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정책이 함께하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입니다.
재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박열>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
“모든 걸 밝혀내겠다. 절대 잊지 않겠다.”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가 한국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신 분들도 많을 거고요, 가네코 후미코 외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외국인이 많고, 그래서 한국 정부에 의해서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은 외국인이 70명이나 됩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몰랐던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에 앞서 우리나라 독립유공자 포상정책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독립기념관 김형목 선임연구위원님 모셨습니다.
/2019.03.04.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 모두발언-
100년 전, 선조들의 만세운동은 민족의 독립의 함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향상 거대한 항쟁이었습니다.
그 항생을 이끈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후선을 찾아 제대로 예우하는 일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독립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연구하는
한국독립운동
독립기념관 김형목 선임연구위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귀중한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말이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됐어요.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삼대가 흥한다.’
식민잔재 청산을 못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마땅한 예우를 하지 못한 것이 궁극적으로, 그 당시 표현은 그랬습니다. 민족정기를 훼손하는 일이었다.
<친일잔재 청산 미완의 아픔>
1949년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
독립운동가 김상덕의 염원, 친일파가 청산된 새로운 나라 건설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개시
1949년 1월 8일 제1호 검거자 박홍식(친일 대표사업가)
1949년 1월 10일 친일 밀정 이종형 체포
1949년 1월 13일 민족대표 33인 중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 체포
1949년 1월 25일 친일 경찰 노덕술 체포
1949년 2월 7일 친일 문학가 최남선, 이광수 체포
그것도 잠시
정부 내에 포진해있던 많은 고위직 친일파들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낸 국회의원 13명 구속
그리고 이어진
1949년 6월 6일 친일 경찰들의 반민특위 습격
불과 20일 뒤 백범 김구 선생 암살
1949년 7월 6일 반민법 개정안 국회 통과
사실상 무력화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
친일파의 반민족행위 처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8~1949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해산된 것에 대해서 모두 가슴 아파하시는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산과 더불어 굉장히 중요했던 것이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포상과 서훈이었는데, 정부수립 후에도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 절차가 왜 그렇게 됐는지, 어떤 정도의 포상과 서훈이 이루어졌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궁극적인 원인은 속된 이야기로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배제되어버리고, 오히려 친일행위자들이 권력을 잡습니다.
“일각에서 많은 비판 여론이 일었던 부분이 뭐냐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친일 의혹이 있는 심사위원들이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거였잖아요?
“친일행위자들이 과거에 잘못 저지른 것을 숨기게 되고 은폐하려 하고, 나아가서는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적인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을 철저하게 억압했기 때문에, 보훈정책이 자리를 설 수 없었던 것이죠.
친일문제를 1960년대까지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들도 있어요.
결국 오늘날 친일문제를 들여다보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 격이다’
그런 비판들이 충분히 나올 수 있죠.
“심지어 그런 이야기도 돌았잖아요.
독립유공자가 친일파한테 사정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왔다.
해방 전에는 친일행위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해방되니까 친일파에게 선처를 부탁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심사과정에서 문제들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조차도 제대로 선양하지 못하고 표창하지 못하고 예우하지 못하다보니까 실제로 보훈처에서 외국인독립훈장을 선정전해 놓고도 국민여러분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은 게 많았던 탓인 거 같아요.
많은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데, 일본인 독립운동가 한 사람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독립에는 외국인도 있다>
“대표적인 분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했던 일본의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입니다.
일본 변호사협회로부터의 핍박 속에서도 2.8독립선언으로 인해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의 무료 변론을 시작으로 심지어 서울까지 와서 제주 4.3사건을 변호하는데 앞장서고요,
그런 측면에서 인권, 자유, 평화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 후세 다쓰지 같은 인물이라고 봅니다.
/3.1운동의 불씨가 된 2.8독립선언
2.8독립선언서:
한일합방은 자유의 의사가 아니므로 독립을 주장한다.
조선 민족대회를 소집하여 우리 겨레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라.
위의 요구가 이뤄지지 않으면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치를 것을 선언한다.
독립선언문을 유포한 죄목으로 재판장에 선 11명의 조선 유학생
재판관은 조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조선 독립은 정당한 요구이며
오히려 그들의 탄압하는 것 자체가 위법이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유학생을 무료 변호한 일본인 후세 다쓰지입니다.
이후 1923년 박열, 일왕 암살 미수 사건
1924년 김지섭, 일본 궁성 포탄투척사건
1923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 작성
조선 민중의 해방운동에 노력할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다.
-후세 다스지
후세 다쓰지(1880~1953)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최초의 일본인이다./
“실제로 후세 다쓰지의 이름을 아는 분이 몇 분이나 될지 모르겠어요.
보편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이 갖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발견하는데 이런 분들이 기여한 바가 큰데요,
왜 그동안 우리는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소홀히 했을까요?
“인식을 못 했던 것 같아요.
후세 다쓰지는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고,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굴곡이 너무 크니까, 그런 면에서 역사의 뒤안길에 있게 된 거죠.
“인도주의와 비인도주의 간의 싸움이었다고 하는 패러다임, 프레임을 전환할 수 있게 하는 사례일 텐데요, 이런 것들이 우리 언론도 학계도 마찬가지겠죠?
널리 알리는 데 소홀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인 혹은 미국인 독립운동가 중에 대표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은 누가 있을까요?
“유럽인 중에서도 주로 아일랜드계가 많고, 아일랜드를 국적으로 독립유공자 외국인 포상을 받은 분은 두 분 밖에 되지 않지만, 아일랜드도 역시 우리와 같은 영국의 지배를 받으니까 캐나다 쪽으로 이민을 많이 했어요. 국적이 캐나다 국적으로 되어 있거나 미국 국적으로 되어 있는데, 대체적으로 아일랜드계 선교사들이 캐나다 국적과 미국 국적을 갖고 있지만, 한국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언론인, 선교사, 의사, 무역인 등 푸른 눈의 독립유공자들
제암리 학살 사건 등 사진으로 담아 알리고자 노력
캐나다인 의료선교사 프랭크 윌리암 스코필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 특사를 자청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특사 3인과 함께 대한 제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력
헤이그 ‘제4의 특사’ 미국인 교육자 호머 베자렐 헐버트
‘일본이 머지않아 폐망할 것이다!’
제주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3명의 아일랜드인 신부
패트릭 도슨, 오스틴 스위니, 토마스 라이언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에게 은신처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노력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
이국 땅, 다른 나라이지만
서양인 독립유공자들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선교사들의 갖고 있는 인식 자체가 지구촌 시대라고 하는 시각에서 오늘날을 본다면 한국인보다 한국인을 더 사랑하는, 한국을 더 사랑하는 그런 인식을 가졌던 거 같아요.
선교사들이 캐나다와 미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했는데, 한국에 와서 역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주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조지 루이스 쇼입니다.
조지 루이스 쇼는 어머니도 일본인이고, 자기 부인도 일본인이면서도 단둥의 이륭양해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해서 중국에서 한국으로 이동하는 독립운동가와 또는 한국에서 단둥을 거쳐 중국으로 이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다 보호해줍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
1907년 중국 단둥에 이륭양행을 설립,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우리 아일랜드가 영국의 지배를 받는 상황과 비슷하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
‘내란죄’ 명목으로 체포된 조지 루이스 쇼, 그의 체포 과정에서 반일감정이 확산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진다.
피와 문화는 달랐지만
자신의 나라처럼 한국에 헌신했던
조지 루이스 쇼(1880~1943)/
“양행이라고 하는 게 무역상인데 경우에 따라선 호텔 같은 경우도 겸합니다.
“호텔도 겸하지만 주로 많이 하는 게 상품 거래와 무역상이라고 보면 되겠죠.
이륭양행이 단둥에 있고, 조지 루이스 쇼가 영국인이니까, 일본이 함부로 수색도 하지 못하는 점을 이용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고 국내에서 모은 독립운동 자금 등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낼 수 있었고, 또 임시정부 요원들이 국내로 올 때, 거점으로 이용해서 국내에 임시정부 활동을 선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륭양행에 독립 운동 자금을 송금하고 상품결제대금으로 꾸며서 송금하면 이륭양행에서 임시정부로 보내는 방식의 독립운동 지원이었던 거겠죠.
조지 루이스 쇼는 이륭양행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도운 그것 때문에 나중에 곤욕을 치른다거나 하는 사례가 있습니까?
“당연히 곤욕을 치르고 나중에 중국 복건성에서 사망해요.
그러니까 일본에서 영국이 계속 압력을 가하니까, 영국도 자제를 하려고 하는데 되지 않으니까 영국도 거의 포기하는 상황으로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조지 루이스 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었던 편이겠죠?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 1872.11.03~ 1909.05.01
‘황무지 개간권 반대’ ‘을사늑약 부당 폭로’ ‘고종 밀서 보도’ 등 일제의 한국침략 규탄에 앞장섬)
“시청자분들에게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70명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중에 한 30여 명은 중국인이죠?
중국인 독립유공자에 대해서 특별히 소개해주실 분이 계신다면 누가 있을까요?
“제일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쑨원의 신해혁명인 것 같아요.
중국과의 연대를 통한 일본에 항의를 하려고 했던 그런 꿈을 가졌던 젊은 지식인들이 상해로 공격적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런 면에서 쑨원은 한국 독립운동의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했죠.
(쒄원 1866.11.12.~1925.03.12.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정,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 적극 지원)
독립 운동 자체를 혁명이라고 했으니까 독립운동의 꿈을 가진 분들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고, 동제사, 신한혁명 같은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그 단체들이 또 3.1운동 이전에 국내로 들어와서 3.1운동을 일으키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동제사 3.1운동의 산실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의 신해혁명을 도운 예관 신규식 선생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동제사에는 ‘한국통사’를 쓴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선생 등이 참여했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극에 달했던 1910년대
박달학원을 통해 인재양성
중국군사학교에 조선인 학생을 보내 군사교육 육성
3.1운동 당시 하세가와 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에
새로운 독립선언서 낭독 및 만세운동 주도
비록 짧은 기간 존재했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한 동제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 역사의 시작에는 동제사가 있다./
“또 다른 독립유공자가 계시다면?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국민당 정부의 총통이었던 장제스의 임시정부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이동 시기에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죠.
“국민당 정부를 따라다녔던 거죠.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 독립운동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지니까.
그런 면에서 장제스하고 쑨원이 도움을 가장 많이 주었던 인물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그의 뒤에는 든든한 중국인 임시정부 지원자들이 있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 그리고 그의 부인 쑹메이링 여사
장제스는 말했다.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
‘백범 김구 현상금 60만원(현 200억)!’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
임정요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사람은 중국인 주푸청
주푸청은 현상금 200억 대신 김구를 선택했다.
그들이 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이라는 대장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정부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해외독립운동가 발굴 및 그 후손들 포상을 추진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해외독립유공자들부터 발굴하고 찾아야 할 상황 아닌가요?
“그렇죠. 멕시코 심지어 쿠바까지 몇 분은 독립유공자 포상이 이루어졌죠.
폭넓게 외국에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우리는 너무 일국사에만 묻혀서 국내나 중국 정도로만 이야기하는데, 당시 움직였던 움직임을 보면 장인환, 전명운선생이 스티븐스를 암살하고 장인환선생이 연해주로 가게 되는 이런 네크워크들이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운동지구를 만든다든지, 1910년대에 네트워크 조직들이 있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세계정세 속에서 독립운동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임천택 1903.03.19.~1982.09.06.:
1921년 쿠바 이주, 대한인민국회 활동, 한글운동에 참여)
(호근덕 1889.02.10.~1975.03.12.
1921년 쿠바 마탄자스로 이주,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지원)
(장인환, 전명운 스티븐스 암살 1908.03.21.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 저격 사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면, 독립군의 활동영역을 보면 북중국 만주, 러시아 일대까지 뻗어 있습니다.
해외독립운동가 발굴은 아직도 더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은데
/2019.03.04. 해외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 모두발언
1919년 3월부터 5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가득했습니다.
100년 전, 선조들의 만세운동은 민족의 독립과 함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를 향한 거대한 항쟁이었습니다.
그 항생을 이끈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고, 후손을 찾아 제대로 예우하는 일은 국가의 책무입니다.
정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독립유공자들의 뜻과 정신이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 함께 잘 사는 나라로 열매 맺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 선조의 희생과 헌신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벌써 70년이나 지났는데...’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대우조차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정서가 일부 있는 거 같아요.
독립유공자 후손 포상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으십니까?
“저는 독립유공자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당연히 독립유공자에 대한 보호 후손들에게도 국가가 보호를 해줬어야죠.
목숨을 초계같이 버리시고 풍찬노숙하며 활동하신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 대한민국이 오늘날 있는 게 아닌가요?
우리가 서로공존, 공생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적으로 국가가 나서서 후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하나의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예, 바쁘신데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관심, 감사, 존경을 표현하는 것을 인사라고 합니다.
인사, 사람의 일이라는 뜻이고, 사람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남의 나라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면서 도와준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간직하고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
그것이 인간의 기본 도리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인간의 도리를 조금은 소홀해 하지 않았는지, 다시 반성해보는 그런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네, 유트브 댓글을 통해서 ‘인식이 확장되는 기회다’ 등의 응원 댓글을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KTV 유튜브를 통해 계속 만나 뵙겠습니다.
전우용의 사담,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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