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큰 도입니까?”
“너를 무시하는구나”
진실한 법계가 있다, 혹은 없다
이것이 보이느냐, 저것이 들리느냐, 이것이 느껴지느냐?
선사들의 질문이 바닥에 마구 떨어집니다.
있다, 없다는 것이 모두 환이라면서
왜 그것이 문제가 될까요?
진실한 법계는
그 자체로 이미 실체가 드러난 것이고
그 의미와 소리 또한 내재해 있습니다.
우리는 늘 분별로서
있다, 없다라는 의미의 주의를 쏟기 때문에
실재를 못 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의 분별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우선 의미를 제거해 보죠.
그러면 법계가 있다, 없다는 문제는 사라집니다.
환인 것이죠.
이제 그 소리의 음운과 성조만 남았습니다.
실제는 이 음운과 성조와 함께 섞여 있습니다.
음운과 성조도 제거해 봅시다. 그러면 뭐가 남죠?
말의 뜻을 제거하고, 그 소리의 굴곡을 제거하면 아무것도 없나요?
정말로?
그럼, 그 의미와 소리는 어디서 났었고 어디로 간 겁니까?
이렇게 묘사할 수 없고,
말로는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진실한 법계입니다.
이원적 분별의 생각이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곳이어서
은산철벽입니다.
그래서 언어 이전, 생각 이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이렇게 어렵게 들리는 걸까요?
사실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로 구성되는데
생각으로 생각 이전을
언어로 언어 이전을 헤아리니
알 수도 없고 어렵게 들리는 겁니다.
오히려 단순합니다.
너무나 단순하기에
이미 너무 복잡하게 된 우리가 감을 잡지 못하는 겁니다.
금강경을 죽어라 열심히 읽던 중에
촛불을 꺼버리자 깨달았고
수년을 모르다가 기왓장 깨지는 소리에 깨달았고
비 오는 날 개울을 건너다가
자기 손이 흔들리는 걸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이야기들이 가리키는 것은
모두 생각 이전, 언어 이전입니다.
생각으로 분별하면 결코 안 보입니다.
선은 감을 잡는 공부입니다.
직관적 이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말과 글의 의미를 따라다니면
환상의 체계, 의미의 체계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각 이전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마주칠 수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재는 텅 비어 있으며, 말할 것이 없고,
모두 하나이고,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해석하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못하고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분별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마음공부 자체가 실재에 대한 에고의 저항이 되어버립니다.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의식적으로 굳어진 그것을 계속 두들겨 깨야 합니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 표현으로 하자면
[망치질]을 하는 겁니다.
망치로 두들겨도 잘 안 깨집니다.
하지만 계속 두드리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망치가 바로 선입니다.
아닌 것 같아도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말과 글, 생각으로는 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가리키는 방식은 달라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깨어나는 경우가 판이하게 다른 것 같아도 그 원리는 같습니다.
균열이 나 있는 생각의 구조물이
좋은 인연을 만나는 과정에서
틈이 벌어지거나 무너져 내려
그 안에 있던 성풍이 드러나는 것이 깨어남,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선문답을 보고 깨어나고, 깨닫고 하는 것은
단순히 묻고 답하는 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상당한 망치질을 통해 근접해 있었던 것입니다.
/선 공부의 초점은 사실상 각성 연습입니다.
들어 보이는 꽃이 성품이 아니라
그 꽃을 바라보는 [각성]이 바로 [나]입니다.
손가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손가락과 달을 보는 나를, 내 스스로가 보는 겁니다.
의식이 스스로를 알아채는 겁니다.
보는 자를 보는 겁니다.
이것이 선 깨달음의 원리입니다./
성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 성품입니다.
대상에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나를 보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보이고 들리는 것도 모두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릉 법왕사에서 탄허스님이 법상에 올라
해제의 법문을 하실 참이었습니다.
전강이라는 스님이 탄허 스님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스님, 지금 뭘 하려고 하십니까?
스님이 법상을 향하기 전에
개울 건너 까치가 이미 다 설해 마쳤습니다.”
탄허스님이 그날 법상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까악까악 소리 내며 까치가 전해준 전언이 있다고 올라가도 될 일이었지만
제자의 용기를 가상하게 보셨던 탄허 스님은
까치가 법문한 것을 알려준 전강에게 미소를 지으셨겠지요.
/보고, 듣고, 만져지는 모든 것이 성품인데
사실은 대상이 아니라
보고 듣는 주체가 성품이라는 겁니다.
대상을 통해서 자신을 깨닫는 거죠.
까치가 울 때 그 소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인식하는 자신을 아는 겁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고,
이것을 [회광반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까치 소리를 들었다면
더 이상 다른 말은 모두 쓸데없는 군소리라는 것이 전강 스님의 말입니다.
큰스님을 단상에 못 올라가도록 한 엄정함과 치열함에서
우리는 회광반조를 봐야 합니다.
자, 이제 ‘보는 자를 본다’는 화두를 들고
다음 선문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다르게 보일 겁니다.
중이 물었다.
“어떤 것이 본래의 면목입니까?”
대사가 눈을 감고 혀를 뽑았다가 다시 눈을 뜨고 혀를 뽑았다.
중이 다시 물었다.
“본래부터 그런 많은 면목이 있습니까?”
“여지껏 무엇을 보았는가?”
어떤 중이 암자에 들어와서 대사를 꽉 잡으니 대사가 말했다.
“사람 죽인다, 사람 죽인다”
“소리는 무엇 하러 지르십니까?”
“누가?”
“빛을 보면 마음을 본다고 했는데 나룻배를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나룻배는 그만두고, 어떤 것이 마음인가?”
스님이 답 대신 말없이 나룻배를 가리켰다.
'IAMTHAT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IAMTHATch] 현대과학의 세계관 (0) | 2024.10.15 |
---|---|
[IAMTHATch] 유식의 법계 (0) | 2024.10.14 |
[IAMTHATch] 화엄의 법계 (0) | 2024.10.09 |
[IAMTHATch] 삼법인의 세계 (0) | 2024.10.08 |
[IAMTHATch] 선과 깨달음, 절실함의 정도 (0) | 2024.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