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무상사 절에 가야 되겠다. 아침에 생각을 이렇게 하고 오신 분들이 계시잖아요. 오늘 절에 가야 되겠다. 그것도 생각이 일어난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되겠다고 결심한 거에요. 그래서 결심을 하면은 행동이 일어나게 되죠. 행동. 행동이 똑같은 행동으로 반복이 되고 할 때, 습관이 만들어집니다. 똑같은 행동이 반복되는 거. 되풀이되는 게 이게 습관이에요. 사람마다 습관이 있어요. 습관. 습관이 이게 오래되면은 그 사람의 성격이 만들어져요. 사람 성격이 이게 습관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습관. 저 사람 성격이 어떻더라. 남을 얘기할 때 그런 말 쓰거든요. 그러면 그 성격에서 그 사람 습관도 같이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성격이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거에요. 한 생명의 운명이 결정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앞에 것을 소급해서 설명할 때 결국 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바로 이 대목에서도 사람이 죽이는 신업을 짓는 걸 말하는데 죽이는 행위, 훔치는 행위, 음행을 하는 행위, 또 구업을 가지고 하는 업을 거짓말 하나로서 다 묶어 말하는데, 망어. 이게 한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거요. 네. 이를 자세히 관찰하면은 왜 거짓말을 했는가? 왜 훔쳤는가? 행동을 왜 하게 되었는가? 그 근본자리를 행해서 자꾸 스스로 질문을 해 가면은 아무 대답이 안 나와요. 그런 걸 공해진다. 이렇게 말해요. 여기도 이를 자세히 관찰하면 일어나는 곳이 비어져 고요할 것이니, 고요해져 버린다. 이거요. 파악되는 게 없어.
그러니까 사람이 뭐 감정에 북받친 생각을 가지고 때로는 괴로워하기도 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안달을 한달까? 이런 경우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왜 이러는가? 자꾸 물어봐요. 이유가 없어요. 그냥 생각이 일어났으니까 그리되는 거요. 생각이 일어났으니까. 그래서 그 근본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비어 고요해진 것을 알아내면은 끊으려 할 것도 없다 이거요. 끊으려 할 거. 앞서 전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대승은 번뇌가 안 생기는 걸 열반이라 한다. 이런 말이 있었죠. 보통 번뇌는 끊어야 된다. 이래요. 번뇌는. 번뇌를 끊어야 된다는 말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 생각도 안 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사람이 어떻게 생각 없이 살 수 있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해야 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생각이 일어나되 그 생각이 무생임을 알면 된다는 거요. 무심해지면, 전 시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백화점에 가서 새로 나온 상품들을 많이 봤어요. 보는 즉시 견물생심이라고 마음에 든다, 사고 싶다. 이럴 때는 일종의 구매충동력이 일어난 상태인데, 이런 경우에는 그 상품 하나 본 것이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거요. 내 마음을 소유욕, 말하자면 갖고 싶어 하는 생각을 크게 일어나도록 하는 거에요. 그런데 봐도 무심해. 사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요. 새로 상품이 나왔나 보다. 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일어나는 경우와 아이고 저거 사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경우. 똑같이 물품을 봐도 심리상태가 다른 거에요.
그러면 봐도 무심하게 사고 싶은 생각이 안 일어났을 때는 이건 번뇌가 안 되는 거에요. 사고 싶어서, 아이고~ 내가 지금 지갑에 얼마나 돈이 있는가 열어보자. 부족하면 집에 당장 뛰어가서 돈을 가져올까. 그게 번뇌인 거에요. 그래서 번뇌를 끊는다는 것이 불교의 근본교리 설명에는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은 실제 무심해지면은 끊을 번뇌가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죽이고 훔치고 음행하고 거짓말을 한 내 업을 지은 행위가 있었는데 이걸 어디서 그 행위를 일으켰는가? 추구해 보면은 한 생각이 일어난 거에요. 그럼 왜 그 생각이 일어났는가? 왜 그 생각이 일어났는가? 이유가 없어. 답이 없어. 그 일어난 자리가 비어 고요해져 버리면 된다. 이거야.
천수경가운데도 참회게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罪無自性從心起죄무좌성종심기 시작되는 사구게가 있어요. 죄는 자체 성품이 없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일 뿐이라.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없어져 버리면 죄도 없어지는 거요. 마음이 없어지면 죄지을 일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과 죄가 둘 다 공해져버리면 이게 참된 참회다. 是卽名爲眞懺悔시즉명위진참회 하는 사구게, 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대목에서 설해놓은 법문의 뜻하고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선은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거에요. 마음이 어떤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 거에요. 마음이 경계에 현혹되면은 이거는 구속된 마음이오. 구속된 마음, 지배되는 마음이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라.
그래서 심지어 이 말이 처음 듣는 분들에게 이해가 안 되겠지마는 법구경 같은 초기경전의 중요한 말을 엮어놓은 경전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가지지 말고, 미워하는 것도 가지지 말아라. 이걸 달리 번역해가지고 사랑하는 것도 가지지 말고, 미워하는 것도 가지지 말아라. 이런 말이 있어요. 이 말은 무심히, 마음이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구속되지 않은 상태로 살아라.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마라 하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이러겠지. 하는 재미가 있는가 하면 안 하는 데도 재미가 있어요. 나는 술 담배 안 하거든. 안 하는 재미가 참 많더라니까. 안 해.
물론 뭐 인도 가가지고 하도 더워서 인도만큼 잠시 한 컵 마신 적도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무심히. 그러니까 우리는 뭔가 열심히 만나고 떠들고 뭐 이래서 오늘 신났다하죠. 가만히 좌선하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신나는 거에요. 신나는 게 없는 줄 알지. 그거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신나는 게 있어요. 내면적인 자기만족, 어떤 의미만족이 오거든요.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많이 가지면 가지는 그 즐거움에 도취되는 수도 있지마는, 또 버리면 버리는 즐거움도 있다니까. 이거 배우러 온 거에요. 지금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들 다 이런 걸 알아야 되요. 다음 장을 또 소개하겠습니다. 다음 장은 또 원각경이라는 경전에 나오는 중요한 말인데요. 34장인데.
환을 여의면 깨달음이다. 환을 여의면. 환이라는 게 옛날 요술쟁이들이 요술을 부려가지고 보여주는 게 있어요. 그걸 환이라 그러는 거에요. 헛것. 헛것이에요. 공화와 같은 거, 사람이 눈에 병이 생겼을 때 트라코마(trachoma)같은 눈병이 있습니다. 이 병이 생겼을 때는요, 이 허공을 쳐다보면 아물아물 헛것이 보여요. 그걸 공화라 그래요. 허공을 꽃에 비유해가지고 공화라 그런 겁니다. 한도 그와 같은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모두 환이다. 이걸 아라고 원각경에는 환. 환을 여의면 헛것이란 뜻입니다. 도깨비. 그런 게 환이에요. 한국 할 때 한이 아니고 (돌아올 환), 환, 있잖아요. 여기서는 헛것. 허깨비. 환인 줄을 알면은 그걸 떠나게 돼. 여의게 돼.
자~ 이런 경우가 있어요. 꿈을 꾸는 도중에도 선수행 같은 거 오래한사람들은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잠자다 꿈을 꾸면은 꿈이 현실처럼 실제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식이 맑아진 분들의 경우에는 꿈속에서 꿈을 알아요. 이거는 내가 자가다, 꿈은 꿈이다. 그런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꿈속에서 꿈을 알면은 가령 그 꿈이 악몽처럼 괴로운 장면이 나타났을 때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비유해서 보충설명을 할 수 있듯이 원각경의 보현장에 나오는 말을 소개하는데요. 환인 줄을 알면은 곧 여의게 되니, 달리 방편을 쓸 것이 없다. 이 말이오. 방편**
달리 이 걸해야 된다. 저걸 해야 된다. 우리 수행방법을 놓고 말할 땐 참선을 해야 된다. 염불을 해야 된다. 주력을 해야 된다. 할 말이 없다. 이거요. 그렇게 말할 것이. 그리고 다음 말이 환을 여의면 곧 깨닫는 거다. 환을 여의면은. 환이 떠나가면은 그게 깨달음. 깨달음을 어떻게 정의했느냐 하면은 그릇된 생각이 떠나가면 깨달음이다. 기실론에 이렇게 정의를 해 놨어. 해 놓은 구절이 있습니다. 심체이념즉각이라. 마음의 자체에 마음의 근본 자리에 망념이 없어져 버리면 그게 깨달음이라. 이 깨달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本覺眞心본각지심이라 합니다. 깨달음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는 있다는 거에요. 이것 잘 알아 두셔야 되는데.
깨달음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 깨달음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 깨달음의 본래 순수한 마음자리에 망념이 항상 들어와 앉아있다는 거에요. 이거 내쫓아 버리면 그대로 깨달음인데. 그래서 대승기실론에서는 심체에 마음자체, 마음자리에 망념은 번뇌, 망상 이런 거 다 들어가죠. 그릇된 생각, 이게 떠나가면 그 자리가 깨달음 자리다. 여기도 그와 같은 뜻이죠. 환을 여의면 곧 깨닫는 거다.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원각경 사구게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경 구절입니다. 이걸 해야 되고 저걸 해야 되고 수행하는 차제가 없다는 거에요. 이게 돈오사상, 그래서 원각경을 돈교라 합니다. 단박에 깨치는 이치를 설해놓은 경이다.
마음이란 환수를 부리는 사람이오, 요술쟁이다. 이 말이에요. 우리 몸은 환술의 성, 옛날 이 도시를 성이라고도 불렀지 않았습니까? 성곽이 있고. 세계는 환술의 옷이고, 이름과 형상은 환술의 밥이다. 비유를 쭉~ 드러나 갑니다. 그래서 환인 줄만 알면 되고, 알면은 그걸 떠나보내게 돼. 여의게 돼. 그러면 각을 회복할 수 있다. 원각진심자리고 돌아갈 수 있다. 깨달음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밝혀놓은 대목입니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따로 있는 것이. 말하자면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면은, 아까 비유로서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꿈 깨면은 잠 깬 상태의 깨달음이오. 흔히 이 비유를 자주 합니다.
중생은 생사의 대몽에 빠져있는 사람이고, 부처님은 그 꿈에서 깨어났다는 거에요. 꿈에서 깨어나면 몽경은 사라지는 거에요. 몽경에서 사라지는 거에요. 떠나는 거에요. 그런 비유. 옛날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의 시에도 그런 내용, 비슷한 시가 있어요. 大夢대몽을 誰先覺수선교오. 큰 꿈을 누가 먼저 깨어나는가? 평생 我自知아자지라. 평생 깨본 사람만 안다. 이 말이오. 초당에 春睡足춘수족하니 저 산속에 오두막채 하나 지어놓고 지냈거든요. 그 초당에서 낮에 봄잠을 실컷 자고 났더니 窓外창외 日遲遲일지지라. 창밖에 해가 뉘엿 뉘엿 저물고 있더라. 첫 구절이 대몽을 수선교. 그래서 꿈 깨란 얘기. 이게 불교에서 깨달음을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비유하면서 자주 하는 얘깁니다.
다음 오늘 마지막 중요한 말이 나오는 이 장, 말을 잘 들어보시죠. 생사는 공화와 같다. 생사. 나고 죽는 중생의 생사는 아까 한 얘기가 나왔습니다마는 허공의 꽃,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인데. 생사가 본래 없는데 생사를 본다. 우리는 이 인생이 굉장히 무거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생존의 무게라 할까. 살기 힘들다. 사실 살기 안 힘들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처럼 절에 와서 살아봐요. 세상에 편해요. 힘든 거 하나도 없어요. 욕심이 많아가지고 힘들지. 그렇잖아요. 전에 제가 아는 분이 사업에 실패해가지고 젊었어요. 40대인데. 자살을 했어요. 자살을. 울산 지역인가 어디. 그 얘기를 듣고 내가 반은 농담. 참 어리석다. 죽을 바에야 나처럼 출가해서 스님 돼서 도 한번 닦아 보지. 나는 우스개 삼아.
그러니까 내가 한 말은 가볍게 한 말이야. 가볍게. 죽은 사람은 얼마나 고민고민하다고 죽었겠어요. 인생을 뭐 그렇게 고민고민하면서 살아요. 자기 인생이 그만큼 무거우니까, 무거우니까, 그래서 세속적인 그런 입장에서 보면은 참 살기 힘들고 내 인생이 무거운 인생이다. 느껴지지마는 생각한 번 바꾸면 가벼워요. 새털보다 가벼워질 수 있어요. 여기서 가볍다는 것은 힘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돼요.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힘들다 힘들다. 힘들어도 또 마음이 크면은 가벼워질 수 있는 거죠. 생사가 눈병 났을 때 허공에 아물아물 나타나는 공화와 같다. 헛된 거다 이 말이오. 태어나는 것도 헛된 일이오, 죽는 일도 헛된 일이에요. 이 불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태어남이 없는 가운데에서 망령되이 허망되이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생사가 있고 열반이 있다. 중생의 경계에 부처님 경계에 구분해서 보는 것이 생사와 열반입니다. 마치 허공에 헛꽃이 아물거리는 것을 보는 거와 같다. 눈병 났을 때 허공에 헛것이 보이는 거와 같다. 없다는 거에요. 본래 나고 죽음이 없다. 본무생사. 아까 소개했죠. 화엄경 원문에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니까 전에 한번 말씀드렸습니까? 우리 언젠가 생애를 마칠 때 임종에 임했을 때 나는 안 죽는다. 이 생각 가지고 그렇게 임종을 맞이하시면 돼요. 생사가 없다 했으니까.
본래 또 없었던 거잖아요. 우리 태어나기 전에 내 몸이 있었습니까? 인연 따라 홀연히 왔다가 인연 따라 홀연히 또 떠나가게 돼 있어요. 그게 구름 한 조각 공중에 생겼다가 없어지는 거와 같다. 이 본무생사란 말, 화엄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에도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이 얘기도 원각경이란 경, 문수장에 보면은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생사가 없는 가운데에 무생가운데 허망 되게 생사를 본다는 거에요. 생사를 본다. 그래서 이 중생의 생사가 識心分別식심분별속에 자꾸 나타나는 것이 눈병 난 눈에 공화가 자꾸 공중에서 떨어지는 거와 같다. 이렇게 비유해서 말해놓은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사세요. 오늘 법문 들었으니까 이제 좀 고민고민 하지 말고, 고민하려고 이렇게 태어난 거 아니거든요. 좀 손해 봐도 그냥 초연해버리고, 좀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걸 아더매치라 하거든요. 아닙니다. 이거. 영어 아니에요. 우리말을 이렇게 여러 가지 합해서 그냥 줄인 말이에요. 그래도 초연히. 너무 현실에 민감해가지고 시시비비 이렇게 다 하고 살려면은 그게 힘든 거에요. 그게 내 자신의 삶을 무겁게 하는 거에요. 몸이 무거우면 저 길을 가기도 힘들잖아요. 등산 같은 거 할 때 몸이 무거우면은 올라가기가 힘듭니다. 몸이 가벼워야 길이 잘 걸어지면서 올라가기가 수월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새해부터는 내 인생을 내 생활을 좀 가볍게 하자. 경망스럽다 하는 뜻의 가벼운 것이 나이라 무게를 줄이자는 거에요. 요새 다이어트는 잘하면서 체중 좀 나가면은 전부, 아이고 나 웃겨. 실컷 또 먹을 때는 억수로 먹고 말이지. 얼마나 앞뒤가 안 맞아요. 굶으면 굶는 사람한테 무슨 살이 찔까 봐. 굶으면 살 안 찌는 거에요. 그런데 먹을 때 실컷 먹어서 살을 피둥피둥 찌어놓으니 운동해서 뺀다는 거에요. 그게 전부 망상이에요. 알고 보면은. 여담 삼아 한 얘깁니다. 올해는 희망찬 한 해가 되셔서 가벼운 생활을 해 가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다 돼서 오늘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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