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수행자들은 나를 완벽하게 만들려는 걸까요?
모든 생각이 ‘나’가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일어나기에
나를 최상의 반열에 올리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더라도 사실과 환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나’가 잘 될 수 있다면
수행의 가치는 무궁하겠죠.
하지만 그 결과가 환상으로 꾸며진 자기만족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가 온전하게 됐다는
불성이나 참나의 상태를 현실적으로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 최고로 잘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을 믿어 천국에 가면 될까요?
아니면 마음을 비워 열반에 이르면 될까요?
천국에 가거나 열반에 이르면 정말로 ‘나’가 잘 된 것일까요?
천국이나 열반이 실제한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나’가 잘 되는 것과 별다른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공과 차원의 한계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국과 열반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이런 한계 역시 훌훌 벗어난 상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공과 차원의 족쇄는
천국과 열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꽁꽁 닫힌 자물쇠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1원인’입니다.
‘제1원인’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 한
존재의 실상을 알 수 없고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천국과 열반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국이든 열반이든
환상 속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것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삼라만상의 시작점,
다시 말해 ‘제1원인’이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너무나 근본적이고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수행자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대략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제1원인’은 나를 해체합니다.
‘제1원인’이 화두로 올라오는 순간
‘나’가 잘 되려는 마음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맙니다.
‘제1원인’이 너무 궁금해 미쳐버리겠는데
어느 순간에 해탈과 열반을 떠올릴 수 있겠나요?
그러다 보니 출중한 수행자들마저도
‘나’가 잘 되려는 심리로 인해 ‘제1원인’을 멀리하게 됩니다.
--두 번째 ‘제1원인’은 진리적 평등을 가져옵니다.
해탈과 열반 같은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체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서열이 갈리고
지배와 종속이 만연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1원인’을 추구하면
스승과 제자의 서열이 깨지면서 평등해집니다.
왜냐하면 ‘제1원인’을 모르는 건 둘 다 똑같기 때문입니다.
체험 속에 숨어야지만
언어도단을 내세우며 스승의 흉내를 낼 수 있는데,
‘제1원인’을 꺼내 드는 순간 발가벗게 되어
숨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세 번째, 아무리 궁구해도 ‘제1원인’의 답을 찾을 수 없어 쉽게 포기합니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시작점이 있어도 모순이고 없어도 모순이 됩니다.
양자 모순에 걸리기 때문에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보고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지요.
이상과 같은 3가지 이유에 의해서
수행자들은 ‘제1원인’을 멀리하고
체험적 수행에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해탈과 열반을 체험해서
탄성을 지르고, 오도송을 읊조리는 모습이 좀 괴이하지 않나요?
‘제1원인’을 모르는데 무슨 깨달음 타령을 한단 말인가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탈하여 열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오뉴월의 개가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상팔자 타령을 하는 것이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좀 가혹한 말이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른다면
오늘날의 수행문화는
개그콘서트의 단골 소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스승이란 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제1원인’을 감추기에 급급하고,
제자들은 나가 잘되기 위해
스승의 ‘체험주의 수행’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코믹한 수행 문화가
수천 년을 이어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세존이 그 방향을 틀고
용수보살이 브레이크를 밟아도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호모사피엔스의 지적 용량이
한 단계 진보하지 않는 한
이런 현상엔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깨어나는 소수의 수행자들을 위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이성에 눈을 뜨면서
처음으로 의심을 품었던 ‘제1원인’에 대한 화두입니다.
진리적으로 평등한 가운데
존재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것은 ‘제1원인’에 대한 자각에 있습니다.
진리는 ‘아느냐 모르느냐’의 영역이지
체험으로 느끼는 영역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체험으로 느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체험을 ‘제1원인’의 답을 찾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일인 것이죠.
어찌 되었든 결론은
‘제1원인’에 대한 자각으로 귀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단예소피아]가
지루하리만큼 반복적으로 ‘제1원인’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당신의 수행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덕마음공부] 직장 생활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 (0) | 2024.05.06 |
---|---|
[Danye Sophia] '나는 깨달았다' 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 한번 던져보라 ! 답 못하면 그는 진짜 깨달음을 얻은게 아니다. (0) | 2024.05.02 |
[Danye Sophia] 우주의 시작점을 찾을 수 없는 근본 이유...바로 이것 때문! (0) | 2024.04.24 |
[현덕마음공부] 업과 윤회에 대한 바른 이해 (0) | 2024.04.22 |
[Danye Sophia] 이것을 모르면 神도, 깨달음도 알 수 없다. (0) | 2024.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