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0회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추어라 (20:26)

Buddhastudy 2012. 2. 12. 22:52

  방송 보기: 불교TV

가세 잘하셨죠? . 올해는 불자님들의 가정에 불보살의 가호가 두루 비춰져서 만사가 뜻대로 잘 형통되어지기를 기원 드립니다. 불교의 수행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자성어가 전해지는 게 있습니다. 특히 참선수행에 있어서 이걸 해야 된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회광반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회광반조. 빛을 돌이켜서 반대로 비추라. 이런 뜻이죠. 글자대로 해석을 하자면 그런 뜻인데요. 우리가 눈이 항상 볼거리를 찾아가고 있다. 말할 수 있어요. 눈은 항상 뭐가 보이는가? 볼 대상을 행해 따라다니는 거에요. 귀는 소리, 가만히 앉아 있으면 소리가 들리잖아요. 그러면 귀, 이건이라고도 말하죠. 성질을 따라가는 거에요.

 

코는 냄새를 맡습니다. 혀는 맛을 보는 거고, 피부는 접촉을 해서 느끼는 촉감을 항상 일으켜요. 날씨가 춥다. 덥다 하는 것도 피부로 느끼는 촉감이거든요. 또 머릿속에는 지나간 일들,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기억이 여러 가지 생각으로 더 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래서 안이비설신의, 이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진이라 하기도 하고, 육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이걸 따라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그 따라다니는 것을 안으로 거둬들이라 이 말이오. 안으로. 봐도 봄이 없어야 되요, 들어도 들음이 없어야 되.

 

그래서 객관경계를 따라가면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멈추고 안으로 자기성품자리를 비춰보라. 이게 참선이에요. 이게 수행. 쉽게 말씀드리면 32장에는 바로 그러한 내용을 설하고 있습니다. 130쪽인데요.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춰라. 여기서 서산스님께서는 虛懷自照허회자조란 말을 썼습니다. 허회. 생각을 비운다는 뜻이에요. 회는 (품을 회)자인데 가슴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회포. 생각들을 말하는 거에요. 이걸 싹 비우는 거에요. 우리가 보통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 다 청소를 하죠. 방 청소도 하고 거실청소도 하고. 그런데 마음도 청소를 해야 되요. 마음도.

 

말하자면 정신적인 그런 청소가 우리 사람 생활 속에서 필요하다. 허회는 생각을 다 비우는 거는 곧 유에서 말하면은 방 청소를 하거나 또는 마당도 쓰는 경우가 있잖아요. 청소하는 경우와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청소가 되면 깨끗해지잖아요. 마음도 쓸데없는 망념이 가라앉으면은 고요해지고 맑아집니다. 고요해지고 맑아지는 그 자리를 가만히 비추어보라. 이 허회자조란 말이 회광반조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춰서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一念緣起일념연기가 이런 얘기요.

 

선에서는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을 생사라고도 표현합니다. 念起念滅염기염멸이 즉 생사다. 이런 어록에 나오는 글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있어도 사람은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이 항상 일어나거든요. 일어나는 이 생각들이 생긴 게 없다는 거에요. 무생이라는 말. 내 머릿속에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 경험에 관한 것들이 생각으로 일어나고, 또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실의 경계에서 나로 하여금 이 생각, 저 생각을 일으키게 하지마는 그 생각들이 무생이라는 거에요. 아주 심오한 말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걸 (믿을 신)자로 표현해가지고 믿어야 한다. 무생을 믿어야 된다. 불생불멸하는 것을 진여라 한다. 또는 無生法忍무생법인이라 한다. 한번 설명 드렸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믿음은 무생을 믿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이걸 무생법인이라 하죠. 무생법인을 믿는 거요. 무생법인, 진여를 믿고 그다음에 불법승 삼보를 믿는다. 대승기실론에서는 이렇게 설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참 불교공부를 깊이 한 분들에게는 조금 이해가 될 수 있는데, 처음 듣는 분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

 

내가 이렇게 태어나서 이 나이 들도록 살아왔는데 무생이란 말은 태어난 것도 없다. 이 말이오. 산 것도 없다는 얘기요. 이거 내 자신의 존재전체를 어떤 면에선 깡그리 부정하는 말인가 하고 의심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불교는 出世間法출세간법 대의를 가지고 있는데, 출세간이란 말이 세는 시간이고, 간은 공간, 시간과 장소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법이라는 거에요. 벗어났다. . 그러니까 이 세상 현상계속에서 끝임없는 생멸경계. 바꿔 말하면 생사의 경계가 있지만, 원래는 없는 거라는 거요. 꿈속의 경계와 같다는 거요.

 

그러면 꿈에 보이고 들었던 것이 있어도 꿈을 깨고 나면은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인간의 생사를 화엄경의 경문 속에도 분명히 설해놓은 구절이 있는데 없다는 거에요. 生本無生생본무생이오, 滅本無滅멸본무멸이라. 生也一片浮雲氣생야일편부운기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일편부운멸이로다 하는 게송이 화엄경에 설해져 나옵니다.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없고, 죽어도 죽는 게 없다. 이런 얘기요. 태어나는 거는 하늘에, 허공에 구름 한 점 생겨난 것과 같고, 사람이 죽어 떠나가는 거는 없어지는 거는 허공에 떠돌던 구름 한 조각 사라진 거와 같다. 비유를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모든 현상에 나타난 이런저런 차별 모습이 본래는 실체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을 무생을 믿는다 하는 거에요. 무생을. 그러니까 이 무생을 믿으면은 불법을 바로 믿게 된다.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객관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생각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 생각 일어나면은 그 생각이 감정을 만들잖아요. 잠자려고 가만히 이부자리 펴고 자려 하는데, 낮에 누구 만나가지고 안 좋은 소리 한 마디 들었던 것이 생각나. 괘씸하기 짝이 없는 기라. 갑자기 생각해보니 또 분하기도 한 거요. 분한 생각을 하니 이가 뽀드득 갈리는 거요. 왜 그래요? 왜 그래요?

 

그러니까 한 생각 안 일어났으면 괜찮은데, 괜히 언짢은 일 있었던 것이 머릿속에 떠오르더니 그게 점점 괘씸한 생각으로 또는 미워, 증오하는 생각으로 생각이 커져요. 이래서 자신도 모르게 편안히 잠들어야 되는데 잠이 안 오고 그만 이가 갈린다. 이 말이오. ~ 사람이 묘하죠. 그래서 이게 뭔 얘기냐? 전부 경계를 따라간다는 얘기에요. 경계를. 그래서 그 경계를 따라가지 말아야 된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 일념연기란 말이 나왔는데 불교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 주축을 이루는 것이 연기설입니다. 연기란 말은 여러 가지 조건, 여러 가지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뭔가가 일어난다는 거에요.

 

, 이 말은 요새 우리말로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어 말하면은 말미암아, 그걸 조건으로 해서, 이런 뜻입니다. 일어난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연기라는 거요. 일념연기라 했으니까. 한 생각. 생각도 일어날 때 생각이 어떤 일어날 만한 이유, 까닭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불교는 생각도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그래요. 물론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같은 학문에서도 비슷한 설명을 하는 경우가 있겠죠. 우리 머릿속에 한 생각이 일어나는 이 생각 자체가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보통 사온으로 설명하잖아요. 인간을 오온으로 설명하는데, 색온이 있고, 그다음에 수상행식 사온이 있습니다.

 

이 사온이 말하자면 생각의 구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념연기. 한 생각이 왜 일어나는가? 저 능엄경에는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이근원통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소리를 듣잖아요. 그런데 귀가 소리를 듣고 저게 무슨 소리다. 분별해 아는데. 그 소리를 듣지 말고, 귀에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말고, 듣는 게 무엇인가? 듣는 것을 들어라. 이런 말이 나와요. 이걸 反聞聞性반문문성. 반대로 듣는 성품을 들어라. 이 말이오. 능엄경에서는 이 공부가 제일 좋은 공부라 했어요. 이근원통장이 25가지 중에 가장 공부하기 좋다고 추천을 해 놨어요. 그 역시 아까 말씀드린 회광반조. 공부에요.

 

또 눈으로 볼 때 눈이 항상 사물을 봅니다. 물체를 봅니다. 무엇이 보는 것인가? 보는 것을 보라. 이렇게도 반문문성과 똑같은 경우로 말을 만들 수도 있죠. 보는 성품. 이걸 如來藏妙眞如性여래장묘진여성이라 해요. 바사니왕이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이 바사니왕에게 뭐 하나 법문을 해서 깨우쳐주고 싶어요. 왕이여, 대왕이 불생불멸하는걸 알고 있느냐?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이걸 알고 있느냐? 나는 모른다. 이거요. 내가 불생불멸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소. 그래 바사니왕이 듣고자 합니다. 질문을 합니다. 황하강이 보였는 모양이에요. 인도에 가면은 긴강, 갠지즈강이라는 강이 있습니다.

 

대왕이 저 강을 언제 처음 봤습니까? 서울엔 한강이 있으니까 서울 시민들에게 한강을 언제 처음 봤습니까? 물을 수 있잖아요. 어릴 때, 다 부모 따라나왔거나, 강을 처음 본때가 있을 테니까. 세 살 때, 내 어머니가 나를 이끌고 기파천을 섬기는 사당같은 게 있어요. 인도에. 아마 이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서 명을 길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러 데리고 간 적이 있었나 봐요. 그때 황하강을 처음 봤다. 이거에요. 그러니까 세 살 때. 그때 부처님하고 대화를 나누는 그때 나이는 예순둘로 나와 있어요. 62살로.

 

그러면 3살 때 처음 강을 볼 때와 지금 62살의 연세에 강을 볼 때, 보는 것이 같으냐? 다르냐? 물어요. 보는 것은 똑같죠. 보는 것은. 물론 우리는 나이가 많아지면 시력이 좀 약해지지 않나? 또 이런 것은 생각할 수 있겠지마는 눈이 본다는 것. 눈이 보는 거죠. 그건 똑같은 거에요. 대왕이 살아오면서 저 강을 여러 차례 뭐 3살 때부터 시작했는데 4살 때도 5살 때도 다 볼 수 있었잖아요. 그래 이제 쭉~ 보아왔지만은 그 보는 성품, 여기서는 개인의 성이라 이럽니다. 그건 똑같다. 이래요. 이거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제 죽으면은 얼굴에 눈이 보지를 못하죠. 귀도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 못한다 해도 보았던 성품 자리, 들었던 성품자리는 없어지지 않는 거에요. 이걸 무생이라 하는 거요. 무생법인. 능엄경에서는 이것을 如來藏妙眞如性여래장묘진여성이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불생불멸하는 이걸 우리가 찾아야 된다. 불교입장에서는 이걸 알아야 된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일념연기가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는 거에요. 본래. 본무생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본무생이라는 말.

 

또 다음 장에 보면은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말인데,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한마음, 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이 말이죠. 죽이고, 훔치고, 음행을 하고, 거짓말하는 것이 한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한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가지고, 행동을 일으키잖아요. 사람 운명이라는 것이 한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출발하는 자리가 한 생각이에요. 한 생각이 일어나면은 뭘 해야 되겠다. 의지가 만들어져요. 의지. 뭘 하고자 하는 뜻. 의지가 만들어질 때 이걸 달리 다른 말로 결심이 되었다. 이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