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관념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모양에 대한 차별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파악한다.”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스님
수분각에 이은 구경각은
참된 깨달음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뜻의 등정각, 즉 등각입니다.
우리는 앞서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의 경지의 차이를
범부각, 상사각, 수분각, 구경각의 4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신론이 또한 구경각 위의 깨달음인 묘각을 상정하고 있는 것도 봅니다.
기신론의 깨달음 체계를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신론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을 본각, 불각, 시각으로 나누죠.
-본각은 내가 원래 부처라는 것이고
-불각은 내가 부처라는 것을 모르는 무명 상태입니다.
-시각은 불각에서 본각으로 가기 위한 과정을 나타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불각과 시각의 경계가 범부각이고
시각과 본각의 경계가 등각입니다.
그래서 범부각에서 등각에 이르기까지는 시각에 속하지만
그것이 본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어차피 모두 불각입니다.
오직 본각에 들어선 것만이 정각
즉 묘각이 정각인 것이지요.
설명이 좀 어렵죠?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등각까지는 수행과 공부로 이루는 것이고
묘각은 진여와 합일한 것이라고 정리하면 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등각 이야기를 해보죠.
이렇게 분명히 설정해 놓은 위가 있긴 하지만
등각 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정작 그렇게 많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당연히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깨달음을 얻은 분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묘각 경지에 이른 분들을 이야기해야지
아직 뭔가 남은 분을 예로 들기는 좀 거북합니다.
또한 수행 측면에서 이야기하려면
열심히 뭔가를 해야 하는 수준
상사각이나 수분각 이야기를 해야지
수행을 다 마친 등각보살 이야기를 해봐야 크게 교훈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등각 이야기는
시쳇말로 재미가 없어서 장사가 안 됩니다.
좀 길지만 경전을 한 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선 구경각에 대한 설명입니다.
보살 제8지부터는 념이 일어나는 생상(生相)을 깨달아 없애 나가는데,
념이 일어나는 곳은 말나식보다 더 깊은 제8아뢰야식에서이다.
그러므로 생상을 깨달아 없앨 수 있기 위해서는
아뢰야식의 상과
그 상을 형성하는 활동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
생상을 다 제거하고 나면
도달하는 불지(佛地)에서
결국 상(相)이 없는 성(性),
념을 여윈 마음 바탕을 보게 되니
이를 궁극의 깨달음인 '구경각(究竟覺) 이라고 한다.
“등각의 경지에 도달한 구경지 보살에게는
아뢰야의 미세한 망념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참다운 본성을 가려
구경지 보살도
모든 대상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또한 “눈 밝은 사람이 얇은 비단으로 눈을 가리고
모든 사물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등각의 경지에 오른 구경지 보살도
일체의 대상에 대해 이와 같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경전을 통해 본다면
등각의 단계는
시각, 즉 수행을 통해 공부가 끝난 것은 맞으나
무의식적인 모든 생각의 잔여물을 아직 털어내지 못해
진여와의 합일 단계인 본각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해야 할 것을 다 했다는 측면에서는 구도의 완성이지만
아직 무엇인가가 남아있다는 측면에서는 아직 불각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등각이 뭐냐?”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나는 의식이다”
“내가 사람이 아니다”를 깨달았다는 겁니다.
내가 형상을 가진 그 어떤 존재나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사건들을 체험하는 하나의 의식임을 깨달은 겁니다.
일체유심조의 법공 세계에 들어서
나라고 알던 유근신(몸)이
기세간(세상)과 다르지 않고
그 전체가 하나의 허상이며
내 마음자리의 투영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압니다.
그 많던 경계가 모두 허물어지니
그게 바로 비이원인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등각을 비이원으로의 진입
호킨스 의식수준 600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등각이 이원성의 세계와의 작별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묘각과 잘 구분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데요,
묘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견성의 경지를 말합니다.
“내가 사람이 아니다”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 아예 없다”를 깨달은 상태이지요.
원래부터 없는 것에 대해
그것이다, 아니다를 깨달을 수는 없겠죠.
텅 빈 허공을 두고
이거다, 아니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제시하는 비이원의 깨달음의 단계는
사실상 3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부분적인 깨달음인 수분각
-전체적인 깨달음인 등각
-그리고 깨달음을 넘어서는 합일 상태인 묘각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기신론의 다섯 단계는
의식의 망념을 제도해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범부각은 전오식의 미망을 생각으로 넘어서는 것이고
-상사각은 의식, 즉 생각의 허상을 넘어서는 것이며
-수분각에서는 말나식을 어느 정도 제압해
성품을 일견하고 아공을 이루며,
-등각에서는 말나식의 덫을 넘어서 아뢰야식 수준에서 법공을 이룹니다.
-마지막으로 묘각에서는 아뢰야식의 남은 찌꺼기를 모두 소멸하고
진여,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말과 글로 정리하면
마치 수학의 공식처럼 딱딱 들어맞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간 존재가 불각과 본각을 모두 지니고 있는
신비로운 존재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듯 선형적이고 단선적인 접근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처음부터 대승기신론의 5위가 아닌
켄 윌버의 홀라키를 알아보았던 것이고
호킨스의 의식지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켄 윌버의 홀라키는
현재까지 인류가 경험해 본 모든 미세한 의식상태를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개념을 동원해 설명한 것입니다.
켄 윌버를 심리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런 집대성을 통해
의식을 보는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켄 윌버의 학문적 업적을 토대로 하려면
우리도 그만큼 공부를 해야 하겠죠.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해요,
그래서 개략적인 체계의 개념만 본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직도 복잡한 수준이지만
그보다는 접근하기 쉬운 호킨스의 의식지도를 가지고
의식수준과 깨달음의 상관성을 들여다본 겁니다.
이런 정도로 부족한 것은 분명히 알지만
모자란 것은 차차 채워 나가기로 하고
그다음으로 불교의 수많은 위계를 단순히 정리한
대승기신론의 깨달음 단계를 본 겁니다.
깨달음의 단계나 의식의 수준척도는
철저하게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추상화한 기준,
즉 생각이라는 겁니다.
현실에는 그런 것이 없어요.
현실에는 하나 하나의 고유한 인간,
업의 집적물인 사건과 사태가 벌어져 있어요.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하기 위해 이런 단계와 척도를 쓰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고 판단해서
어디까지 왔고, 무엇이 모자라고
어떻게 진보시킬지를 궁리하기 위해 쓰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척도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등고선이자 지형지물이자 방위 표시거든요.
그래서 단계와 수준, 척도를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며 재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지표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하나의 깨달음은 그 단계의 이치와 원리를 깨우쳤다는 것으로
분명 깨달음이 맞지만
그 의식수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의식수준의 특질이 체득되어
항구적으로 확고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와 점수, 보림의 개념이 빛을 발하는 겁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무지와 교만에 불과합니다.
이런 교훈을 제대로 주는 것이
바로 등각이라는 깨달음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의식이라는 강을 지켜보는
부동의 주시자인데
이 강은
영원히 변하지만
결코 그대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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