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 법문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옛날에 큰 스님들께서 나에 대한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나하고, 다르게 말씀을 하셨죠. 우리가 보통 나를 부를 때, ‘누구세요?’ 그러면 ‘아무갭니다.’ 그건 명칭 我아입니다. 명칭, 단순히 명칭이죠. 누구세요? 그러면 아무갭니다. 이름 대거든요. 그 이름이라고 그러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 자기를 알리려고 만든 거에요. 그 이름 名명자를 보면 저녁이라고 하는 (저녁 석) 밑에 (입 구)자 거든요. 저녁은 안 보이는 시간에요. 얼굴이 안보이니까 사람이 왔는데 누군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누구냐? 그러면 이름을 대면 안단 말이에요. 명칭가지고 살죠. 평생.
그리고 누구세요? 그러면은 수도검침 나왔습니다. 누구세요? 그러면 택배입니다. 누구세요? 편지 왔습니다. 이게 역할 我아에요. 我아는 편지, 배달하는 사람이다. 수도 검침하는 사람이다. 택배 가지고 온 사람이다. 누구세요? 하면 앞집인데요. 이렇게.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는 누구의 아버지다. 나는 누구의 아들이다. 나는 누구의 남편이다. 이렇게 아들, 아버지, 남편 이런 걸로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순전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는 거죠. 아버지 없으면 아들 안 될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없으면 아들 안 될거 아니에요.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식이 되는 그런 나입니다.
그런데 옛날 큰스님들이 나에 대해서 자꾸 말씀하신 것은 그런 게 아니고, ‘니가 나를 보느냐?’ 이래 묻거든요? 봅니다. 그러면 ‘뭐가 보느냐?’ ‘눈이 봅니다.’ 그러면 ‘금방 죽은 사람이 산사람하고 눈이 같느냐? 다르느냐?’ 하고 물어요. ‘금방 죽은 사람은 산 사람하고 같습니다.’ ‘금방 죽은 사람이 보느냐?’ ‘못봅니다.’ ‘왜 눈이 똑같은데 못보노?’ 이렇게 법문을 해요. 그게 나에 대하 법문이에요. ‘그럼 눈이 보는게 아니지 않냐?’ ‘그럼 눈이 안보고 뭐가 봅니까?’ ‘그 보는 놈이 뭔지 그걸 찾아라.’
통도사 경봉 큰스님이 법문하실 때 ‘내가 며칠 전에 부산에 가서 택시를 탔는데, 그 택시 운전수한테 내가 법문했다.’ 옛날에는 기사님이 아니라 전부 운전수요 운전수. 그 운전수가 기사로 바뀐지가 그렇게 오래 안 돼요. 70년대 뒤에 바뀐거 같에요. 그래서 ‘어떻게 법문 하셨습니까?’ ‘택시를 턱 탔는데 내가 운전수 한테 한말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이 보시오. 운전수 양반. 내가 할 말이 있소.’ ‘뭔 말씀이신데요?’ ‘이 자동차가 운전수가 운전을 안하면 못가지.’ ‘그렇죠.’ ‘그럼 운전수양반의 운전수는 누구요? 내가 그렇게 법문했다.’ 이게 나에 대한 법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자동차는 운전수가 운전안하면 못간다 이거지. 그리고 운전수 양반의 운전수는 누구냐? 그 법문이란 말입니다. 운전수 양반이 뭐라고 대답을 했겠어요? 대답할 수가 없지.
길가는 나그네가 남의 집에 가서 하룻저녁을 자고 가도 그 이튿날 갈 적에 주인을 안 찾아보고 가면 무례한 사람이다. 아주 예의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이 몸을 가지고 평생을 살면서 이 몸의 주인이 누군지 안 찾아보고 죽는다. 그렇게 무례하고 살 수가 있나? 이런게 나에 대한 법문이에요. 참 심오하긴 한데. 어렵죠? 뭔 말인지. 그래서 오늘은 이런 나에 대한 법문을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첫째 나는 누구냐? 첫 번째 나는 ‘나는 生滅생멸이다.’ 나라는 건 낫다 죽는 거에요. 생멸이에요. 생멸은 뭐냐? 생일날 태어나서 제삿날, 제삿날은 어떻게 되는 날이에요? 우리는 생일날은 있는데 아직까지는 제삿날은 없는 거에요. 이 동아시아에는 생일날 보다 제삿날을 중시 여깁니다. 생일날은 모릅니다.
우리 할아버지 몇 대조가 생일이 언제인지 족보를 봐야 알지 그냥은 몰라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生離百年생이백년이요, 死後千年사후천년이라. 살아서는 백년이 안 되지만 죽어서는 천년을 간다. 그게 인생관이에요. 그래서 이 죽을 때 어떻게 죽는가? 그게 굉장히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우리 자신도 제삿날이 언제 돌아올지, 이거는 기약이 없어요. 이게 생멸입니다. 그런데 생멸은 무상하다. 無常무상은 뭐냐? 生老病死생로병사다. 우리 나는 첫째 생노병사하는 나를 가지고 있는 거죠. 생노병사는 무상한거죠.
그래서 열반경에 무슨 말씀이 있느냐 하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일체의 모든 세간은 난 것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一切諸世間일체제세간 生者皆歸死생자개귀사. 다 죽는데로 돌아간다. 왕성함은 반드시 쇠태하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夫盛必有衰부성필유쇠 合會有別離합회유별이. 왕성한 것은 다 쇠퇴해 버려요. 또 만난 이는 헤어져요. 그런데 지금 만나서 잘 지내는 사람은 헤어지는 거에요. 또 지금 뭐 왕성한 것은 나중에 쇠퇴해 버리는 거에요. 이게 생멸법입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소멸한다. 수명도 또한 그러하다. 一切皆遷滅일체개천멸 壽命亦如是수명역여시. 이게 생멸하죠. 그래서 나는 첫째로 생멸이다. 생멸은 무상하다. 항상함이 없죠. 무상은 생노병사다.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거에요.
두 번째 나는 ‘나는 五蘊오온이다.’ 색수상행식. 색은 지수화풍 넷이고, 수상행식은 우리 생각, 정신작용인데 수상행, 요거는 심소, 마음의 신하에 해당되는거구요. 식은 팔식인데 심왕이에요. 수상행식은 심소고, 소라는 얘기는 바소자. 장소조자 인데, 늘 따라다닌다 이 소리에요. 따라다녀요. 그래서 왕이 가면 신하가 가는 거와 같이 따라 다닌다. 팔식은 그건 심왕이다. 그래서 식은 심왕이과, 수,상,행 3개는 심소가 돼서 요거는 생각, 정신이다 이 말이죠. 이게 오온인데.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실행하실 때에> 반야가 문자반야가 있고, 관조반야가 있고, 실상반야가 있는데. 문자는 기록으로 남겨 놓은게 문자고, 관조는 마음으로 살펴 보는게 관조죠. 실상반야가 있어요. 실상의 세계. 실상이 있는데 그 실상반야, 깊은 실상반야를 실행하실 때에 뭐를 봤는가? <조견오온개공>하고, 오온, 색수항행식이 다 공함을 조견이라. 우리말로 하면 꿰뚫어 본다. 꿰뚫어 보는게 뭐냐? 얼음을 얼음으로 보지 않고 물로 본다 이 소리죠. 이게 꿰뚫어 보는겁니다. 사람을 볼 때 태어나는걸 보되 태어나는 것만 보지 않고 죽는거 까지 본다. 이 꿰뚫어 보는 거에요.
만나는걸 보되 만나는 것만 보지 않고 헤어지는 것 까지 본다. 생일날만 보지 않고 제삿날까지 본다. 이게 꿰뚫어 보는 거죠. 그런데 오온을 꿰뚫어 보면 다 공하다. 그런데 중생이 왜 고통을 느끼는가? 이 오온이 공함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고통이 온다 이 말이죠. 오온이 공함을 보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게 <도일체고액>이거든요. 일체고액에서 벗어난다. 그러면 오온이 공하다는 공하다는 의미는 뭐냐? <사리자여, 제법공상>은 제법은 오온법이거든요. 오온법이 공한 내용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이게 공상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내용은 불생불멸이다. 그런데 우리는 유생유멸이 거든요. 불생불멸이 아니라. 생일날이 있으면 낳다는거 아니에요 제삿날이 있으면 죽는다는거 아니에요. 우리가 느끼는건 유생유멸인데, 반야에 있어서 실상반야를 실행하게 되면 유생유멸에서 불생불멸을 꿰뚫어 보는 거에요. 이게 조견이에요.
또 우리가 볼 때는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죠. 그런데 공상에는 불구부정이다.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우리가 볼 때는 유증유감인데, 불어나는 것도 있고 줄어드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데 실상반야를 떡~ 보게 되면, 불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이것이 두 번째 나는 누군가? 나는 오온이다. 오온은 뭐냐? 공상이다. 오온개공이라 그랬잖아요. 그리고 공상은 뭐냐? 불생불멸이다. 이게 두 번째 나에요.
첫 번째 나는 생노병사다. 두 번째 나는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 이게 뭐냐? 이 불생불멸, 뭐가 불생불멸인가? 이 세상에 말로, 생각으로는 불생불멸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불생불멸이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 ‘불생~’ 말이 생겼잖아요. 글자는 불생인데 벌써 말을 했다라면 ‘불생~’ 하면 말이 생긴 거잖아요. 불생 아니잖아요. 어떤 말이든지 조금 있으면 사라지잖아요. 이거 불멸 아니잖아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일으켜도 불생불멸이 아니라 불구부정 아니라 무슨 생각을 일으켜도, 한 생각이 떡~ 일어난 이상, 그건 불생불멸이 아닌 거예요. 이걸 알아야 되요. 이게 공부에요.
불생불멸을 말로 하고, 생각으로 하고, 행동으로 한다. 아니에요. 행동하나 일어나면 벌써 생긴 거잖아요. 사라지면 사라진 거잖아요. 그래서 이거는 자기 집에 들어가는 열쇠와 같습니다. 이거는 개념이 아니고 설명이 아니고 열쇠다. 저 길가는 나그네한테 딱~ 이렇게 방향을 지시해주는 표지판과 같아요. 그래서 이 불생불멸 속에 내가 탁~ 들어갈 때 그게 불생불멸이지. 소용도 없어요. ‘불생이다’라고 한 생각 일으키면, 벌써 한 생각이 일어났는데 어째서 불생이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생멸 그 말과 생각으로, 생멸심원으로 마음과 생각으로, 불생불멸을 논하면 천만년을 논해도 불생불멸에 못 들어 간다.
왜냐하면 심원 자체가, 생각과 말 자체가 생멸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거는 개념도 아니고 언어도 아니고 열쇠다.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다. 열쇠는 열고 들어가야 열쇠가 소용있는 거지. 그 만나 가지고 열쇠 구조, 열쇠 용도, 설명해 봤댔자 방에는 안 들어 간 거거든요. 이게 부처님 법이에요. 달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손가락을 아무리 잘 알아도 그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 의미가 있는 거지, 손가락만 안다고 달은 아니진 않습니까? 이거하고 똑 같애요.
그래서 누가 불생불멸을 체험을 했는가? 바로 실상반야에 들어가야 된다. 실상반야에 들어갔을 때 그게 불생불멸이지, 말과 생각으로 하면 생각이 하나 일어나도 불생불멸이라는 생각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그것도 생각이에요. 어떤 생각을 일으켰어도 그 생각이니까, 생각과 말로는 불생불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거죠. 그런데 이건 손가락이고 열쇠다. 열쇠는 열어야 되고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 의미가 있다 이말이죠. 불생불멸에 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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