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비교에 대하여 그 내적 폭력성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선망, 목표, 노력, 억압은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런 것에 의존하는 마음은 자유가 없다.
오히려 의존은 두려움을 키운다.
비교와 의존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없다.
방법을 묻는 것은 또 다른 목표-노력-억압-비교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자신이 의존하고 있다는 것,
그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
의존과 두려움 속에서는 어떠한 성취도 자유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았을 때 우리는 행동의 변형을 가져올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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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오랜만에 영상으로 찾아뵙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크리슈나무르티가 말하는 폭력,
외적인 폭력이 아니라 내적인 폭력에 관한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크루슈나무르티는 이게 폭력의 밑바닥에, 물론 심리적 폭력입니다.
거기에 비교하는 마음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릴 때에 옆집 아는, 엄마 친구 아들은, 딸은
이런 거 듣기 싫어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순수한 마음에 그런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때리는 거거든요.
뭐랄까 폭력입니다, 그게 일종의.
듣기 싫었던 것이죠.
그래서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떠한 어떤 선망 또는 목표, 바람직한 포부
이런 어떠한 것도, 어떠한 것도 그건 폭력이다. 폭력적인 일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게 모범이고, 이게 기준이고, 이게 표준이고, 목표가 되면은
반드시 그걸 모방하게 되고, 거기에 순응하게 되고, 비교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뭐 뭐처럼 되자’ 이런 ‘뭐 뭐처럼 되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뭐 뭐처럼 되어라’ 하는 것은 부모가 나한테 한 말이고
내가 그게 내면화가 되면 ‘나도 뭐 뭐처럼 되고 싶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근데 그것이 진짜냐?
가짜라고 보는 것이죠.
진짜가 아니고 만들어진, 주입된 욕망이고
그 욕망이 평생동안 한 인간의 삶을 헛것으로, 가짜로 만든다.
이런 주장? 혹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육을 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 앞 세대의 가치와 지식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거잖아요.
그거를 사회화,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거는 또 개인들은 그게 성장하면서 그것을 내면화하는 것이죠.
‘내가 장차 뭐가 되겠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문장처럼 보이지만
크리슈나무르티가 보기에는
이것이야말로 대단히 폭력적인 문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
피상적이고, 왜곡된 이해에 기초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거 말고 저게 되라’라고 하는 비교
그리고 ‘저것이 되어라’라고 하는 강요
이런 게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게 세속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이 내적으로 느끼는 자유라든지, 행복이라든지 하는 것과는 상극이다.
그렇게 안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표가 생기고, 선망이 생기고, 욕망이 생기면
우리는 그걸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죠.
그건 자신을 단련시키고 훈련시키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억압이라는 것이죠.
뭐냐 하면 as is에서 to be로 가기 위해서
자기를 다른 일을 못하게, 다른 생각을 못하게, 그것만 하게 이렇게 몰아가는
그것은 억압에 기초한 노력
그리고 계속 비교한다는 것이죠, 어디까지 왔는지.
이런 것들이 내적인 폭력의 뼈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더군다나 보통 우리가 일기를 쓸 때
반성문 형식으로 일기를 쓰기도 한다고 하죠.
저도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이래야 되는데 이렇게 하지 못했다. 다음에 더 잘해야 되겠다.’
이런 다 반성문 형식으로 쓰는 일기라고 하는 것이
그런 나쁜 습관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속에는 은밀한 비교 또는 은밀한 폭력이 내재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듣고 여러분들은
‘뭐 그런 것도 같다.’
혹은 ‘내가 느끼는 쫓긴다는 느낌, 압박감 이런 것이 어쩌면
여기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억압과 노력이라고 하는 의미의 트레이닝 훈련 말고
배움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또는 그것이야말로 해결책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배움은 정의에 의해서 거꾸로 되겠죠.
as is는 그대로를 보는 것 또는 있는 그대로로부터 배우는 것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배움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비교하거나 딴 길로 못 가게 억압하거나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있는 그 자체로부터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고
그럴 때 마음이 자유롭고 민감해진다는 겁니다.
그런 마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왜 그러냐? 왜 마음이 편할 때가 없는데 왜 마음이 편하냐?
욕망이나 목적이 없기 때문에 쫓기는 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은 대단히 자유롭고, 민감하고, 깊고, 진지하게
그래서 사물의 진상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전쟁이 났다
그러면 ‘아이고 그 전쟁이 나서 큰일이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파괴가 되고 얼마나 안 된 일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렇지만 내가 어디 주식에 투자를 해놨다 그러면
생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전재산을 투자해 놓은 이 주식의 전쟁이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좋은 영향이냐 나쁜 영향이냐 나는 어떻게 되느냐?’
그러니까 전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고통은
아예 거기에 대한 인식이 없을 수는 없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저 뒤쪽으로 밀려나겠죠.
이게 전형적으로 목적이 왜곡하는 as is, 있는 그대로의 모습
목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왜곡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as is, to be가 아니라 as is를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서 배움이 일어나고, 민감한 마음은
고정관념이라든지 또는
‘이건 이거야, 이건 이렇게 해석해야 돼’ 라고 하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권위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공포를 일으킨다, 두려움을 일으킨다.
의존하면 사람은 두려워지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두려워하면 또 반대로 의존을 찾게 되고
의존하면은 그것이 의존하는 대상에 메이면서 두려움이 커지고
이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의존과 두려움이 있는 마음에 무슨 자유가 있냐?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 싸매고 절에 들어가서 고시 공부해서 성공하고
혹은 주식 투자에서 성공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자유를 얻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거는 거꾸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른 것이 되고 싶어 하는가?
왜 목적이 생기는가, 목표가 생기는가?
선망하는 어떤 모범 모델이 생기는가?
그것은 명백하게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뭐 이거는 납득할 만하죠.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은
일단 아름답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추하고
그다음에 또 천박하고
또 뭔가 고립되어 있고, 고독하고
자기가 봐도 그렇게 멋있지 않죠.
그다음에 또 자기는 자기 성격도 별로 안 좋고
난 또 인색한 것 같고
그리고 뭔가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 같고
이런 삶에 별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이러니까 자기를 사랑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꿈을 꾸게 되는 것이죠.
‘나는 언젠가는 멋진 내가 될 거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리고 멋진 내가 된다라고 하는 목표를 세워놓고
뭔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을 보내는 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향해서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not bad. 이렇게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어떤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좀 해결하기 위해서
위안이 되는 목표와 그것을 위한 노력
이런 과정 자체가 그의 의존이다.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거기에 의존하고 있고
그러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또는 노력해야 되는데 자꾸 노력하지 못하고 엇나가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
더더욱 실망하게 되고
그러니까 그런 위로를 찾는 마음이
오히려 의존과 공포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포인트는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예쁘지 않을지라도, 또 좀 추할지라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식하는 일을 해야지
그거를 외면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모든 작업은
실패한다, 더 비참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 정리를 하자면
내적인, 심리적인 의존이 있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이게 아주 분명한 주장입니다.
여기서 흔히 잘못을 범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러면 ‘오케이, 그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거구나.
그럼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하면, how 어떻게 하면
이런 내적인 의존에서 나오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또
방법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또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고, 자유를 목적으로 하고
자유를 위한 어떤 노력을 해야 될까라고 하는 방법론을 찾고,
이거는 뭡니까?
또 노력하고 억압하는 또는 의지하고 두려워하는 그 궤도에 또 들어가는 겁니다.
그 부분을 크리슈나무르티가 굉장히 중요하게 지적을 하는데요.
그러면 우리는 자포자기가 되면, 그러면 어짜라고?
어떻게 하라고 방법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냥 단지 그것을 확실히 봐라.”
그러니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껴라.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실망하는 것이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이 권위를 낳고
권위가 의존을 낳고
그러면 우리의 자유는 없고
우리는 혼란에 빠진 생활을 하고 있다 라고 하는
이걸 그냥 봐라.
어떻게 내가 이걸 해결하지? 이걸 고치지? 이것을 개선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아라.
그래서 확실하게 보게 되면 우리는 의존하지 않게 된다.
즉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교의 위빠사나하고 비슷한 것이죠.
보면 사라진다.
정확하게 보면 그것은 사라진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측면하고도 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just see it
어떠한 의도도 가지지 말고 일어나고 있는 현상, 실상을 그대로 보게 되면
내 마음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그 마음은
to be, 목적, 바람직한 목표에 의해서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이것이죠.
그냥 추하고 천박하고 인색하고 별의미 없는 나라고 하는 것
그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건 그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되면
내가 마음이 민감해지고
거기서부터 학습 배움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그래서 노력이나, 억압이나, 순응의 형태가 아닌 형태의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우리는 많은 예를 들지 않더라도
노력,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규칙에 순응한 사람들이 본전 생각 때문에
나중에 일으키는 여러 가지 그 성격적인 인성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우리가 자유로운 마음이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동어 반복이 생기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유는 맨 끝에 오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진짜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자유로우냐?
‘어떻게’ 하라는 말을 묻지 말아라.
그럼 어쩌라고?
‘내가 자유롭지 않다’라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봐라’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럼, 거기서 뭔가 변형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게 리슈나무르티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야
내가 자유롭지 않다라고 하는 것
내가 의존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실망스러워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야
비로소 내 마음에 민감해지고
그때 하는 인식은 명료하고
그다음에 그 전체적인 이해를 우리가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그때 열린다.
그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과정과 결과가 자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젊었을 때부터 크리슈나무르티를 읽어봤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적어도 내적인, 내면의 문제에서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지적들을 새겨보아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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