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그 답은
오늘날의 과학 상식으로 보면 특이점이 됩니다.
특이점이 극한의 밀도를 견디지 못하고 뻥 터지면서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특이점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과학자들은 특이점에서는
시공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에
그런 의문을 내는 것 자체가 우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실이 그렇더라도
철학의 영역에서는 얼마든지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특이점이 발생한 원인을 모르고는
존재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우주를 탄생시킨
특이점의 과거를 알아낸다면 어떨까요?
특이점의 아버지, 혹은 그 이전의 할아버지도 있을 테고
계속해서 무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 뻘 되는 특이점이 또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때의 특이점이
어떤 원인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이것을 ‘제1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명실상부한 삼라만상의 근원인 것이니까요.
그러면 다시 돌아가
원조 ‘특이점’이라는 ‘제1원인’은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일부 수행자들은 무에서 생겨났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무에서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1원인’은 유라는 얘기인데
그럼 어떻게 원인도 없이
그냥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는 건가요?
자존은 그 자체로 모순인데 말입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시름하여 왔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제1원인’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내면서
공론화시켰지요.
하지만 그 누구도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근대 서양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주의 시작점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알 수 없다.
만일 시작점이 있다면
무한한 시간 중에 그 시작점을 찍을 수 없다.
그렇다고 시작점이 없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시작이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칸트 외에도 데이비드 흄은
‘제1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버트런드 러셀은
‘제1원인’을 추적하는 행위 자체만은 인정하였습니다.
답을 모르더라도
‘제1원인’에 대한 탐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지요.
철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제1원인’에 대한 철학적 연구가
불가지론으로 귀결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귀류법을 써서 이 문제를 봉합하게 됩니다.
‘제1원인’이 없다면
삼라만상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제1원인’이 존재하는 것이 참된 명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제1원인=神
이라는 등식이 나오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수행자들은 ‘제1원인’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철학자들과는 달리 수행자들은
애초부터 제1원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당면한 문제,
이를테면 생로병사와 괴로움, 그리고 시공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주된 목적을 두었습니다.
쉽게 말해 수행자들은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것보다는
‘나’가 잘 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죠.
그렇다면 수행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 걸까요?
그들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일체의 착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 데 성공합니다.
본성, 불성, 참나 등의 상태에서
지극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마음이 비록 지극히 평화로워졌을지언정
‘제1원인’에 대한 화두에는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행여 누군가가 ‘제1원인’에 대해 계속해서 묻는다면
연기론의 순환론을 가지고 두루뭉술 넘어가곤 합니다.
다시 말해 ‘제1원인’ 같은 건 없으며
만물이 서로 얽혀
원인을 주고받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상호 순환하는 우주 만물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워질 수 없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지적 탐험이 끝나는 때는
시작이 어딘지 알아내는 순간이다.”
이 말은 ‘제1원인’의 답을 찾을 때
우리의 앎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하면 ‘제1원인’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우리의 지적 영역에 완성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엘리엇의 말을 잣대로 삼는다면
지적 탐험이 완성되는 순간,
즉 ‘제1원인’을 찾는 순간이 깨달음이 됩니다.
만일 세존이 무상정등각을 얻었음에도
‘제1원인’의 답을 몰랐다면
그건 제대로 된 깨달음이 아니게 되겠죠.
그래서 서양 철학의 기준에서 보면
붓다의 깨달음은 ‘제1원인’에 대한 자각이 됩니다.
사실 ‘제1원인’을 알 수 없다면
우리가 아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작점을 모르는데 무엇을 알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상한 점은
불교 역사를 통틀어
세존과 용수를 제외하고는
‘제1원인’에 관심을 가진 수행자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그 많은 불교의 수행자들이
‘제1원인’을 외면해 왔던 것일까요?
수행자들은 한결같이
해탈과 열반 또는 도덕적 완성 같은
명제들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나’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주된 목적이지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은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물론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제1원인’은 인간의 이성으로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해탈과 열반을 꿈꿀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자라면 절대로 ‘제1원인’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결코 무명에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세존께서 ‘제1원인’의 답을 찾은 후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깨달음인
무상정등각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요?
‘나’가 해탈하려 하면
아무리 마음을 비워도 해탈할 수 없습니다.
‘나’가 열반에 이르려면
그 어떤 수를 써도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나’를 그냥 놔두고 진리에 관심을 두는 것에서
해탈도 열반도 수반되는 것입니다.
‘나’가 개입되는 한
해탈과 열반은 성립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이 ‘제1원인’의 문제를 풀든, 풀지 못하든
우리는 계속해서 이 화두를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가 잘되려는
해탈과 열반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깨달음의 정도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생각하기에 존재해야 합니다.
그 생각의 완성이 바로 ‘제1원인’에 대한 진리적 자각입니다.
따라서 ‘제1원인’을 포기한다면
나의 존재는 신기루처럼 증발하고 말 것입니다.
당신은 정녕 ‘제1원인’을 찾고 계시나요?
혹시 해탈과 열반에 정신을 쏙 뺏겨버리지는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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