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名無相무명무상. 그러면 그것이 뭐냐? 움직이면서도 근본으로 보면 안 움직인 거고. 안 움직인 거면서도 또 움직인 건데. 그것을 뭐라 그러냐? 無名無相絶一切무명무상절일체라. 뭐라고 이름 지을 수가 없다. 그게 무명이에요. 이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려낼 수가 없어 그게 無相무상이다. 이게 붉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고,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이름 지을 수 없고 모양을 그릴 수가 없어서, 絶一切절일체라. 어떠한 이름이나 어떠한 모양도 딱 들어맞는 게 없어. 일체가 다 끊어졌다. 그려낼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게 絶一切절일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느냐?
證智所知증지소지요 非餘境비어경이라. 증득한 지혜, 체험된 지혜, 그게 證智증지입니다. 깨달은 지혜. 이 깨닫고 삼매에 들면은 생각이 변해서 지혜가 되요. 우리는 생각으로 살아가는데. 공부를 많이 하면 지혜로 살아가요. 생각이라고 하는 건 엉뚱해요. 좋은 사람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을 좋게 생각할 수도 있고, 아주 이상합니다. 그런데 지혜라고 하는 건 좋은 건 좋게 딱 보여요. 보는 게 지혜에요. 나쁜 건 나쁘게 딱 보이고.
그러니까 이 지혜는 미리 생각하지를 않아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딱 보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가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아주 자유자재 적제적소에 잘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생각이 앞서면 뭐가 앞에 나타나도 생각 때문에 멍하니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전차에 받치기도 하고 그래요. 이게 생각은 현상을 오히려 가로막는 겁니다. 아주 이상하다.
현상은 많이 변했는데 그걸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생각에 빠져있으면 안 맞아요. 금년 대학 입시시험에 문화지체현상이라는게 있었는데. 가령 옛날에 없던 놀이가 전자오락이라든지, 이런 놀이가 많이 개발이 됐는데, 그 놀이를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다. 골프 치는 것도 옛날에 없던 거거든요. 골프도 못치고. 크게 보면 운전도 되는데 운전도 못하고, 여러 가지 놀이. 화투를 쳐도 옛날에는 민화투라 그래가지고 간단한데, 요즘은 고스톱도 어느 시 고스톱, 어느 시 고스톱해서 희한하고. 이런 게 많단 말이지.
그러니까 ‘개발은 됐는데 못 배워서 못하는 것을 보고 뭐라 그러느냐?’ 이게 문제에요. 정답이 뭔고 하니까 ‘문화지체현상이다.’ 문화가 이만큼 개발됐는데 내가 못 따라가서 지체가 되는 거에요. (더딜 遲지, 막힐 滯체). 문화遲滯지체현상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지체현상이라는 게 있는데, 부인은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 때의 부인 모습이 아니고, 지금 많이 개발되고 변화되어진 부인하고 사는데, 그 부인에 대한 생각은 옛날 부인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가지고 변화되어진 부인을 못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부인들이 뭐라뭐라고 하면 까불지 마라 그러고, 또 뭐라뭐라 그러면 손 올라가고. 이런 게 남편지체현상이다.
부인은 저만큼 컸는데 남편이 지체해가지고 못 따라 가. 그런가 하면 자녀지체현상.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 만큼 가 있는데, 만날 어릴 때 품에 안고 그 보호하던 그때만 생각해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어째라. 말 안 듣죠. 해 봐야. 일찍 들어와라 한다고 일찍 들어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 그래서 뭘 못 따라 가는 게 있어요. 그럼 왜 못 따라 가겠는가? 근본적으로. 생각에 억매여 있고 지혜가 안 나타나서 그런 거예요.
그럼 지혜가 있으면 어찌 되는가? 탁 보면은 과거건 생각을 안 하고, 현재 것을 능동적으로 처리를 하는 게 이게 지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꼭 생각을 하게 되요. 어릴 때 세월은 이미 가 버렸는데 어릴 때 생각 자꾸 하고 있어요. 이게 아주 지체현상으로서 묘한 겁니다. 생각은 소용없는 거다. 현재에 어떠냐? 그 현재에 알맞게끔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화엄법성에 대한 내용도 생각을 가지곤 안 보이는 거예요. 이렇다 저렇다 아무리 해봐야, 생각을 가지곤 안 보인다. 논리라는 건 뭐냐? 논리라고 하는 건 생각을 정리해 놓은 것이 논리에요. 생각을 정리하면 논리가 되요. 그런데 논리는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뭐냐? 지혜로서 발견되어진 세계다.
그게 중요해요. 논리는 맞는데 현실은 안 맞는 게 그게 차이점이 그거에요. 지혜로 보면 보이는데 생각으로 따지니까 이게 들어오지를 않아. 그래서 논리하고 지혜하고는 다르다. 진리는 지혜로서 깨달아 지는 것이지 생각으로 알아지는 건 아니다하는 문제가 있죠.
그래서 여기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어경이라는 거에요.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을 무엇으로 아느냐? 증득한 지혜. 깨달은 지혜로서 알 수 있는 내용이지. 이게 所知소지다. 證智증지로서 알바요. 알 수 있는 내용이요. 非餘境비어경이라. 다른 방법은 안 통한다. 이게 非餘境비어경이다. 나머지 경계가 아니다. 이 말은 다른 방법으로는 안 통한다 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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