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화엄의 법계

Buddhastudy 2024. 10. 9. 18:52

 

 

한 알의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

 

 

화엄경의 연기법이 다른 것과 다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화엄경을 통해

연기법의 다채로운 모습과 표현법을 보고

좀 더 깊이 있게 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겁니다.

 

제목을 화엄의 법계라고 한 것은

특별히 화엄경에는 법계라는 용어가 쓰입니다.

 

[]라는 단어는

우리가 연기법 동영상의 맨 처음에 이야기했던

세계관의 그 계입니다.

화엄에서는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제법무아가 아니라

제법계연기를 설파하는

다소 스케일이 커진 표현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는

깨달음 수준 고찰에서 보았던

화엄 10지와 설화적인 선재동자의 이야기인데요.

그것 말고도 아주 흔히 접하면서

그게 화엄의 이야기인 것을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바로 티끌 하나에 전 우주가 있다는

의상 스님의 법성계의 한 구절이죠.

연관된 구절을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전체이고 여럿이 곧 하나이다.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으며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다 들어있다.

끝이 없이 긴 시간이 한 마음에 들어가고

한 마음을 먹으면 그것이 곧 무한한 시간이다.

 

초기 불교의 오온개공이나 대승의 삼법인에 비하면

화엄의 연기사상은 부정관

즉 없음을 말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뿌리는 같지만

화엄의 이 같은 분위기 때문에

우리는 화엄법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인 법계연기는

인드라망 비유에서 그 묘사의 극치를 달립니다.

인드라망은 이 세상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제석천 궁궐을 덮고 있는 그물망입니다.

그물코마다 보석이 박혀서 다른 모든 보석들을 반사합니다.

하나가 전체를, 전체가 하나를 반사합니다.

이것을 중중무진 세계의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모든 현상은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며

전체와 하나가 담 없고 서로 겹치고 서로 스며드는

존재의 실상을 묘사합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포함되고

서로 따로이면서 서로를 포용하는 원융, 무애가 바로

화엄의 법계연기의 모습입니다.

 

막힘과 분별과 대립이 없으며

일체의 거리낌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

원융무애를 설명하기 위해

화엄경은 육상원융을 설합니다.

 

(육상원용)은 화엄법계의 인식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돼 있습니다.

 

총상은 여러 특성을 포함하고 있는 전체

별상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특성

동상은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이루어진 전체의 모습

이상은 여러 모습이 서로 어울려 전체를 이루면서도 잃지 않고 있는 각각의 모습

성상은 여러 역할이 모여 이루어진 전체의 역할

괴상은 여러 역할이 모여 전체를 이루면서도 유지되고 있는 각각의 역할을 말합니다.

 

이 여섯 가지 상은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각각 그 나름의 상태를 잃지 않고

서로 걸림없이 원만하게 융합되어 있다고 하여

육상원용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없음이 아닌 있음의 모습을 설명하는 화엄의 법계는

어떻게 연기, 공과 연결되는 걸까요?

 

연기법에서 모든 사물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것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든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인연으로만 성립됩니다.

이렇게 티끌에서 시작해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중첩되는 연기의 그물망이 바로 화엄의 법계입니다.

 

삼법인에서 우리는 연기법을 통해

우리가 현실로 인정받은 전도몽상의 허상을 뒤집기 위해

무상과 무아를 세계관으로 영입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화엄을 통해

제대로 된 연기법의 세계관을 확정해

실상의 세계를 그려보는 단계에 진입합니다.

 

단순히 허상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길을 화엄이 제시하고

그래서 화엄에서는 연기를 性起(성품 성, 일어날 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화엄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당나라의 법장 스님은

여러 비유를 들어 화엄법계를 묘사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울방의 비유, 금사자상의 비유인데요.

 

사면과 천장, 바닥에 거울이 설치되어 있는 방에서

불상과 횃불을 방 한가운데 놓자

한 거울 속에 다른 거울의 상이 들어오게 되어

무수히 많은 불상과 횃불의 상이 거울에 비춰지게 된다.

이것이 거울방의 비유입니다.

 

한 거울에 다른 모든 거울의 상이 들어와 합쳐지고

모든 상들이 서로 교체하지만

하나하나의 상이 다른 상의 형성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인데 연못마다 달이 비추이는 월인천강의 비유죠.

우리 각자가 전 우주의 드러남이라는 설명입니다.

 

나는 없다라는 것이 내가 전체다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인데요.

형식 논리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신비로움이 그 안에 있습니다.

 

금사자상의 비유도 마저 함께 간단하게 볼까요?

금으로 만든 사자의 겉모습은 사자입니다.

하지만 금에는 타고난 성품이 없고

만든 사람이 인연에 따라 사자의 모습이 나왔을 뿐입니다.

이것을 사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금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겁니다.

만약 우리가 사자의 형상에 집중한다면

금은 잊혀질 것이고,

형상이 아닌 본질을 본다면 금이 보일 것입니다.

 

법장은 이 비유를 통해

화엄의 핵심 개념인 사사무애와 이사무애를 설했는데

사법계란 드러난 현상,

이법계란 본질의 세계를 의미하죠.

 

깨닫고 보니 이사무애, 본질과 현상 사이에도 걸림이 없고

사사무애, 현상과 현상 간의 차이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를 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화엄의 연기법은

(상즉상입)하는 존재의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수렴됩니다.

 

간단히 말해 (상입)이란

사물이 서로 융합하는 것이고,

(상즉)은 겉보기에는 별개의 사물 같지만, 그 본체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상입은 이미 연기법의 초입에서 보았던

상호의존과 같은 뜻입니다.

모든 사물은 수많은 인연에 의해 상의적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죠.

 

틱낫한 스님의 법문처럼

종이 한 장에는

나무와 햇빛, 땅과 공기와 거름,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무수한 인과 연을 확장해 나가면

종이 속에는 우주의 모든 요소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을 (상입)이라고 합니다.

 

(상즉)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공과 사건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용어입니다.

앞서 본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를 기억하면 됩니다.

공간적으로는 하나의 티끌을 이루기 위해

무한한 우주의 작용이 함께하며,

시간적으로 무한한 세월이 티끌에 응축되어 있다는 비유입니다.

 

매우 시적인 비유이기도 합니다.

바다가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바다라는 비유는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흔히 상즉을 분별하지 않고 보는 지혜라고 합니다만

이 지혜는 철저한 깨우침 없이는

현란한 수사일 뿐입니다.

 

양형진이 쓴 <산하대지가 참빛이다라>는 책에는

효모와 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을 빚는 데 쓰는 세균이 효모입니다.

그 효모와 인간인 나는

이렇게 현저하게 다른 존재처럼 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인과

지금의 효모를 있게 한 원인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효모 없이는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효모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즉)은 수직적, 시간적 측면을 제거하고,

(상입)은 수평적, 공간적 측면을 제거해서

오로지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우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우리의 시공간 의식, 무의식의 틀을 허무는

세계관의 전환입니다.

 

화엄의 연기는

적정의 세계와 일어난 세상을 함께 설명합니다.

소극적인 부정의 세계관을 넘고

있고, 없는 단편적인 생각을 넘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하나인 세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세계를 알려주는

연기법의 도약입니다.

 

 

꽃 한 송이가 꺾이면

전 우주가 진동한다

-화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