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묘각, 무아견성, 의식수준 700

Buddhastudy 2024. 9. 19. 19:23

 

 

심상이 생겨나서 머무르고 변해가고 소멸되는 4가지 현상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스님

 

드디어 궁극의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차분히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해 보죠.

서광스님의 책을 참고해 제목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인과에 대한 깨달음, 범부각

(2) 본질과 현상의 차이에 대한 깨달음, 상사각

(3) 본질과 현상의 동질성에 대한 깨달음, 수분각

(4) 본질과 현상의 동질성과 차이에 대한 깨달음, 등각

(5) 완전한 깨달음, 묘각

 

우리는 이미 등각 편에서

등각과 묘각의 차이에 대해 알아본 바 있습니다.

한 번 더 반복해 볼까요?

 

돈오입도요문론이라는 경서에 보면

즉색즉공卽色卽空, 명위등각名爲等覺이라는 말이 있는데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안 자리가 바로 등각이라는 말입니다.

이원의 문을 넘어섰으니

不二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어서 그것조차 없는 不一

아직 모르는 상태이며

불일과 불이 사이에 분별이 있어

아직 회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공을 처음 깨달은 것이 등각이라면

묘각은 깨달은 공을 입전수수

즉 몸담은 세상으로 되돌린 경지를 말하지요.

 

흔히 말하죠?

산은 산이다, 산은 산이 아니다.

다시 산은 산이다

산이 다시 산으로 돌아온 경지를 묘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등각을 크게 죽었다고 하고

묘각을 크게 살았다고 합니다.

 

묘각은 이원적 세상을 넘어

공을 깨달은 등각에서 더 나아가

무한한 공, 광대무변한 공이 완전히 드러난 것이고

눈앞에 보이는 경지입니다.

 

유식에서 말하는 의식수준을 기준으로 말하면

묘각은 아뢰야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아뢰야식을 완전히 투과해

인류의 무의식적 업장을 벗어나는 경지이죠.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과거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비추는 깨끗한 거울, 대원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설명한 돈오입도요문론이라는 경전에는

문답형식으로 묘각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경에 等覺妙覺이라 했으니

어떤 것이 등각이며 어떤 것이 묘각입니까?

-: 곧 물질()이면서 곧 공함을 등각이라 하고

물질()도 아니고 공함도 아님을 묘각이라 한다.

또 달리 말하면 두 가지 대립물이 본질이 공하므로

묘함이라 하면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 없음도 없는 것을 묘하다고 한다.

 

여기서 보듯 구름이 없어지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 밝은 해를 보는 것과 같이

일체의 망념이 전혀 없어

무념, 또는 무심이라 부르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묘각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단계들을 우리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각각의 단계가 탁탁 끊어져서

마치 하나의 계단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의식의 진보과정은

참으로 많은 것을 거느리고 진군하는

군대의 행렬과 비슷합니다.

 

행군만이 아니라 전투가 벌어질 때도 있죠,

그래서 진전하는 양상도 정말 다양합니다.

하나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사람에 따라 발달라인이 모두 달라서

그 모습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우리가 대승기신론의 5위를 챙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진보하는 양상만으로 보면

수행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도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발달라인은 묘각 뺨을 치는데

어떤 발달라인은 아예 불각, 문밖의 사람과 비슷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많은 의식의 발달라인들이

모두 일정수준에 도달하고

그 중 영성 쪽 발달라인이 치고 올라가

뭔가를 보고, 나머지를 끌어올리는 식으로 진전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 군대가 진군하는 것과 정말 비슷합니다.

모든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진군하는

근대 이전의 서양군대 같은 모습도 있고

함포사격을 때리면서 비행기를 이용해

적군 후방에 공수부대를 침투시키고 전면 상륙작전을 하는

2차대전의 모습도 있고

네이비실의 침투공격을 통해

적의 헤드쿼터를 초토화한 후 전격 진입작전을 하는

최근의 전투모습도 있습니다.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겁니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달성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경전들에는

기록의 필요와 한계 때문에

너저분한 것을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순하고 명료하게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물론 있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깨달음의 한 단계를 오르는 것은

군사작전의 예처럼 다양한 양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별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치와 원리를 깨닫는 첫깨달음은

분명 알음알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그 변화를 알아채고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보림을 지도해 지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알게 된 것도 지견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흐지부지해져서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까지?

등각까지 그렇습니다.

 

다만 묘각은 다릅니다.

묘각은 진여가 드러나는 차원이라 스스로 압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누군가 인가를 하고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인가할 수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묘각이 완전한 깨달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호킨스가 깨달음으로 제시한 700이라는 수치는

그 위에 계속 높은 단계가 있어서

깨달아도 계속 더 위가 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말하는 깨달음은

물질계, 인간계의 그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런저런 책들을 통해

이 공부는 끝이 없다는 걸 짐작할 뿐입니다.

어쨌거나 인간의 몸을 입은 우리의 최종 목표는

묘각 깨달음입니다.

 

호킨스의 의식척도는

아주 유의미한 전환점이 되는 몇 가지 점수 말고는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됩니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그냥 지도에 불과한 겁니다.

 

호킨스가 지적했듯이

사실 의식 수준의 수치를 수학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

왜냐하면 수치가 높아질 때

의식이 성질의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해요.

 

비유하자면

옷의 재질, 옷감이 변해버리는 것이죠.

마치 백금과 납이라는 전혀 다른 금속을

원자량, 전자의 개수로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또한 호킨스는 의식수준을 묘사할 때

유의미한 표현이 되려면 맥락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맥락이란 바로 Power, 진리의 힘이죠.

힘이 커질 때, 낮은 수준에서는 타당했던 것이

더 이상 묘사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됩니다.

묘각은 바로 의식이 맥락 자체가 되는 경지인 것입니다.

진여와의 합일로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맥락과의 차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승기신론의 5위를 모두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정리해 볼까요?

우리는 왜 이 다섯 단계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죠?

 

그 첫째는

공부의 최종목표인 본각

즉 묘각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후에 뭐가 또 있다고 하는 경전도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우리가 인간으로 사는 이 물질계에서는

묘각이 최종적인 깨달음의 경지이고

우리 공부의 최종 목표입니다.

이걸 바로 세우지 않은 그 어떤 구도와 수행도

다 바르지 않은 헛된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최종목표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할

중요한 전환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각각의 전환점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맞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물론 최종목표로 가는 수행은 거의 모두가 비슷하고

지금은 이거하고 나중에는 저거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만

초점을 집중해야 하는 핵심 범위와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단계의 설정을 통해서

공부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의 자리,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보는 그 자리에 가지 않은 이상

모든 앎은 무지와 교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태도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궁극에 이르기까지는 앎이 앎이 아님을 알고

무조건 겸손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습니다.

표지와 접근법들에 대한 모든 탐색을 포기하고

그것을 직접 보아야 합니다.”

-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