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 스님을 가만 한 번 보세요. 이 중이 남을 위로하는 말 같은 거 하게 생겼어요? 안 생겼어요? 예? 안 생겼죠? 바른말만 하지, 위로 같은 건 잘 안 합니다. 그러니까 위로의 말을 해 달라. 그런데 위로의 말은 내가 할 수가 없고, 진실만 말하는 거요. 그게 뭐 가슴이 아프면 아프고, 일부러 거짓말 해가지고 얼버무리는 얘기는 할 필요가 없다. 진실을 그대로 한 번 얘기해 볼게요.
얼마 전에 여러분들 미얀마에서 태풍이 불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 10만명정도 죽었다. 이런 기사 본 적 있어요? 그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죽은 사람들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가지고, 저 미얀마에 태어나서 죽게 됐습니까? 저 북한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가지고, 저 북한에서 태어나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까? 이거를 불교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불교에는 이렇게 가르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얘기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겁니까? 그거는 힌두교 논리입니다. 불교 아니에요. 불교가 인도에서부터 오다보니까 힌두교하고 불교하고 섞여가지고, 불교 아닌걸 지금 불교라고 알고 있어요. 부처님은 미얀마에 태풍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많은 재산상 피해를 입었다. 이럴 때 ‘아~ 이 사람들이 왜 죽게 됐느냐?’ ‘아~ 전생에 이렇게 죄가 많아 죽게 됐다’ 이런 말을 한적이 없어요.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거냐?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살기 바쁘다. 그러나 이런 불의의 사고로 이렇게 어려움을 처한 사람들이 생길 때는, 내 삶이 바쁘더라도 조금씩 내 재산이나 내 힘을 내 놔 가지고, 그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라. 이렇게 가리킨 게 뭐다? 불교입니다. 이해 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이걸 자비라 그래요. 그럼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셨죠? 귀가 안 들린다. 눈이 안 보인다. 팔이나 다리에 장애가 있다. 이거는 죄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건 그냥 하나의 사고. 사고를 당해서 팔이 부러졌으면 하나의 사고고. 다시 말하면 유전적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유전적인 문제고.
그 다음에 유전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청각장애나 시각장애나 지체부자유아가 있다. 유전적으로 문제가 없는데. 그럼 이건 엄마 탓이에요. 엄마가 애기가 뱃속에 있을 때, 굉장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러분들 밥 먹고 굉장히 화가 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소화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위장장애가 오듯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초기 애기가 생겼을 때 얼마 안돼서. 다시 말하면 두 달 안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신경으로 인해서 이 육근에 장애가 옵니다. 그래서 발행하는 문제들이에요. 그래서 이건 죄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냥 사고일 뿐이에요.
그럼 이런 장애가 생겼을 때, 이 장애가 생기면 이거는 열등한 거에요. 불편한 거에요? 불편한 겁니다. 이게 열등하다. 신체장애는 열등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내가 죽든지 남을 죽여야 됩니다. 내가 죽어버리든지. 잘 난 적을 죽여버리던지. 이거는 파괴적 행동이 나온다. 불편하다. 팔이 없어서 불편하다. 그러면 연구를 하게 됩니다. 의족을 해 넣으면 편리하게 만들고. 두 다리가 없으면 휠체어를 만들면 어때요? 편리하게 되겠죠. 그러니까 청각장애가 불편하다 하면, 앞으로 자꾸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청각을 대신할 뭘 만들게 되고, 시각장애다 하면 시각을 대신할 것을 자꾸 만들게 되요. 그래서 얼마 안 있으면 청각장애는 다른 기구를 이용해서 더 잘 들리도록, 우리 보통 귀보다 더 잘 들리는 기구가 곧 나올 거고, 그 다음에 시각장애는 전자 눈이 나와가지고, 앞으로 우리 눈 보다 더 좋은 눈을 갖게 될 거요. 그러니까 이것은 다만 불편하다 할 때는 개발하게 된다. 편리를 위해서 개발하게 된다. 이런 얘기요.
옛날에는 남자는 힘이 있으니까 우월하고. 여성은 힘이 없으니까 열등했어요. 그런데 남녀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에요. 오늘 날 기계가 발달하면, 이게 덩치 크고 힘이 별로 필요합니까 안 합니까? 안 하죠. 땅 파는데 곡괭이 갖고 하면 힘있는 남자가 필요 하지만은, 포크레인 운전하는 데는 여자나 남자나 같애요 달라요? 똑같지. 그래서 이 세상은 서로 다를 뿐이지, 우월하거나 열등한 건 본래 없다. 이게 부처님의 공사상이에요.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오. 부증불감이다라고 하는 사상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남녀의 우월성도 버려야 되고. 신체건강과 장애에 대한 우월 열등도 버려야 된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그러니 어린아이는 누가 돌봐야 됩니까? 어른이 돌봐야 되고. 노인은 누가 돌봐야 됩니까? 젊은이가 돌봐야 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누가 가르쳐야 됩니까? 배운 사람이 가르쳐야 되고. 신체 장애에 의해서 불편하면 건강한 사람이 보살펴야 되고. 또 그걸 개발해서 편리하도록 만들어 줘야 됩니다.
옛날에는 부모 없는 고아들이 있으면 이거를 천시했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는 뭐요? 그들을 모아서 보살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입양을 시켜서 보통사람하고 똑같이 가정을 갖고 살도록 만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고아원은 없어집니다. 옛날에는 신체장애가 있으면 천시했습니다.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중간단계에서는 신체장애자 들을 모아서 보살폈습니다. 지금은 신체 장애도 정상인과 똑같이 생활하도록 만듦니다. 다시 말하면 신호등도 소리 나는 걸로 만들고. 휠체어가 오르도록 슬립을 만들어서 해결을 하고. 모든 것이 다 정상화 되어간다. 이것이 문명의 진보다. 그러니 청각장애 여러분들은 전생의 죄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면 장애인들이 성격이 조금 왜곡된 면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신체장애 때문에 성격이 왜곡되는 게 아니라 신체장애자를 부모부터 ‘아이고 장애다’라고 그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성격적 왜곡이 생겼다. 그러니까 부모가 어떤 장애아를 낳게 되면, 평상시 사람보다 더 자신감을 갖고 키워야 됩니다. 불쌍하게 여겨버리면 어떻게 된다? 성격장애가 생긴다. 그래서 남으로부터 동정 받을 필요도 없고, 남으로부터 열등을 느낄 필요도 없다. 다만 귀가 들리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감 있게 살아야 된다. 이것을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거다. 일체 중생은 다 뭐가 될 품성이 있다? 부처가 될 품성이 있다. 일체 중생은 다 평등하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아 신체장애는 전생에 죄가 많아서 신체장애자가 됐다. 이거는 불교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논리다. 그런데 오늘 우리 불자들이 불교하고 관계없는 이런 것을 마치 불교인양 잘못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니 오늘 청각장애 계시는 분들. 이 시간부터 ‘아 이건 전생하고 아무 관계가 없구나.’ ‘청각장애가 있다고 내 인생에 털끝만큼도 잘못된 게 없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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