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다양한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절대 동등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의식· 무의식의 수준에서 깨달은 상태다.”
<현대심리학으로 풀어본 대승기신론>, 서광 스님
우리는 대승기신론의 깨달음 공부 수준인
범부각, 상사각, 수분각, 등각(구경각)과
공부를 끝내고 본각으로 합일한 묘각,
다섯 단계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분각에 대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매 단계의 깨달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왜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처음 깨달음을 의식수준과 연결해 이해할 때
우리는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용어는 아마도 사람마다
매우 다양한 뜻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순서가 바뀐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의식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실용적 관점이라고 할게요.
한국인의 DNA에 맞게
시험과목이 뭔지에 앞서서
시험점수부터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눙칠 수 있겠네요.
일단 막연한 깨달음에 대해
깨달음에도 수준이 있고
그것이 이렇다는 등고선을 그려놓고 이해하면
약간은 입체적인 깨달음의 여정이 그려질 겁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수준과 단계부터 이야기하는 겁니다.
수분각은 대승기신론 수행단계인
시각 4위 중 3위에 해당하는, 하나의 분수령입니다.
사실상 처음 맞닥뜨리는 비개념적인 앎이자
비이원에 발을 담그는 체험입니다.
앞서 상사각을
처음으로 일체유심조에 발을 담근 단계라고 했죠.
하지만 상사각은 개념적인 이해입니다.
바깥에서 집 안을 본 거라고 비유할 수 있겠네요.
수분각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분각은 안에 들어가서 본 겁니다.
그래서 별칭으로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습니다.
견성(見性)입니다.
견성은 깨달음이죠.
다만 처음, 시작, 맛을 본 거라는 뜻으로
수분각을 초견성(初見性)이라고 이름합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앎의 내용은 궁극의 진리를 맛본 것이 맞다는 뜻입니다.
수분각을 현상의 동질성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해서
‘마음자리’라고도 합니다.
상사각이 현상과 본질의 차이
즉 생각의 허상에 대한 깨달음이라면
수분각은 현상과 현상, 현상과 본질의 동질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
말이 조금 어렵죠?
일단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수분각은 의식 수준을 넘어선 깨달음입니다.
현대 심리학으로 연결해서 말하자면
무의식 수준까지 들어가 뭔가를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개념을 안 것이 아니라
개념에 가리워졌던 실체를 직접 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상과 본질의 동질성을 알았다는 말은
그것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렵죠?
말이 말이 아님을 직접 아는 것,
직지의 단계라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서로 다른 심상과 이름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생각, 개념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존재이며
허상이라는 사실을 의식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무의식수준에서도 어느 정도 깨달은 상태이다.”
‘생각과 개념이 만들어낸 인식론적 존재이며 허상이다’ 라는 것은
상사각과 비슷하죠?
그런데 한 발 더 나아가
이것을 의식이 아닌 무의식 수준,
즉 의식보다 깊은 수준에서 깨달은 것이 달라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구요?
아닙니다. 완전히 달라요.
세상이 뒤집어진 걸 본 겁니다.
전도몽상을 깨달은 겁니다.
다양한 사물과 사건의 외형적인 차이를 넘어서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식, 무의식수준에서 깨달은 겁니다.
그냥 세상이 하나란 걸 안 겁니다.
일체유심조를 직접 체험한 거죠.
이쯤 되면
“아니 깨달음인데 왜 초견성의 초를 붙인 걸까?”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엄연히 진리에 이른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죠.
왜냐하면 수분각은 그 수준에 이르는 번뇌를 없앴기에
진여를 잠깐 본 것은 맞지만
완전히 깨닫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분적인 견성(見性)이라고 한 것입니다.
화엄 10지 중 초지보살을 견도위(見道位)라고 하는데
이것이 부분적으로 불성(佛性)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10지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고
그 상태를 수분각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부터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진리, 불성, 성품, 진여를 본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요?
그것은 궁극의 깨달음 자리인
비이원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흔히 성품을 보았다는 것, 성령이 임재했다는 것과 동급인,
깨달음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 등각이라는 구경각의 단계가 있기 때문에
이 깨달음은
분명 제한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이원을 체험했으나
그 정도에는 한계가 있는 깨달음이 수분각이다,
일단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실제로 수분각 체험은
체험을 하는 이에게는 경천동지의 체험입니다.
상사각과도 달라요.
상사각에서도 자신의 일생을 지배해왔던 그 생각이라는 것의 허상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권능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것도 경천동지의 체험임에는 틀림없어요.
그런데 수분각은 생각 정도가 아니라
내가 알던 모든 것이 그게 아니라는 것
그렇게 생겨먹은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설명하기가 쉽습니다.
구지 선사의 손가락이 그거야,
앞뜰의 잣나무가 그거야,
석가와 가섭의 염화미소 사건이 그거야!
여기서부터는 정말 말로 설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깨달음에 이르면
수수께끼처럼 보이던 선승들의 선문답이 정말로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될 뿐만 아니라 내 상황과 입장에 맞는
다른 답을 달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이 연꽃을 들자 가섭불이 미소를 지었어요.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윙크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귀를 후볐을지도 모르죠.
수분각에서 비로소 생각의 허상뿐만 아니라
생각을 벗어난 곳에 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허상임이 밝혀집니다.
일체가 유심조일 뿐만 아니라
일체가 한 몸이자 그냥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워낙 폭이 좁아서
바닷물 한 종지를 떠서 맛을 본 거라고 비유합니다.
바다에 직접 들어가 풍덩 빠져서
바다를 느끼는 것이 궁극의 깨달음이라면
수분각은 간장 그릇에
떠 놓은 바닷물을 맛본 것이죠.
하지만 그래도 바닷물은 바닷물이라
그 짠맛은 같은 맛이 맞습니다.
깨달음 공부를 하면서
이곳에 이른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이 단계의 의식수준에 이르러서
비로소 데이비드 호킨스 지도에 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다고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
우리는 수분각의 의식수준을 대략
540, 기쁨, 감사, 축복의 수준이라고 해둡시다.
보살 10지의 첫 단계인 초지를 환희지라고도 하죠.
환희지는 마음 속에 부처님이 오실 때라는데
기독교의 성령 임재와 거의 같은 표현이고
540의 기쁨과 일맥상통합니다.
수분각은 서양의 스승들이 가르치는 내용에도 흔히 나오는데
아디야 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라는 책 제목의 깨어남이
바로 초견성, 일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르지예프는 깨달음 여정을
“계단을 만나고, 계단을 올라서야, 길에 들어선다”고 하는데
여기서 계단을 만나는 것이 범부각
계단을 오르는 것이 상사각
계단을 올라 문턱을 넘어 진짜 길에 들어선 것이
수분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동양의 스승으로는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가 계속 강조하는
“내가 있다는 느낌”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 단계에 해당합니다.
마하라지는 환의 마지막 발자국이자 실재의 첫발자국이라고 표현합니다.
마하리쉬가 소개하는 깨달음 7단계에서도
4단계인 입상지(入常地),
진아를 깨달은 경지로 연결됩니다.
수분각에 이르러 드디어 수행의 입문이 아닌
깨달음의 입문에 들었다는 측면에서
수분각은 하나의 경계를 형성합니다.
모든 깨달음이 그렇지만
수분각만큼은 처음으로 만나는 직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구구한 설명 없이
단도직입으로 자신의 앎을 표현할 수 있죠.
정묘적인 신비체험이나 변성의식 상태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범부각, 상사각, 수분각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한 단계가 엄청나게 많은 앎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키워드 몇 개로 요약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구도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들에게 그 내용은
각자 다르고, 경우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비추입니다.
그래서 키워드만으로는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르지예프는 단적으로
혼자 힘으로는 계단을 오를 수 없다고 했죠.
사람마다 어려운 단계가 모두 다르기는 하지만
제 경우에 수분각이 가장 어려웠던 이유가 있습니다.
범부각은 신심과 태도가 문제일 뿐이고
상사각은 정진과 이해가 어렵다면
수분각은 그런 것들로는 범접하기 어려운
담 너머의 영역을 보는 것
수분각 직전까지의 접근방법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앎의 내용도 다르고, 접근방법도 다르니
열심히 했던 수행자들도
이 단계에 오면 많은 고초를 겪습니다.
여기에 뭔가 진실이 있습니다.
제 체험으로 보면
이 깨달음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라진 자리에 성령이 임재하는 거라고 하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할 수 없어서 어렵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분각에 이르면서 우리의 수행은
본격적으로 에고와 맞닥뜨리고
에고가 쌓은 생각의 틀,
즉 세상을 보는 우리의 세계관과 직접적으로 대결하게 됩니다.
앞서 지관수행으로는 잘 가봐야 상사각이라는 말에서 이해할 수 있듯이
수분각은 본격적으로 법공을 문제 삼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수분각 자체가 아공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 내가 있다”입니다.
여기서 “지금 여기”를 제거하면
“내가 있다”가 남는데…”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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