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삼법인의 세계

Buddhastudy 2024. 10. 8. 19:33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니

생겨나고 소멸하는 법이다.

생겨나고 소멸함이 그치면

소멸의 고요가 즐거움이 된ㄷ.

-열반경

 

 

 

불교의 문패라고 할 정도로

가장 보편적인 진리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타낸 것이 삼법인입니다.

세 개다, 네 개다, 또는 초기 경전에는 없다 등의 논란이 있지만

부처님의 교서를 정리한 것이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삼법인은

제행무상 제법무와 일체개고 또는 열반적정을 들며

대부분의 경전에서는

네 가지를 무상, , 무아, 열반의 순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초기 경전에는 주로 무상, , 무아를 이어서 설명하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그 순서에 따라 내용을 구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행무상]입니다.

제행무상의 뜻은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무상이라는 사자성어를 알고 있을 정도로

무상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불변하는 것 없이 사라지니, 덧없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무상을 한 계단 더 내려가서 관찰하면

엄청난 세계관의 변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든 것은 변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순간순간 생멸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휴대폰은 그대로 있는데

방금 전의 휴대폰을 구성하던 분자 구조 속의 원자 배열은

방금 후의 그것들과 달라졌습니다.

 

이전 것과 그다음이 다르다면

그것을 같은 휴대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볼까요?

불교적 표현으로 찰라생, 찰라멸이라고 합니다.

 

감지할 수 없는 짧은 순간을 찰나라고 하죠.

그 짧은 순간 번뜩이고

그다음으로 넘어가 또 번뜩입니다.

 

과연 이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그 찰나의 관점으로 보면

그냥 원자와 분자들의 구성이 반짝거린 사건이 아닐까요?

 

더 나아가 그 찰나라는 순간이

극단적으로 짧은

아예 있지도 않은 짧은 시간에 수렴한다면

과연 찰나에 생멸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내 몸의 그림자가 잠시 후 바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거나 광원이 바뀌면 그림자는 바뀝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죠.

 

하지만 내 몸은 어떨까요?

내 몸도 순간순간 바뀌며 성장하거나 늙어갑니다.

하지만 이건 좀 문제가 됩니다. 그렇죠?

 

하루살이나 나팔꽃이

며칠 사이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매일 마주 보는 건물이나 거리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간의 규모에 하나의 틀을 만들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140억 년이라는 우리 우주의 나이는

거의 영원이 되며

아주 짧은 분초 단위의 사건은 순간이 됩니다.

 

하지만 영원과 순간 모두

변하고 사라집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의 관점에 따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뿐이죠.

 

이것이 우리 인식의 맹점을 형성하기 때문에

시간차 공격에 당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잠시 있다 사라지건만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 단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도 못한다는 것이죠.

 

이렇듯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들을 통해

부처님은 일체의 개고를 설하게 됩니다.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만물은 성주괴공 생주이멸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인간은 생로병사에 잡힌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제한된 상황 자체가 곧바로 고통인 것입니다.

 

고통은 영어로는 Suffering으로 번역되며

불교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해당하는 4성제

고집멸도의 첫 번째이기도 합니다.

 

서양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불교를 바라볼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이

바로 모든 것을 고통으로 이해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고통의 문제는

불교의 관점과 접근 방법에서

중요한 내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고통의 원어를 해석하는 견해 중에는

고통이 아니라 [불만족]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통보다는 강도가 조금 낮은 뉘앙스로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무상과 연결된 해석으로

영원한 것이 전혀 없으니

이 세상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문제는

불교적 시각에서 매우 중요한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분명 세상에는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상황이 있습니다.

결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괴로운 일도 있죠.

그런 세상에서 기왕이면

기쁘고 즐거운 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까요?

 

문제는 그 행복의 상대성에 있습니다.

기쁨이란 슬픔에 따라 규정되며,

즐거움이란 괴로움에 의거해 규정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에

항상 불행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것이죠.

절대적인 행복을

이 무상한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철저하게 파고들면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이유조차

그저 불행의 두려움을 벗어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제행무상의 법 앞에서는 일시적일 뿐이니

궁극적인 즐거움도 진정한 해결책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 또한 영원하지 않으므로

세상은 고통뿐이라는 염세적 관념조차

헛된 생각으로 인한 고통일 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세상을 진실하게 보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범위와 강도가

결국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의식 수준이기도 합니다.

 

고통을 인지하는 길이

결국 진리를 찾아 나서는 계기를 만들고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가

깨달음의 바른길을 찾게 하는 토대가 됩니다.

 

 

[제법무아]의 교리는

연기법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제법)이란 세상 만물 삼라만상을 지칭하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란 생명의 변화를 벗어난 영원불멸의 존재인 실체

다른 것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본체를 뜻합니다.

이와 같은 실체, 본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의미가

바로 제법무아입니다.

 

(무아)는 원어인 범어에서 보듯

아나트만, 즉 아트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트마는 힌두이즘에서 말하는 개별적 실체입니다.

개별화된 브라흐만인 아트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자아와 대비해

절대 변하지 않는 초월적인 자아를 말합니다.

 

불교는 인연화합과 찰나생멸이라는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아트만을 부정합니다.

 

특히 초기 불교에서 나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오온작용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들의 뿌리는

감각과 지각의 육근과 대상인 육체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인연 화합을 고려하지 않은

절대적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오온개공이 설해집니다.

이것을 (인무아)라고 하기도 합니다.

인간 자신 속에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은 아집일 뿐

그런 것이 없다는 깨달음이죠.

 

제법무아는 법무아로 확장된 가르침으로

존재하는 만물에는 각각의 실체성이 있다고 보는 법집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하는 깨우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아는 고유한 실체성, 자성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대승불교에서는 비었다는 뜻의 공을 써서

인무아를 아공,

법무아를 법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인무아든 법무아든

그것이 모두 제법무아에 포함되는 것이며

불교는 최고의 깨달음을 무아, 견성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아의 가르침을 곧 깨달음의 지표로 활용됩니다.

 

이제 왜 삼법인이 사법인이기도 한 것이 이해가 되나요?

무상과 무아의 깨달음으로

[일체개고]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그 자리가 바로 [열반적정]이기 때문입니다.

 

생사윤회의 원인이었던 갈애가 사라지고

일체가 제자리로 돌아가 고요하여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는 평상의 상태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 추구하는 결론입니다.

 

열반적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연기법에서 삼법인으로 넘어온 이유와

그 결론을 정리해 보기로 하죠.

 

우리는 세계관의 전환, 연기적 사유로의 전환이

그저 접근 방법이나 이해의 수준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깨우침의 영역, 깨달음의 영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인식의 틀, 생각의 구조는

우리의 삶을 규정합니다.

그것은 몇 마디의 진리로 깨질 수도 있지만

웬만해서는 바꾸기 힘든

너무나 어려운 변화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연기법은 상호의존이고,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이고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거래

하는 수준의 경박한 이해로는

저런 생각의 틀을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흔히 말하는 지관수행, 정혜쌍수의 한 축이 바로

연기법의 이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고요한 마음을 추구하는 수행과

명료한 이해를 추구하는 수행은

항상 함께해야 하는데

그 이해의 내용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공부의 수행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연기적 각성입니다.

 

연기법을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초입이

바로 삼법인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으로 다 설명된 듯한 내용을

다시 삼법인을 들어 정리해 본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이해를 깊게 하는

몰입하는 연기법으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세상을 알게 된 자는 시체를 찾았느니라.

시체를 찾은 자는

세상이 그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도마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