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셨나요? 우리가 이제 그~ 이렇게 법당에 모여서 부처님 법을 만나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 부처님의 복력을 구해서 그렇죠. 그죠. 부처님의 복력이라는 게 세상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부처님의 지혜력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죠. 이런 부처님의 위신력이 이걸 전체적으로 위신력이다.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그런데 이 모든 위신력이 어떻게 찾아야 되는가? 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거든요. 그냥 뭐든지 다 잘되고, 자기가 원하는 데로 잘 이루어지고, 마음이 너무 크고, 괴롭지 아니하는 상태에서 차츰 커져가는 세계의 삶을 살아가면 별 이유는 전혀 없으시거든요.
그런데 삶을 살면서 부딪치는 일들이 너무나 많잖아요. 사람이 살면서 계속 불편한 일이 생깁니다. 마음의 원치 않는 일들이 우리들 삶 속에 꾸역꾸역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하면 저 고통스러운 것은 없이 하게 하고,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이 풍요롭게 하고, 보다 많이 행복감을 많이 느낄 수 있도록 이렇게 하고자 하시고 마음을 원을 세운 분이 석가세존이시거든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런 사람이 겪는 고뇌나 고통은 다 우리들의 스스로의 마음속에 오류가 하나하나씩 깃들어 가기 시작할 때 고통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아미타경에서는 이걸 설명하기를 불설아미타경에서는 뭐라고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석가세존께서 이르기 시작해요.
사리불이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외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고통받고 있고, 고문받고 있고. 이렇게 하는 모든 일체 생명들에게 광명세계를 가르쳐줘요. 그러니까 불설아미타경에는 온갖 것이 불편한 것이 가득하게 있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부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게 불설아미타경을 빌어서 다시 설명을 드리면 23쪽에 위에 올라가면 사리불이여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그 두 번째 내용이 뭐냐 하면 西方世界서방세계 有無量壽佛유무량수불이 있어요. 서쪽에는 뭐가 있어요? 그죠? 저 서쪽에 서방세계. 서쪽 세계에는 있어요. 뭐가 있어요? 무량수불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얘기가 사람이 끊임없이 겪는 것 중에 안타까운 일들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그러면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 사람이 좀 뭐죠? 퇴보해가는 과정. 그런 고통을 참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힘들어하거든요. 젊은 사람들 그거 모릅니다. 병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병든 자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거를 젊은 사람도 반드시 시간이 지나고 인연이 따르면 뭐가 생긴다고요? 고통이 따른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젊을 때는 그거 불감증이라고 그래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그런 것들을 다 끌어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시죠? 그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석가세존이 석가세존께서 말씀이거든요. 저 서방세계에는 계세요. 누가 계세요? 무량수불이 거기 계시다는 거에요. 그 얘기는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사람, 이 법을 듣는 사람에게 당신에게는 이미 무량한 생명이 당신에게 깃들어있다. 이렇게 설명해주시는 거에요. 有無量壽佛유무량수불, 너무 쉽죠. 그죠. 그다음에 無量相佛무량상불이 있어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뭐죠? 부처님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게 언제부터요? 태어나기 이전부터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태어나서도 부처가 태어난 거에요. 불성이 거기 태어나신 거에요. 뭐를 빌어서? 부모를 빌어서.
이 현상세계에서 그걸 빌어서 같이 부딪혀서 하나의 상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우리의 모양이에요. 그런데 그 본질에 들어있는 무량한 저 부처님 같은 온화하고, 따뜻하고, 건강해 보이고, 또 행복감을 느껴 보이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세상에 왔는데, 그게 無量相佛무량수불이거든요. 한량없는 부처님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그게 누구라고요? 우리 자신이 그렇다는 얘기에요. 경전은 그렇게 지금 설명하고 계신 거에요. 그다음에 無量幢佛무량당불. 이렇게 돼 있습니다. 무량당불. 이건 깃발이라는 뜻이거든요. 당당하다는 뜻입니다. 언제든지 이겨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량당불이에요. 한량없이 이겨가는 생명체라는 거에요. 그렇게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 석가세존의 설법이 지금 이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결정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해요. 그걸 보고 大光佛대광불. 대광불. 이렇게 딱 외쳐줘요. 석가세존께서 뭐라고 설명하고 계시냐 하면 당신한테 마땅히 당당한 나아갈 길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고 나서 확실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大光佛대광불이에요. 그게 우리들의 전신이고 이게 우리들의 생활 그 자체가 사실은 대광명 속에 산다는 거에요. 그러고 한마디 더 해주세요. 뭐라고요? 그죠? 大光佛대광불 大明佛대명불. 크게 밝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본래 대광명인데 본래 대광이고 대명이거든. 크게 빛나고 크게 밝은 거거든요.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을 2500년 전에 당신이 체험한 이래고. 그러니까 깨우친 이래로 일체중생에게 그걸 설명하신 거에요.
다행스럽게도 불설아미타경을 통해서 근본 생명 속에 대광불과 대명불이 우리한테 깃들어져 있다는 거에요. 실제로. 그런데 왜 그렇게 안 되느냐? 본질을 이해 좀 해야 되는데, 만날 껍데기만 죽어라. 헤아리고 다니시는 거에요. 조금 부족한 것이 생기면 안달복달하고, 안 되는 일 생기면은 이겨가지를 못해요. 사람이 똑같은 사람 사람 사이에 감정이 뒤틀리고 마음이 상해지잖아요. 이겨가기 힘들어요. 그럴 때 우리는 뭘 해야 돼요? 나무아미타불 불러서 그러면 뭐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통이 그게 마귀라고 그러거든요. 나찰이라고 불교에서는 표현하잖아요. 그것이 다 없어져 버린다는 거에요. 결국은 자기가 좋아지게 돼요.
이런 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 석가세존이세요. 고타마싯달태자의 원동을 가지신 근본당체에요. 놀라운 것을 한 번씩 봅니다. 그다음에 분명하게 설명해요. 그게 뭐라고 그러냐 하면 다 외우려면 다 힘들거든요. 지금부터 저랑 같이 초등학교학생이다 생각하고 같이 조금씩 정리를 합니다. 나는 먼저부터 해야 돼요. 나는 본래 없거든요. 본래 나는 무자승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철저히 가르쳐주는 게 무아를 가르치거든요.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은 내가 있잖아요. 현재 의식도 있고, 잠재의식도 있고, 과거 전생의식도 있고. 그렇거든요. 미래세는 정해진 것이 없어요. 사주가 어떤 것이 사주팔자가 어떤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정해놓은 것이 아니에요.
사주는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어요. 자기가. 관상도 지금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있고요. 자기 뭐죠? 운명도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는 거에요. 너무나 다행스럽잖아요. 만일 그게 꼭 정해졌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내가 몇 살 살다가 감옥에 가야 된다. 이렇게 정해져 있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 [나는 광명 속에 사는 불성이다.] 이게 大明佛대광명이에요. 너무 쉽죠. 그죠. 다음에. [나는 크게 밝은 불성의 존재이다.] 너무 쉽죠. 그죠. 하여튼 쉬워요. 이게. 불교가 어려운 게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모양새나 형태가 자꾸 규칙이나 이런 틀이 문화가 원체 오래되다 보니까. 그러나 본질을 봐야 되요. 껍데기를 보시면 안 돼. 자기가 본래 몇 번을 설명하고 있어요. 지금. 같은 얘기가 같이 설명하고 있어요. 이 짧은 경전 안에도.
핵심이 그게 뭐예요? 실상불이라는 거에요. 껍데기가 아닌 실상. 실상세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미타부처님의 실체가 곧 실상불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실체불이라는 거에요. 정말로 자기가 느끼는. 실체인 자기 삶을 느끼는 것. 그렇죠. 그죠. 그래서 이거를 대광명이라고 그러고, 대광이라 그러고, 대명이라고 그러고. 실상불이라고 그래요. 나의 생명은 실상불이에요. 이 실상이란 말 알죠. 실제로 있다는 거에요. 실제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기도하면서 자기가 죽는 거는 알지만, 자기가 영원불멸한 생명존재의식이 있는 가득한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은 잊어버리고 살아요.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 육체 껍데기만 자꾸 보니까.
그런데 그 안에, 자기 안에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 생명 자체가 영원하다는 것을 이걸 체험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걸 통각을 느껴야, 고통스러운 것을 느껴야만이 그때 내가 죽는 줄을 알고, 육체가 죽는 줄을 아는 거에요. 하나 더 뭐라고 설명 하느냐 하면 청정 淨光佛정광불이야. 정광불이라고 그래. 정광불. 우리한테 깨끗한 광명이 깃들어 있다는 거에요. 그 잘못된, 잘못된 인식에 대한 답만 내려놓으면 착각을 내려놓으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에게 깃들어있는 그 광명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그것이 자제하고 스스로 스스로 사용할 만큼 그렇게 드러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픈 걸 좋아해요? 아니면 즐거운 게 좋아요? 즐거운 게 좋죠.
이거는요. 더하고 이것저것 빼고 딱 바로 설명하면 즐거워야 되요. 행복하게 살아야 되요. 귀하게 자기를 느끼고 사셔야 돼. 그렇죠. 그죠. 그거를 우리는 불교식으로 얘기하면 이걸 樂락이라고 그러잖아요.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지극히 즐거운 것을 極樂극락이라고 말하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이런 세계에 깃든 것을 깨우치는 것. 이걸 지각이라고 그러거든요. 이거를 깨우치는 거에요. 이걸 안다는 뜻이거든요. 깨우친다. 뭐라고요? 나한테 이게 나라고 하는 것이 있죠. 나라는 것이 지극히 즐거운 것이 있다는 거에요. 그럼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뭐에요? 불성이거든요.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불성이 세상에 더 좋은 게 없는 거에요. 그 불성세계가 곧 나 자신이라고 말하거든요.
아까 경전 안에 23쪽 내려오는데 읽어보면 실상불이라는 거에요. 나는 곧 실상불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택하기를 이렇게 보통 삶에 이게 다 느낌이라고 말하면, 이게 다 느낌이라고 그러면, 이거는 병이라는 覺각이에요. 통증이라고 그러거든요. 통증이라고 그래요. 이 병들어가는 이런 통증을 느끼는 것. 또 뭐죠? 인생의 괴로운 것. 재정적인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이 다 뭐죠? 고통이라는 것이 수*을 통증을 자꾸 하고 살아요. 이게 우리가 사는 거에요.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살아요. 크든 작든 크든 이렇게 자꾸 느껴가는 거에요. 그걸 보고 통증.^^ 통증 크리닉이라고 하는데 가 보면은 고통을 일단 없애야 뭐가 해결이 된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핵심은요. 고통을 먼저 뽑는 거에요.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될 건가? 저 우주는 어떻게 됐는가? 별이 저게 얼마나 큰가? 이런 걸 구하지 말고, 그 진리를 구하기 전에 당신 안에 고통스러운 그거부터 먼저 뽑으라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화살의 비유 다 아시죠? 화살이 날아와서 받았어요. 그런데 이걸 빨리 뽑고 치유를 해야 이게 살 거 아니에요. 독화살이라면. 어떤 사람이 와서 물어요. 이게 어느 놈이 쐈는지. 독은 어떤 건지. 또 어느 패에서 나한테 공격을 했는지. 이런 걸 하다 보면은 그 치료하기 전에 먼저 죽어버린다는 거에요. 부처님은 굉장히 현실적이셨거든요. 중생의 이득에 먼저 있지. 그렇게 설명을 하고 계신 거에요.
그래서 사람이 살면서 이게 우리가 말하는 生苦생고 이런 게 있잖아요. 그다음에 노병사 이런 것이 있죠. 이게 끊임없이 끊임없이 이런 둘레 속에 크고 작은 것이 이렇게 쭉~ 쌓여있어요. 그러면 아미타경을 공부하고, 아미타불 염불공부를 하고, 수행해가는 목적은 뭐냐 그러면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사는 것은 전부 병들 수도 있고, 재정적인 문제도 결핍 받아서 힘들 수도 있고, 어려운 일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살거든요. 그런데 일반적인 의식은 우리가 말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일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일반적인 기도를 하는, 일반 기도인들은 그런 분들은 요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설명을 하는 거에요.
재산 늘려야지. 늘려야지 이런 사람. 이 병 나아야지. 이 병 나아야지. 병 나으려고 ‘이 병 나아야지.’ ‘이 병 나아야지’ 그러면 이 병에서 마음을 놓지 않는 순간은 계속 병이 자기한테 있는 거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가난에서 매달려있으면 안 돼요. 그 통증이 내가 가난한 것이 통증으로 가슴에 증*로 늘려야 되거든요. 그래서 석가세존의 가르침이 뭐라고 설명이 돼 있느냐 그러면, 높은 걸 보는 거에요. 뭐라고요? 즐거운 것을 봐야 되요. 즐겁게 살아야 즐거운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지금 병원에 누워서 통증이 여기저기 생겨요. 그 통증을 일단 없애야, 통증이 자기한테 없어야만이 다른 것도 치료가 되고, 다른 것도 회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겠죠. 그죠? 아니어도 하여튼 그래요. 제 생각이 아니고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줬어요.
이걸 보면요. 그러면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아프다라고 하는 고통을 끌어안고 있으면 치유가 돼요? 안 돼요? 치유하는데 더 힘들어요. 그러니까 이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통증을 제거시키는 약이나 주사나 이런 걸로 치유를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통증을 순화시켜가면서 나머지 병든 거, 가난해지는 거, 불행해지는 거, 안 되는 일을 좋게 만드는 일들을 하게 할 때는 뭐가 있어야 되요? 즐거워야 된다는 거에요. 극락이라는 게 뭐에요? 즐거움과 기쁨 아니에요? 이것을 생활 속에서 가져야 되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수행하고 기도하고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거 지금 바꿔야 되고, 노병사 지금 바꿔야 되고, 뽑는 게 맞아요.
그러나 이거 병, 이 병 치료하면은 감기병 나으면은 몸살 또 따라다니고, 폐 고치면 장 고쳐야 되고. 이건 끊임없이 생기는 거에요. 이거를 요 밑을 보고 뭐라고 그러냐 하면 이것을 윤회적 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 되시죠? 그죠? 윤회적 생활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아미타경이 나무아미타불 기도가 왜 위대하냐? 그러면 극락을 얘기하는 거에요. 딱 한마디. 즐거운 거. 기뻐할 줄 아는 거. 딱딱 나와요. 그러시죠? 그죠? 세상에 가장 시원찮은 강사가 강조하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게 이 병을 고치려면 아픔을 일단 순화시켜야 돼. 그러려면은 그 아픈 거, 그러니까 지금 안 되는 일, 힘든 일, 고생스러운 이런 게 있잖아요. 일단 젖혀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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