 여기 다 들어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플러스 마이너스가 들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태극이고 우리나라 국기에요. 태극은 하느님 자리에요. 일심의 본체 자리에요.
그리고 그게 실제로 현상계에서 남녀, 빛과 어둠으로 펼쳐지면 작용이 되는 거예요. 현상계가. 자, 보세요. 그럼 음양이 펼쳐진다고 그래요 동양은. 무극은 청정한 본체, 태극은 그 본체 안에 들어있는 어떤 공덕의 씨앗들, 그리고 그게 실제로 펼쳐져서 낮과 밤이 일어나면 현상계 작용. 음양의 작용, 그럽니다.
불교도 똑같아요. 동양철학의 그런 입장과 똑같이 대승불교도 지금 뭐라고 하냐하면 보세요. 이 텅 빈 이 공은 이공을 뭐라고 불러요? 본체. 그럼 이 본체 안에 우리나라 태극기는 음양만 그려놨지만, 여기에 여섯 개의 육바라밀의 덕목들이, 실제로 예전에 규봉스님이나 이런 고승들이 이렇게 불렀습니다. 일심이 쪼개지면 육바라밀이 된다. 요게 이겁니다.
자, 여러분 텅 빈 거 같죠. 이 안에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공덕종자들이 들어있어요. 이게 뭘까요? 이것을 본체가 형상이라고 합니다. 형상. 본체 안에 신묘한 형상이죠. 이게 현상계의 현상이 아니고요, 신묘한 형상이 들어있어요. 이 형상이 있으니까 이게 현상계에서 울고 웃고 떠드는 중생심 속에서 육바라밀이라는 것으로 작용을 일으키는 겁니다.
자, 본체 형상 작용, 3가지를 그리면 이렇게 그릴 수 있죠. 여러분 한 마음 안에는 본체형상작용이 갖추어져있다. 이게 다에요. 더 어려운 거 없습니다. 육바라밀 나왔고, 체상용 나왔으면 다 나온 거예요. 자, 보세요. 그러니까 /대승에서 위대하는 것은 본체가 위대하다./ 이 공자리가 위대하다. 여기는 공이고 진여자리이니까, 여기는 평등해서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래서 위대하다. 늘지도 줄지도 않는 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자리다. 시공 안에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그 자리가 위대하다.
그런데 시공 안에 자리가 없는데요,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여러분 중생심에 제일 밑바닥에, 지금 저 보고 계시죠. 저 보고 계신 자리가 공자리에요./ 사실은. 아시겠어요? 이게 선문답들이 다 이겁니다. 부처가 뭡니까? 부처가 뭡니까? 여러분이 물으시면 제가 “아무개 씨?” “예” 방금 대답한 자리가 부처자리다 이거예요. 이런 선문답이 있죠.
내가 병에다가 새를 한 마리 키웠어.
그런데 그 새가 이제 너무 커서 병을 깨어야 되는데,
병을 깨지 않고 새를 병에서 나오게 해봐.
이거 예전에 고승이 던졌어요. 제자한테. 답을 못했어요 제자가. 고승이 답을 대신해줘요. “제자 아무개야” 하니까, “예” 하고 선문답이 끝나요. 요거 이해되세요? 아주 훌륭한 설법입니다. 뭔 얘기를 한 걸까요? 고 병이 육신이면 병속의 그 새가 참나에요. 자, “불성한번 꺼내봐.” 이거예요. “불성을 드러내봐.” 그럼 제자가 못하죠. 드러내준 거예요. 스승이. “아무개야.” “예” 예가 불성이 드러난 겁니다. 지금. “예.” “어, 내가 색 꺼내줬다.” 이거예요. 느낌 오세요?
저를 보고 있는 그 자리.
지금 저를 보면서 생각이 복잡하죠. 오감을 벌써 보고 있구요.
저의 소리를 듣고 있고, 오감을 적용해서 거기다 생각을 입혀요.
쟤는 누구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다.
감정 좋다 싫다를 입혀요.
이게 오온작용입니다.
이 오온 작용을 통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자리가 따로 있어요.
그 자리가 참나 자리에요.
순수한 각성,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있어요.
이게 우리가 일반인들이 파악하기 힘든 게 예전 어른들이 거울에 비유를 들었는데요, 자, 거울이 있다고 치죠. 여기. 거울에 오만 것을 다 비추어보면 거울에 산도 나타나고, 물도 나타나고, 사람도 나타나고, 흉측한 것, 좋은 것 다 나타나죠. 그럼 거울이 오염된 것 같지 않으세요? 거울은 오염된 물건 같죠. 계속 어떤 형상을 띄고 있으니까. 여러분도 우리 중생심이 위대하는 것을 모르는 게, 중생심에는 온갖 생각과 감정과 추잡스럽고 이런 것들이 계속 돌아다녀요. 이기적인 게. 그러니까 내 마음에 이런 알아차림이라는 게 다 부질없는 거 같고, 오염된 것 같단 말이에요. 거울이 더렵혀진 것 같듯이.
그런데 거울 앞에서 어떤 물건도 다 치워버리고
안 비치면 어떻게 될까요?
원래 거울은 똑같이 거울이었어요. 청정한.
그런다고 거울이 안 비출까요? 비치는 속성은 그대로 있죠.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오만 것들을 알아차리고 사는데,
그 알아차림들이 다 내용들이 별게 없어서
내 마음이 별게 없는 줄 알고 있는데,
명상을 통해서 모든 생각을 한번 치워버리고 나면,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있는 그 힘은 그대로 있지 않을까요?
그게 불성이고 참나입니다.
그래서 그게 공자리이고 참나자리라,
예전 어른들이 공이라고는 하지만
허공은 아니다. 왜?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공적영지.(신령할 영, 알 지.)
사실은 공적한데 텅 비어있는데
신령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여기서 신령하다는 게 무슨 특별한 게 아니에요.
알아차리고 있는 게 신령한 거예요. 허공은 못 알아차리는데,
이 의식은요, 텅 비어있는데 시공도 없는데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깨치시는 게 견성이죠.
그래서 처음에 견성은 그것을 깨쳐서
그 자리가 내의식의 제일 밑바닥이기 때문에 항상 있어야 되요.
왔다 갔다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명상할 때만 그 자리가 나타나고, 순수한 알아차림의 자리가.
명상에서 나오면 사라지죠. 처음에는.
이 짓을 자꾸 하다가
확철대우라는 게 뭐냐 하면,
뭔 짓을 해도 내가 항상 알아차리고 있는
그 의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거기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게 확철 되죠.
그러니까 그때는 뭐하느냐?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
그런데 항상 알아차리고 사는 거죠.
저 공자리를 알고 있으니까 그 공에서 일체가 나타나서, 왜 일체유심조라고 하느냐? 이 공적영지를 우리말로 풀어볼게요. 순수한 알아차림이죠. 알 지자를 알아차림, 공적을 순수로 번역할게요. 텅 빔도 좋아요. 텅 빔 알아차림, 대상없는 알아차림.
대상이 없는데도 알아차리고 있어요. 그 의식이 여러분의 제일 밑바닥이죠. 이 밑바닥이 있으니까 순수한 알아차림이 이 본체니까 작용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나와 남이 쪼개질 때, 나니 남이니 하는 그런 분별을 알아차리게 되는 거죠.
자, 온갖 분별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생심이고, 본체는 텅 빈 알아차림이고. 그런데 사실 하나에요. 거울이 원래 순수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거울이 비추고 있는데, 온갖 객관경계들을 갖다 대니까 수많은 것들이 거울에 나타났잖아요. 그럴 땐 중생심이라고 부르다가 다 치워버리면 뭐에요? 똑같은 거울 아니에요.
그러니까 대승기신론은 중생심도 사실 본질은 순수 알아차림이기 때문에 본체와 작용일 뿐이지, 중생심은 더럽고 ,일심 참마음은 깨끗하고 이런 논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성립이 안 된다. 그래서 전체가 위대하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슬프고 울고 웃고 하는 것도 그 알아차림도 또한 어디서 나온 거예요? 거울에 비추는 능력이 온갖 것을 비췄듯이 그 여러분의 알아차림이 있었기 때문에 나니 남이니를 알게 되고, 슬플 때 슬픈 줄 알고, 기쁠 때 기쁜 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슬플 때 슬픈 줄 아는 것은 슬픔이 아니고, 기쁠 때 기쁜 줄 아는 자리는 기쁨이 아니라는 거예요. 뭐랑 같냐 하면 제가 옷을 많이 입으니까 이 옷을 입은 내가 나 같은데, 저는 알고 있죠. 제 맨살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처음에는 옷을 걸친 것, 오온의 옷을 걸치고 있으니까 본래 나를 잘 몰라요. 이게 난 거 같아요. 겨울철에 내복을 오래 입다보면 내복과 내 살이 하나가 된 거 같죠. 그런데 내복을 벗고 나면 새 세계가 열려요. 마찬가지로 이것을 계속 입으니까 이게 난 거 같아요. 오온이 나 인 거 같은데, 명상을 통해 오온을 다 벗어보니까 맨 나가 있는 거예요.
자,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선정 때만 이게 맨 나를 느끼는 것은 옷을 벗을 때만 나를 느끼는 거랑 똑같아요. 이것으로는 확철대우 못합니다. 다시 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그 맨 나가 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온갖 망상 속에서도 참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확철대우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뭔 짓을 하고 다녀도 참나를 잊지 않아요.
그리고 참나를 잊어버리지 않는 선정과
참나 관점에서 현상계를 일체 유심으로 보고 있어요.
일체가 참나 작용으로 실제로 보고 있어요.
지금 여러분도 제 마음작용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선정과 지혜가 항상 함께 하는 것을 확철대우 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정에서는 그것을 높이 치는데 대승경전에는 그것은 1주 보살밖에 안 돼요. 이 입장이 선종과 교종이 충돌 나는 지점입니다. 보조지눌스님이 왜 욕먹었냐하면 확철대우만 하면 부처지 그것을 어떻게 1주니 이렇게 단계를 정해버리느냐? 우린 단계도 없다. 교외별전이다. 해서 충돌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나중에 어떤 입장을 들으시더라도 미리 아셔야 되요. 두 개의 입장은 서로 다릅니다. 다르면 다른 줄 알고 서로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요 입장이 있고, 요 입장이 있어요. 제가 볼 때는 둘 다 서로 회통하는데, 그거가지고 괜히 충돌이 나고 있어요. 저는 실상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여러분 실제로 공부하시다가 그런 경지까지 가시기만 해도 아라한은 이제 우습죠. 왜냐? 죽을 때까지 공을 알게 되었고, 일체가 공의 작용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 하나는 답이 나와 버렸거든요. 뭐가 부족하죠? 아까 말씀드렸지만. 육바라밀이 부족해요. 본체는 알았죠. 본체는 알았는데, 1주 보살은, 확철대우는. 뭘 모르는 게 되죠? 본체는 알았는데 본체 안에 육바라밀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르잖아요. 그 보살은. 확철대우를 했다고 해도.
그러니까 이게 작용으로 안 나타나요. 그래서 신기하게 견성은 했다는데, 만나서 대화해보면 인격도 좀 편협하고 아집 부리시고, 남도 잘 이해 안하고 이런 분들이 계세요. 실제로. 그럼 그 분은 견성을 안 하신 게 아니라, 1주 견성은 했는데, 1지 견성은 못했다라고 대승에서는 딱 풀이합니다.
그래서 고려 때 보조지눌스님이 “저 논리를 가지고 요즘 선을 닦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입만 열만 한방에 부처되었다고 떠드는데, 사실은 더 닦아야 할 게 엄청 많다는 걸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고려 말에 그런 얘기가 이미 있었어요. 지금 우리 한국 불교에서도 이런 입장을 잘 이해하시면 좋겠다. 하는 게 제 수심결도 번역하고 했던 제 입장으로서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래서 불교방송 BBS인가요? 거기 나가서 수심결을 5회에 걸쳐서 이런 내용을 다 담아서 수심결을 통해서 풀이해서 한 게 있어요. 유튜브에 다 올라가 있으니까 짧게 5회로 대승사상의 핵심을 맛보시려면 수심결 강의 한번 꼭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구절만 이해하셔도 대승기신론의 제일 핵심을 이해하신 거예요. 뭐가 위대하다는 거냐? 내 마음이 위대하다. 이게 치졸한 대승소승의 구분이 아니에요 이미. 우리가 흔히 아는 소승대승 구분이 아니라구요. 대승기신론에서의 대승은 위대한 한마음에 대한 가르침이에요. 사실 ‘한마음교’에요. 보살은 오직 한마음만 따르고 갔다.
자, 보세요. 어떤 게 보살입니까 그러면?
/자기 내면의 본체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절대 공적의 그 알아차림이라는 것을 알고 늘 자각하고 살아요./
/그리고 형상의 측면에서는 보세요. 형상은 어때요? 형상의 위대함이니 여래장이 무량한 본성의 공덕을 갖추고 있다./
내 여래장, 불성에 육바라밀이 구체적인 무량한이라는 것은 육도만행이라고 하죠. 온갖 만행, 좋은 수행들은요, 다 어디서 나와요? 육도가 육바라밀입니다. 육바라밀에서 나와요. 육바라밀의 조합으로 온갖 좋은 게 다 나와요. 모든 선에는 육바라밀이 들어있습니다. “저 사람 참 잘하네.” “옳게 일을 하네.” 그러면 거기에는 육바라밀이 들어있다는 얘기에요. 사랑이, 배려가, 룰을 지키는 정의가, 인욕이, 정진이, 선정이, 지혜가 있다는 거예요.
이중에 하나만 빠져보세요. 배려가 없거나, 그럼 선행이 아니죠. 판단이 반야가 부족해서 판단을 잘못했거나, 이거 아니에요. 받아들여야 할 것을 인욕하고 있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지계_계율을 깨고 있거나, 선정_깨어있지 못하거나, 정진_나태하거나. 그러면 육바라밀이 뭔가 한 요소만 깨져도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들 눈에 양심의 찜찜하다 라는 사건으로 보여요. 놀라운 얘기 아닙니까? 이게 양심의 6원칙이에요. 그게 우리 안에 들어있다. 이게 위대한 형상이에요.
여러분 마음에는요, 순수한 알아차림이 아무리 어리석은 중생도 순수한 알아차림이 저 내면에 있어요. 거기서 모든 판단이 일어나고 그 안에 어떤 종자들이 들어있냐? 육바라밀의 종자가 들어있어요. 작용. 그런데 그 종자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밖으로 작용이 제대로 안 나와요. 그래서 육바라밀 해버리면 해결될 문제를 꼼수로 해결하려다가 일이 자꾸 꼬이고, 탐진치로 해결하려다가 꼬이는 거죠.
중생들이 작용을 안 쓰는 게 아닌데, 중생의 작용은 문제가 있는 게 보살의 작용과 다른 게 선악을 모르고 함부로 인과를 짓고 있는 거죠. 보살은 선한 인과만 짓습니다. 그래서 중생 모두가 그 복을 받게. 나 혼자 받으려는 게 아니라,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남들하고 그 열매를 나눈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중생 중에 보살이 없으면요, 중생은 부모가 없는 거와 똑같아요. 리더가 없는 거와 똑같아요.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지금 한국불교도 종단에 많은 문제들이 있죠. 저는 해답은 간단하다고 봅니다. 육바라밀, 육바라밀을 지켜 가면 하나하나 해결 되요. 신기하죠. 육바라밀이 투입되면, 중생의 모든 문제는 풀리게 되어 있어요. 왜? 한마음에 그렇게 쓰여 있어요. 자, 육바라밀을 제가 임으로 갖다 붙은 게 아닙니다. 나중에 대승기신론 후반에 또 설명 드릴게요.
/작용의 위대함이니 일체의 현상계와 절대계의 선한 인과를 낳기 때문이다./
선한 인과를 낳을 수 있는 작용을 펼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지금 악한 인과를 짓고 있다고 그 작용 자체를 벗어버리려고 하면 소승철학에 빠진다는 거예요.
/승이라는 것은 뭐냐?/
대승을 풀어준 것입니다. 왜 위대하다고 하느냐? 내 중생심이 그대로 본체와 형상과 작용이 있어서 위대한 거고, 승이라는 것은 모든 부처님이 모든 보살이 이 진리를 타고 여래까지 갔으니까 보살도 했으니까 이 마음을 타고 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대승을 다시 풀면, 한마음교죠. 이 한마음타고 가자. 이 한마음을 따라가자 하는 겁니다.
자, 이것을 미리 그려볼게요. 이게 대승기신론에 나온 말입니다. 우리 참나가 본체이면요, 어떤 형상이 들어있어요? 참나에는 이런 형상이 있어요.
탐욕이 없어요. 참나가 나와 남이 있겠습니까? 탐욕이 없죠. 그러니까 밖으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뭐가 일어나야 되요, 원래? 참나 그대로 불성을 따르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되요? /보시/작용이 일어나야 되요. 남의 입장을 내 입장처럼 이해하는 보시작용이 일어나야 되요. 단순히 뭘 준다는 게 아니에요. 보시는. 남이 나 같아서 주는 거죠. 남의 입장이 나처럼 느껴져야 보시입니다.
자, 참나는 오염되지 않죠. 더럽혀지지 않죠. 그러니까 실제로 살 때 /지계/바라밀이 나와야 되요. 룰을 지키면서 나와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죄 짓지 않는 삶이 나와야 되요.
그리고 참나에는 성냄이 없죠. 그러니까 밖으로 나올 때 상황 상황에 혼자 열 받아 하지 말고 빨리빨리 진실과 진리를 수용하면서 따라가는 /인욕/바라밀이 나와야 되요.
참나는 나태하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올 때 뭐가 나와야 되요, 작용으로? /정진/이 나와야 되요.
참나는 요동하지 않기 때문에 밖으로 /선정/심이 나와야 되요. 어떤 상황에도 평정심이 나와야 되요. 참나를 알고 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참나는 무지라는 게 없기 때문에 밖으로 나올 때는 항상 자명한 판단, /여실지/가 나와야 되요.
자, 요게 다입니다. 이게 보살도, 한마음교라는 거예요. 우리 한마음이 이렇게 생겼으니까 이 작용을 펼치는 게 맞다는 거예요. 저것을 제가 모든 종교에 가서 뭐라고 소개해 드리냐 하면 양심이라고 소개해 드리면 저것을 다 이해해요. 성경에도 똑같이 나와요. 성경에도 하느님은 보시가 사랑이죠. 사랑이 하나님이요, 지계는 정의죠. 남한테 죄 짓지 말자는 거예요. 정의의 하나님이요, 질서의 하나님이요, 조화의 하나님이요, 성실하신 분이요, 늘 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지혜로운 하나님이다. 이게 구약부터 나와요. 이게 벌써 종교 간에 통한다니까요. 저것을 하나님이라고 보는 거예요. 기독교는. 저 한마음을.
우리는 우리 내면의 의식이라고 본다면 밖에 있는 어디 하느님이 계실 거다라고 착각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 뿐이지 본질은 통한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 중에도 아는 사람은 똑같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분들 중에 예수님이 나오죠. /예수님이 뭐라고 했나요?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나는 내 뜻대로 살려고 온 게 아니고, 아버지 뜻대로만 살려고 왔다./ 그 양반이 뭐했죠? 사랑, 정의, 예절, 지혜. 그럼 보살이죠. 예수님도 보살이죠. 예수님이 보살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뭐냐 하면 극단으로 보이실 수 있지만, 제가 극단적인 얘기 하는 게 아니라, 화엄경 보셨나요? 맨 뒤에 이런 사상이 2천 년 전에 나왔어요. 대승에서는. 대승에서 뭘 주장했냐하면 화엄경에 끝에 입법계품에 선재동자 이야기 있죠. 선재동자 얘기 보면 충격적입니다. 선재동자가 도를 찾아가는데, 비구 비구니는 몇 명 안 나와요. 상당수가 누구였죠? 일반인들이었어요. 왕, 폭군도 나와요. 폭군도 폭군대로 보살도를 하고 있어요. 인자한 왕을 또 만나요. 장사꾼들을 만나요. 뱃사공도 만나요. 심지어 기생도 나옵니다. 매춘부도 나와요. 한수 배워요. 다. 다 보살들이에요.
자, 그리고 다른 종교인, 힌두교 성자도 나와요. 53선지식, 지금 구성이 이렇다니까요. 온갖 신들도 나와요. 그리고 소년 소녀한테도 가서 배워요. 동자 동녀한테. 자, 뭡니까? 모든 중생이 다 선지식이고 다 보살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2천 년 전에 나왔어요. 충격적인 거예요. 이거 자랑하셔야 된다니까요 불교는. 우리 2천 년 전에 남녀, 노소, 신분, 직업, 귀천, 종교를 타파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타파한 보살사상을 내놨다는 거예요. 즉, 모든 대승경전은 보살은 이교도로도 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외도로도 올 수 있다. 소승성자로도 올 수 있다.
대승사상에서는 요즘 소승대승 따지고 있죠. 사실 들어가 보면 대승의 입장은 뭔지 아세요? 소승도 보살이라는 거예요. 소승의 모습으로 보살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방편으로. 그러면 기독교는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보살도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슬람은요, 이슬람성자의 모습으로 와서 보살이 보살도 하고 있다는 거예요. 보살은 꼭 불교로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을 2천 년 전에 이미 밝힌 겁니다.
유마거사는 재벌이었어요 당시. 재벌이 부처님 석가모니 제자들을 물리칠 정도로 뛰어난 보살이었어요. 이렇게 나옵니다. 유마거사 묘사가. 유마거사는 조선시대 딱 선비에요. 사실 유교의 모습도 보살도인 거예요. 딱 선비입니다. 장사꾼인데, 재벌인데, 집에서는 오로지 육바라밀만 설했다고 나와요. 가족들하고는 육바라밀을, 처자식을 두고도 육바라밀을 설하니까 가정이 잘 경영되죠. 제가가 되죠. 수신_늘 깨어서 육바라밀을 닦고 있죠. 그래서 술집에 가서도 도를 폈다고 나와요.
그 다음에 치국_조정에 가서도 왕한테 육바라밀로 도를 폈다고 나와요. 어디든 가면 브라만들을 만나면 브라만들하고, 다른 종교인들과도 또 도를 펴고. 이런 위대한 사상이 저는 대승사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제가 죽는 날까지 저는 요것만 파고 저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게 위대한 보살은 오로지 이 마음 타고 갔다. 그래서 앞에 체상용에서 상이 꼭 육바라밀로 한정 안 지었는데, 제가 너무 육바라밀로 몰고 가는 것 같지만, 뒤에 가보면 나와요.
어느 경보다 대승기신론을 제가 강조하는 부분은 육바라밀의 설명을 최고로 잘했어요. 그것을 설명 드릴게요. 좀 쉬고 할까요? 예.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유교와도 한번 접목해보면서 대승기신론의 후반부 얘기로 또 들어가겠습니다. 남은 시간동안은.
'윤홍식 > 윤홍식_깨어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익학당] 윤홍식의 수심결 특강 4강 : 밖에서 구하지 말라! (0) | 2018.05.07 |
---|---|
[홍익학당] 윤홍식의 수심결 특강 2강 : 불멸의 한 물건 (0) | 2018.04.02 |
윤홍식_선의 정신으로 개벽을 대비하라! (0) | 2017.04.19 |
윤홍식_KACE 부모리더십 센터_1강 (양심혁명 양심이 답이다!) 홍익학당 (0) | 2017.03.28 |
윤홍식_홍익학당, 대학에서 배우는 철학의 요결 (0) | 2017.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