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할 책은 오쇼의 <신비신학>입니다.
오쇼 라즈니쉬는
1931년 인도에서 태어났고 마흔 살쯤부터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는데요.
언제나 진실을 말하고 종교의 위선을 벗겨냄으로써 진리를 설파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서양의 숨겨진 붓다, 디오니시우스를 말하다>인데요.
디오니시우스는 서양의 신비주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친 5~6세기의 기독교 신비주의 성자라고 합니다.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불교의 공 또는 노자의 도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사상을 펼쳤다고 해요.
아테네의 첫 주교였다고도 하는데요.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내용 살펴보겠습니다.
진정한 자각의 상태는 흥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흥분도 없다.
그것은 완전히 평온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대는 지루하고 차가운 세상에 살고 있다.
따라서 그대의 마음은 계속 흥분되고 기운이 올라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대는 항상 어두운 골짜기에서 살고 있어 밝은 봉우리를 동경한다.
그것은 그대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 자체의 본성이 아니다.
의식은 정확하게 중간에 있다.
그것은 낮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골짜기도 아니고 봉우리도 아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붓다는 그것을 중도라고 불렀다.
그것은 정확히 중간에 있다.
그리고 초월은 바로 그 중간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긍정적이지도 않고 부정적이지도 않다.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는 미묘한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대는 이쪽이나 저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다.
이는 마치 줄 타는 사람과 같다.
그는 정확히 중간에 있다.
그가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그는 떨어질 것이다.
만일 그가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그는 떨어질 것이다.
그는 우익도 아니고 좌익도 아니다.
그들은 모두 떨어질 것이다.
그는 정확하게 중간에 있다.
이는 시계추와 같다.
시계추는 왼쪽 끝으로 갔다가 다시 오른쪽 끝으로 간다.
이 두 개의 극점 사이를 움직이는 동안 시계는 작동을 한다.
그대는 그것을 관찰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추가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그것은 왼쪽으로 가는 탄력을 얻고 있다.
명백히 추는 오른쪽으로 깊숙이, 숨어 있는 내면으로까지 움직이면서 왼쪽으로 가는 탄력을 얻는다.
그리고 추가 왼쪽으로 갈 때 그것은 오른쪽으로 가는 탄력을 얻는다.
이는 그대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그 사람을 미워할 탄력을 얻고 있다.
그대가 사랑하기도 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아니다.
연인들을 지켜보면 이 현상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다.
시계추처럼 그들은 계속 서로에게서 멀리 움직인다.
그것이 싸움이다.
싸움을 통해 그들은 서로에게서 멀리 더 멀리 떨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멀리 떨어지면, 다시 똑같은 끌어당김이 시작된다.
그들은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현상이 된다.
가까이 다가오고, 멀리 떨어져 갔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온다.
각자의 공간을 요구하다가 외로움을 느끼고
그러다 상대를 찾고 같이 있다가 서로에게 싫증을 느낀다.
남자는 여자 없이 살지 못하고 여자는 남자 없이 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같이 살지도 못한다!
삶의 모든 면이 다 이렇다.
의식이란 시계추를 중간에서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시계추를 중간에서 멈추게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시계가 멈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대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게, 지루하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게 중간에서 의식을 멈출 수 있다면, 그때 그대의 마음은 멈춘다.
왜냐하면 마음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 안에 있는 시계인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멈추는 순간, 거기에 인식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 나는 자각하고 있는가?”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만일 그대가
“이제 나는 자각하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식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거기에는 어떤 구별되는 과정이 없다.
마음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항상 돌아오기를 동경하고 있다.
어떤 변명이라도 충분하다.
“보라! 이것이 진정한 자각으로 보인다”라고 말하는 순간, 마음이 돌아온다.
마음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그대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장하다! 그대는 해냈다. 그대는 도달했다. 그대는 깨달았다.
이것이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아그노시아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이 그것이다. 진정한 그것이다!”
그때 마음은 계속 진행한다.
그리고 그대는 그대가 자각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모든 정상이 없어졌다. 태양은 졌다. 빛은 사라졌다.
그대는 골짜기로 돌아온다. 어두운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대가 진정으로 자각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인식도 없다.
그대는 구분하지 않는다. 구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대는 단지 의식하는 것이고 그때 거기서 끝이다.
종지부를 찍었다. 완성이다.
그러나 마음은 그대를 그렇게 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다시 또다시 올 것이다.
그대는 마음의 미묘한 전략을 알아채야 한다.
마음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은 그런 식으로 다가와 그대가 매우 조심하지 않으면 그대를 속일 것이다.
마음은 위대한 정치가인 것이다.
마음은 그대가 의식하지 못할 때만 살 수 있다.
의식한다는 것은 마음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도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음은 깊은 무의식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무의식이 더 깊어질수록, 마음은 더 영양분을 얻는 것이다.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이유도 모르고,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다.
그는 단지 로봇처럼 가고 있을 뿐이다.
그대 자신을 지켜보면 지금까지 그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거의 꿈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가 이것을 알아차렸다면 좋은 일이다.
“의식적인 상태는 인식할 것이 아니라 경험해야 할 것…”
그렇지만 그대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는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없다!
아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다!
아니다. 나는 다시 속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마음이 들어왔다! 마음이 다른 문으로 들어와 거기에 있다.
인식하려고 하지 말라. 인식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말라.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그것은 단지 경험해야 할 상태…”
누가 경험할 것인가? ‘단지 경험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경험하려고 한다면,
그것을 ‘단지 경험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해도
그대는 그 상태와 그대 자신을 분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와 그대 자신 사이에 있는 분리는 마음이 들어오기에 충분한 것이다.
단지 그것을 이해하고,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않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을 잊어라.
단지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이런 모든 것을 잊어라.
그것이 거기에 없을 때, 그것이 없는 대로 살아라.
그것이 거기에 있든 없든 소란피우지 말라.
마치 그것이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조용히, 침착하게 있으라.
그대가 자각하고 있든 무의식적으로 있든 그대는 똑같다.
그대가 의식을 평가한다면, 의식이 무의식보다 낫다고 말한다면
어려움이 생기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의식이 있을 때마다
그대의 마음이 미묘한 방법으로 그것에 매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바로 그 매달림이 마음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매달리는 자인 것이다.
반대되는 것을 구하지 않고, 그것에 매달리지도 않고 그것으로부터 물러나지도 않으면서
매 순간 삶이 오는 대로 사는 것- 이 한 가지를 배워야 한다.
그대가 어두운 기분일 때, 그것을 전체적으로 살아라.
그것을 걱정하지 말라.
어둠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어둠에는 어둠 자체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둠은 매우 부드럽고 깊이가 있다.
그것을 살라. 그것을 사랑하라. 그것을 즐겨라!
어둠으로부터 가능한 많은 영양분을 취하라.
뿌리는 어둠이 필요하다.
뿌리는 어둠이 없이 자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뿌리가 어둠으로 양분을 얻게 하라.
그리고 그대가 밝은 정상에 올랐을 때 그대의 꽃이 피게 하라.
그것도 즐겨라. 꽃도 뿌리처럼 그대의 것이다.
둘 모두가 그대의 것이다.
내 자신의 경험은 이렇다.
삶은 전체적으로, 모든 차원에서 다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다.
어두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삶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자신의 몫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분을 지을 때
그대는 스스로 분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삶은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다.
밤이 되면 자라. 낮이 되면 일어나라.
낮에 밤을 갈망하지 말고, 밤에 낮을 갈망하지 말라.
임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나는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잔다.
이것이 나의 사다나(수행)이다.
이것이 내가 하는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나의 산야신에게 하는 말이다.
그대가 무의식적일 때,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가 깨어 있을 때, 위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이루는 지점으로 좀더 가까이 가져가라.
그러면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인식할 필요는 없다. 찬양할 필요도 없다.
이기적이라고 느낄 필요도, 의기양양함을 느낄 필요도 없다.
그것을 자랑할 필요도 없다.
마음이 완전히 가버릴 때, 모든 것은 신이다.
모든 것은 신적이 된다.
모든 것은 지극한 기쁨이 되며 모든 것이 축복이 된다.
고맙습니다. 오쇼의 <신비신학> 함께 하였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현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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