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살펴 볼 문장은
디팩 쵸프라의 <우주 리듬을 타라>
p.108~p.109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자기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
당신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나
반대로 보기만 해도 역겨운 사람
모두가 당신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다.(p.109)
당신한테 더 많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무엇이 누구한테서 보이면
당신 마음은 그에게로 달려간다.
당신한테 없기를 바라는 무엇이 누구한테서 보이면
당신 마음은 그것을 등진다.(p.109)
남들의 어떤 기질이 마음에 드는지 또는 들지 않는지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보라.
그게 바로 당신의 기질이다. (p.109)
에고의 관점에서든 영혼의 관점에서든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마음공부 중 하나가
타인을 대할 때 가지게 되는 마음의 태도인데요.
나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이것을 타인의 기준에서 이야기해 보면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요.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싫어하는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사람을 싫어해야 해요.
하지만 우리가 싫어하는 대상과 이유는 제각기 다릅니다.
누군가는
‘나는 비열하고 비겁한 사람이 제일 싫어’ 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요.
또 다른 누군가는
‘나는 잘난 척하거나 오만한 사람이 정말 싫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 같은 성품의 사람을 대할 때도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또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말이 적은 사람을 만났을 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 그 사람은 말이 굉장히 없어. 진중하고 과묵해 보여서 참 좋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요.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사람은 말이 너무 없어. 솔직하지 못해 보이고 너무 답답해 보여서 나는 싫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또 우리가 말이 많은 사람을 만났을 때 누군가는
‘그 사람이 쾌활해 보여서 좋아’ 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요.
또 다른 누군가는
‘너무 사람이 수다스럽고 가벼워 보여서 싫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한 것은
이 ‘말이 많다’ ‘말이 적다’의 기준조차
어떤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요.
나의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한테는 말이 많게 보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말이 적은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거죠.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들어보자면
우리가 계산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 사람은 굉장히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참 좋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람이 너무 계산적이야. 삭막하고 너무 따져서 나는 싫어’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또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는 ‘그 사람은 굉장히 인정이 있어 보여.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참 좋아’ 이렇게 말할 수 있고요.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람이 계산이 너무 흐리멍텅해. 분명한 데가 없어.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싫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요.
‘계산적이다’ ‘계산적이지 않다’라는 그 기준 자체가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는 거예요.
누군가한테는 계산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누군가한테는 그냥 정확한 사람이다라고 보이고
그렇게 계산적인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을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할 때
내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라고 생각을 하지만
결국은 이 모든 것은 나의 주관적인 견해다라는 거죠.
그러면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는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요?
사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상대도 굉장히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해요.
우리가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훨씬 더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거든요.
하지만 이런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해도 잘되지 않잖아요.
왜냐하면 근본이 되는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에요.
진실은요.
타인은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타인에게서 보이는 어떤 점이 싫다면 내 안에도 그것이 있다는 것이고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비열하고 비겁한 사람이 싫다’라고 하면 그 비열함과 비겁함이 내 안에도 뜻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사람이 싫다’라고 한다면
내 안에도 그런 분별심이 있다는 거예요.
내 안에 없는 것을 우리가 싫어 할 수는 없어요.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안에 없는 것을 싫어 할 수는 없는 거죠.
우리나라 전래동화 중에 ‘호랑이와 곶감’이라는 이야기 아시죠?
아이가 한밤중에 울고 있을 때 엄마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바깥에 호랑이가 왔다라고 얘기를 해요.
하지만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호랑이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가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때 엄마가 곶감을 준다라고 하지요.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는데요.
왜냐하면 아이는 이 곶감이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즉, 우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도 그것이 있고
내 안에 있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싫어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는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들키고 싶지도 않은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그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을 때
그 사람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외면하게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끌리게 되고요.
내 안에 ‘없었으면 좋겠다’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밀어내고 싫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 안에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 ‘유쾌함이 부족하다’ 이런 생각이 들고
내 안에 그런 기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싶을 때
우리는 그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고 끌리게 된다는 거죠.
반대로 내 안에 있는 어떤 기질을 내가 싫어할 때,
그런 기질의 사람을 볼 때
싫어하는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감정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먼저 모든 인간관계가
나의 내면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해요.
우리가 외면을 다듬고 바로잡고자 할 때
거울을 보잖아요.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을 다듬고 바로잡고자 할 때는
인간관계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지표로 삼으시면 되는 거예요.
싫어하는 마음이 올라온다는 건
나의 내면에 무언가 바로잡아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에요.
나의 내면의 무언가를 바로 잡는 방법을 두 가지 말씀을 드릴게요.
-먼저 첫 번째 방법은요.
내 안에 있는 그것을 인정하고 허용하기입니다.
그것이 내가 싫어하는 그것이
내 안에 ‘얼마나 많이 있느냐?’ ‘얼마나 적게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잘난 척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면
내 안에도 잘난 척하고 싶은 그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는 뜻이고요.
내가 누군가를 험담하는 사람을 싫어한다면
내 안에도 험담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는 뜻이에요.
우선 내 안에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허용해 주셔야 해요.
우리가 내 안의 그것이 아무리 조금 있더라도
그것을 허용해 주지 않으면 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줄 수가 없어요.
나 자신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만약에 크레파스를 샀을 때
내가 검정색을 싫어한다고 해요.
그런데 나는 검정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검정색이 없는 크레파스를 산다면
그 크레파스는 전체로서의 완전함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내면을 바로잡는 두 번째 방법은요.
나라는 존재 혹은 타인이라는 존재와 내가 싫어하는 그것을
동일시하지 말고 분리하는 것이에요.
내가 싫어하는 그것이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지만
그 기질 자체가 존재 자체는 아니에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입고 있고
타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런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 옷 자체가 그 사람 자체는 아니라는 거죠.
이것을 우리가 분리해서 볼 수 있으면
그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그것과 존재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다면
나 자신을 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요.
이 내용을 이 책의 p.108 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저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셔서.
저한테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안에 있어요.
그러니까 저는 완전한 겁니다.” 라고 표현을 했어요.
즉, 우리가 크레파스를 한 통을 샀을 때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색도 들어 있고
내가 싫어하는 색도 들어 있지만
그것 전부로 그 크레파스는 완전하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렇게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허용하게 되면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타인 역시
더 이상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또 이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전적인 자기 용납은 자기 용서를 의미한다.
자기를 용서할 때 더 이상 자기를 심판하지 않을 때
그때 당신은 남들도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의 갈등 또한 그 만큼 줄어들 것이다.”
결국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좋고 나쁨을 분별하려는 이런 마음의 습관을 내려놓으면
누군가를 비난하는 습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이러한 습관들이 사라지면
자신과의 관계에서든 타인과의 관계에서든
마음의 갈등들이 사라지죠.
이럴 때 우리는 점점 더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현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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