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라는 꽃이 있지 않습니까? 매화. 눈 속에도 핀다 해서 설중매라 이렇게 부르는 매화도 있습니다. 이 매화가 혹한을 견디면서 꽃망울을 키워가지고 꽃을 피우거든요. 중국에 황백선사라는 스님이 계셨는데, 이 매화꽃을 두고 수행자들의 정신을 비유해서 읊어놓은 송이 전해지는 게 있습니다. 逈脫塵勞事非常형탈진로사비상이니, 진로의 일을 벗어나는 게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거요. 다시 말하면 수행을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뜻이죠. 불교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세상 모든 일이 어려운 난관을 이겨내야 성취가 된다, 성공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진로를 벗어나는 일이 예삿일, 보통 일이 아니니, 緊把繩頭做一場긴파승두주일장이어다. 옛날 밧줄을 서로 힘을 나눠가지고 끌어당기는 그런 게임이 있었어요. 밧줄 당기기. 예. 줄다리기죠. 힘을 딱~ 쏟아가지고 당겨야 되거든요. 그렇게 하듯이 전심전력을 다하라. 긴파, 단단히 붙잡고 있어라. 밧줄을. 여기에 (줄 승)자 (머리 두) 승두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참선수행을 할 때는 화두를 승두라고도 합니다.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을 하라. 이런 뜻이죠. 한바탕 힘을 써라. 이 말을 주일장이어다. 이랬어요. 그 뒤에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이면. 한 번 매서운 추위가 몸을 **아니하면, 몸에 혹한의 추위를 겪어보지 아니하면 이런 뜻이에요.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이리오.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그래서 날씨가 추울 때 매화나무는 그 추위를 이기면서 꽃망울을 키워가지고 꽃을 피우듯이, 사람이 어떤 면에서 역경을 이기고 사는 이게 인생사에 있어서 더 보람스러운 일이라 하거든요. 공부도 마찬가집니다. 법문 듣는 이 법회 참석하는 것도 추운 날 와서 들으면은 더 공덕이 높아진다 할까, 아닌가? 오늘은 또 어떤 얘기가 나오느냐? 141쪽에 보면 36장 얘기가 나옵니다. 이 대목에서는 금강경에 설해진 말씀을 서산스님께서 인용 소개합니다.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해도, 열반에 드는 중생이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 뭘 해도 한 게 없다는 얘기에요. 우리나라 사람들일 손님 대접할 때 꼭 이 말을 합니다. 상다리가 부지러지도록 차려놓고도 아무것도 차린 게 없습니다. 손님 대접할 때, 많이 차리잖아요. 차려놓고 아무것도 차린 것이 없는데. 또 말은 앞뒤가 안 맞아. 많이 잡수시오. 없는데 어떻게 먹어? 겸손하는 어떤 그런 겸양의 미덕을 드러내는 말이죠. 그래서 불교수행에 있어서 특히 보살들이 이타원력을 가지고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데 있어서 상이 남아있으면 안 된다. 이걸 강조하는 말입니다. 가령 갑이라는 사람이 을이라는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다 합시다. 더 쉬운 말로 어떤 도움을 줬다 합시다.
도와준 것이 가장 잘 도와준 것, 완전하게 도와줬다. 이렇게 표현을 해 볼 때, 완전하게 도와준 것. 점수를 매겨 학생들 시험성적처럼 100점의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도와줬다는 생각을 안 하고 도와주는 거에요. 도와주고 나서도 도와줬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에요. 가령 도움을 좀 주고 ‘내 은혜 잊지 말아라.’ 이렇게 말을 한마디 보탠다면 그 말한 것이 도와준 점수를 좀 깎아내리는 거에요. 금강경에 무주상보시 얘기 나온 그 법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게 이 뜻입니다.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들게 해도 열반에 드는 중생이 없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해서 멸도에 들게 하나, 멸도가 열반입니다.
불교는 반야심경에도 구경열반이란 말이 있듯이 맨 마지막에 열반을 얻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보살들은 항상 중생을 위해서 이타원력을 세워가지고 중생들을 제도해가지고 열반에 들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열반에 들게 해 주고 나서 보살들에게는 열반에 든 중생이 없다는 거에요. 실지로 중생이 멸도를 얻은 이가 없다. 멸도라는 말, 열반이라는 말을 바꿔 말하면 아까 남을 도와주는 경우를 가지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남을 도와줬는데 상대방이 내 도움을 받은 게 없다. 왜 그래요?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으니까, 내 생각에 관념적인 고집, 상이 없으니까. 금강경에서는 이걸 不顚倒心부전도심이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쓰고 있는 마음은 거꾸로 된 마음이라고 그래요. 뭘 하고 나서, 쉽게 말해서 생색을 내거나, 자랑을 하는 이 마음은 거꾸로, 우리 사람이 자세를 거꾸로 하면 물구나무선 자세가 되지 않습니까? 이게 전도에요. 방향이 반대로 바뀌어져있는 거. 그래서 상을 가지면은 이건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는 거에요. 전도된 마음. 거꾸로 되어있는 마음이다. 이러 뜻이예요.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중생을 이해해줘야 된다.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바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云何住운하주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물을 때,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죠. 어떻게 해야 내가 잘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묻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거에요. 그런데 보살들은 이기적인 관점에서 묻지 않는다는 거에요. 이타적인 관점에서 묻는 거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내가 남을 잘 이해해줄까? 하는 그런 물음이 되는 것이죠. 부처님이 수보리의 이 질문을 받고,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네 가지 마음이 뭐냐? 첫째는 廣大心광대심이라 합니다. 광대한 마음, 광대심은 뭐냐? 중생 전체를 교화의 대상으로 여기라. 이 말이에요. 금강경에는 아홉 종류의 중생종류 이름이 나옵니다.
태난섭화 사생을 위시해서, 생각이 있고 없는 존재도 있고, 색이 있고 없는 이런 경우도 있고, 해서 아홉 종류의 중생을 제도해서. 그러니까 일체중생을 말하자면 제도의 대상으로 삼으라. 나는 모든 중생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거에요. 현대사회를 개인주의가 너무 발달하니까 남에 대한 관심이 없다. 남의 딱한 처지나 어려운 일을 보고도 내 몰라 한다. 쉽게 말하면 이런 지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살들은 그러지 않는다는 거에요. 일체중생 모두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겁니다. 그게 광대심입니다. 그리고 무여열반에 들게 하라.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도록 하라. 일체의 고통이 없어지게 하라는 뜻이죠. 이걸 第一心제일심이라 그래요. 광대심. 제일심. 가장 으뜸가는 마음. 제일이라는 말은 일등이라는 말 아닙니까? 일등하는 마음을 쓰라는 거에요.
그리고 세 번째가 여기 나온 이 내용을 두고 한 말인데, 중생을 무여열반에 들게 해 주어도 무여열반에 드는 중생이 없다. 왜? 제도해서 열반에 들게 했다는 생각이 안 일어난다는 거에요. 남을 도와줘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내게 없다는 거에요. 이것은 하기 전이나 하고 난 뒤나, 마음은 아무 생각이 안 일어나니까 똑같은 상태가 유지됩니다. 이런 경우를 항심, (항상 상)자를 써서 常心상심이라 해도 됩니다. 똑같은 마음, 하기 전이나 하고 난 뒤나 마음은 아무 변화가 안 일어난다는 거에요. 이걸 상심. 혹은 항심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중생을 제도해줘도 제도해준 바가 없느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금강경에서는 상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게 없기 때문이다.
자아에 대한 관념의 고집, 인간중심의 어떤 이기적인 관념의 고집. 이런 것이 없다. 이걸 不顚倒心부전도심이라 해요. 전도되지 아니한 마음. 그러니까 상이 있는 마음은 거꾸로 된 마음, 전도된 마음이고. 상이 없는 마음이 전도되지 않은 마음이다. 이런 뜻입니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위한 생각뿐이다. 이 불교를 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비의 종교. 윤리적으로 말할 때 비의 윤리다. 흔히 석가모니 부처님을 두고도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하죠. 이 종교가 여러 종교가 있지마는 어떤 윤리적인 차원, 불교가 가장 높아요. 불교. 계율을 가지고 말할 때는 불교의 첫 번째 계목은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불살생이에요. 죽이지 말라는 거요. 이걸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여기에 한정시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 일체를 해치지 말라는 거거든요.
우리가 생명 경쟁 현실 속에서 살다 보면은 사람이 짐승을 잡아먹기도 하잖아. 소도 잡아먹고. 돼지도 잡아먹고. 바다에 있는 고기들. 지구인구가 지금 60억이 넘었는데 하루에 사람들이 저 바닷고기를 한 마리만 먹는다 해도 60억 마리의 고기를 잡아먹는 결과가 된다, 이거에요. 물론 이것이 우리가 음식을 해결하기 위해서, 반찬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생활 구도 속에 하고 있는 일이지마는.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걸 나쁜 업을 짓는 것이니 금지시켰어요. 그게 불살생이에요. 불살생. 길가에 기어 다니는 벌레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이런 불교의 윤리정신을 놓고 그게 인간의 현실하고 맞을 수 있느냐? 이렇게 혹자들이 따진다면은 그 사람은 윤리의 수준이 낮은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생명이라는 거는 보호해줄수록 좋은 거에요. 그리고 이 불교는 윤회설에서 설명됩니다마는, 일체중생이 서로 생을 거듭해가면서 짐승의 몸을 받고 태어난 짐승이 사람이 되는 수도 있고, 사람의 몸을 받고 일생을 살아서 악업을 잘못 지으면 다음 생에는 짐승이 될 수도 있다는 거에요. 이런 원리에서 볼 때 생명의 가치는 똑같이 절대 평등하다는 겁니다. 능엄경에는 이런 얘기도 경문구절에 나와요. 사람이 양을 잡아먹지 않습니까? 서양종교에서는 양을 잡아 신의 제단에 올린다 해서 희생양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양을 잡아먹었을 경우 다음 생에 서로 바꿔 된다는 거에요. 잡아먹힌 양은 사람이 되고 잡아먹은 사람은 양이 된다는 거에요.
이런 얘기에는 어떤 윤리적인 고도의 상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윤리적인 얘기, 고차원적인 얘기가 불교의 정신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불교는 다른 종교보다도 윤리 도덕적인 어떤 수준이랄까? 차원이 더 높다. 이럴 수 있는 거죠. 보살들은 오직 중생을 위한 생각뿐이다. 어머니가 갓난 애기를 품에 안고 기를 때는 그 애기 생각뿐인 거에요. 그래서 보살과 중생의 관계도 그와 같다는 겁니다. 불보살과 중생의 관계가 그와 같다. 이래요. 그런데 여기서 묘한 말이 다시 나옵니다. 了念體空者요염체공자가 度衆生也도중생야이다. 이런데요, 생각의 바탕이 비어있음을 아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의 관념에 붙들려 있을 때는 아무리 좋은 이타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게 좋은 이타행이 되지 못한다. 생각이 남아 있지 않아야 된다. 없어야 된다. 도와줘도 도와줬다는 생각이 없어야 그것이 도와준 것이 된다는 거에요. 혹 어떤 가정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자식이 부모 뜻을 혹 좀 거스르고 이런 경우가 있을 때, 부모가 자식 나무라면서 언젠가 드라마에도 그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나한테 이렇게 하노.’ 어머니가 딸한테 그러더라고요. 딸한테. 그거 이제 참~ 어머니와 딸의 관계니까 참~ 뭐~ 답답해서 한 얘기랄까. 말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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