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즉상입의 비유: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통해 근원은 하나이지만 분별로 인해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00:07]. 이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법계 연기: 세존의 연기법에 화엄우주의 상상력을 더해 전 우주, 전 존재 간의 연기를 설명하며, 이는 형상과 이원론적 세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접근법을 제공합니다 [00:36].
- 색즉시공공즉시색: 의상대사의 법성계에 나오는 "일미진중함시방"과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표현을 통해 색즉시공공즉시색의 법계 연기적 표현을 설명합니다 [01:05]. 이는 공간적으로는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 시간적으로는 찰나의 생각 속에 영겁이 담겨 있음을 의미합니다 [01:32].
- 깨달음: 티끌과 한 생각에 대한 설법이 비유가 아닌 정확한 사실임을 인지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강조합니다 [02:30].
- 수행으로서의 연기법: 상즉상입을 통해 시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연기법을 수행의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03:50].
- 상호의존성: 세상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설명하며, 이는 불교의 연기법뿐 아니라 다른 철학적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개념임을 언급합니다 [04:14].
- 각성: 연기법을 통해 진실을 보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며, 상즉상입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닫기 위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05:44].
- 생각의 틀: 상즉상입의 연기법 수행은 무의식적인 생각의 틀에 충격을 주어, 시공간의 틀을 허물고 현재에 집중하도록 돕습니다 [07:39].
우리가 흔히 듣는
바다가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바닷물이라는 비유,
즉 근원은 하나인데
분별해서 둘로 다르게 보아서 다를 뿐이지
분별하지 않으면
하나의 일체라는 비유는
상즉상입에 대한 좋은 비유입니다.
드러나는 것에는
일체, 전 존재계가 관여할 수밖에 없다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세존의 연기법에 화음 우주의 상상력을 더해
전 우주, 전 존재계의 연기를 말하게 된 것이 바로 법계 연기입니다.
없게 연기해 오면서 공의 의미는 매우 적극적으로 해석되는데
이 부분이 형상과 이원의 세계에 깊이 물든 우리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말씀보다는
접근하기가 쉬워진 지점입니다.
하지만 법계 연기 수사법이
공의 지향점을 흐리지는 못합니다.
의상대사의 법성계에 나온
일미진중함시방_ 하나의 티끌에 온 우주가 들어있고
일념즉시무량겁_ 찰나의 한 생각이 끝이 없는 영겁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법계 연기적인 표현인 것이죠.
의상의 법성게가 제시하듯 상즉상입은
그 내용을 공간적으로는
한 톨 먼지 안의 전 우주로 표현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찰나의 한 생각에 든, 끝이 없는 영겁으로 펼쳐 나갑니다.
의식 수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들릴 수 있죠.
마법적인 상황에서부터
고도의 문학적 유비일 수도 있습니다.
웬만한 상상력으로는 따라잡기 힘듭니다.
시적인 표현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곧 너이고, 들꽃이고, 곧 우주이니
이 세계는 조화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요
너와 나의 분별이 없는 적멸의 세계다.
당연히 좋음도 나쁨도 없으며, 미움도 사랑도 없으며
즐거움도 고통도 없으며
나아가 삶과 죽음도 없는 하나의 고요한 경지이다.
그런데 마법적이고 시적인 이 비유는
만약 비유가 아니라고 한다면
전혀 다른 국면을 맞습니다.
제 경험으로 본다면
우리는 법성게의 티끌과 한 생각에 대한 설법이
전혀 비유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이라는 지점까지 실제로 갈 수 있습니다.
저 비유가 정확히 사실로 인지되는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입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념즉시무량겁의 수사적 표현이
진실임을 아는 그 자리가
깨달음이라는 선언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즉 시공간에 대한 화엄의 초점에서 상즉상입이
생각의 틀을 부수는 수행의 방편이 될 뼈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멋진 표현으로만 알았던 티끌 속의 전 우주를
이해하고, 탐구하고, 적용하면
우리가 비유로만 알았던 그 생각의 틀,
철두철미 고정된 시공간에 묶인 내 생각의 틀로 바라보았던 세상이
뒤집어진 세계관으로 인지한 습관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즉상입의 방법으로 연기법을 수행한다는 것은
무의식 중에 시공간이라는 생각의 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며
수행의 결과는 그 틀에 충격을 가하게 될 것이고
종국에는 틀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며
내 생각의 틀이 무너진 자리에서 상즉상입이 정말 사실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초입에 듣는 연기법의 설명은
매우 일반적인 이야기로 들립니다.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주로 예시하죠.
상호연관, 상호의존은
불교의 연기법이 아니더라도 많은 철학적 사상, 생태주의적 주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맑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본 명제 한 가지도
바로 상호 연관성입니다.
그래서 상호주의적 세계관을
불교의 연기법과 오버랩해서 이해하는 경향은 매우 일반적입니다.
“종이는 펄프로 만드는데
펄프는 나무에서 나오고
나무는 흙과 물과 공기와 태양 등
수많은 요소의 인과연으로 되어 있다.
또 종이는
여러 종류의 기계와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계속 확대해 나가면
종이 속에 있는 이러한 수많은 요소들
즉 우주의 모든 요소가 그 속에 들어가 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가 듣는 경우는
세상 만물과 세상 만사가 이렇듯 서로 연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한마디로 “착하게 살자”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착하게 살자’는 이야기가
저런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그냥 생각으로만 남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 연기법을 설한 이유는
진실을 보고 깨달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상즉상입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설명이 필요하다면
더 멋진 많은 물리학적 판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기법을
수행법이라고 위치를 바꾸려는 이유는
그것이 명백하게
올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각성의 기초 이해이자
각성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지혜이자
그것을 통해 무지의 틀을 해체하는 각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상즉상입의 설명들이
지금 여기 바로 내 앞에서
하나의 이론이 아닌 사실로 받아들여질 때만
그것은 진리의 힘을 발휘합니다.
그렇게 이어져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저 관념의 유희, 사변적 오락에 불과할 뿐입니다.
연기법이 수행법이 되려면
이렇게 관상의 수준이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계를 구성하는 만법은
서로 인연이 되고, 서로를 배경으로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집니다.
연기된 세계에서는
개개의 실체, 실체의 자성은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상즉상입입니다.
올바로 이해하면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그래서 수행의 방법으로도 아주 좋습니다.
수행이라고 하면
좌선과 명상, 기도와 염불, 관상과 독서를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연기법 수행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사실 수행이란
각성 밖에 없습니다.
모든 수행은 각성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참나, 진여 말고는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각성으로 가는 데 놓여 있는 장애물 중
가장 거친 것이 바로
우리 생각의 틀입니다.
습관적으로 축적되어, 완전히 하나의 개성으로 고착화된
개인적 인류적 사고의 틀은
집단 무의식 수준으로 장애를 드리우며
불교에서는 이것을 아뢰야식에 이르는
무명의 업으로 말합니다.
상즉상입의 연기법 수행은
우리의 무의식적인 생각의 틀에 충격을 가합니다.
상즉은 수직적, 시간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상입은 수평적, 공간적 측면을 제거합니다.
상즉상입은 시간적 공간적 측면을 모두 제거해서
오직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바로 각성에 있을 수 있게 합니다.
자신도 모르던 시공간의 무의식의 틀을 허물고
지금 여기, 현존만 남도록 합니다.
연기법이 정견을 위한 이해의 대상이자
수행의 방법이라는 점을 충분히 수용하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또한 그런 관점의 전환은 매우 어렵습니다.
수행이 어때야 한다 하는 관점도
하나의 생각의 틀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편의 동영상에 걸쳐
상즉상입의 연기법을 알아봤습니다.
연기적 각성을 실제로 활용하기 위해
상즉상입의 연기법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수행 도구에 해당하는 Case Study를
다음 동영상에서 알아보겠습니다.
--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그 ‘원인’은 항상 똑같습니다.
원인은
지금 존재하는, 혹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 온
모든 것, 전부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호모스피리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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