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즉상입(서로 의존하며 걸림 없이 각각 법계의 모습을 나타냄)이라는 개념을 설명.
- 상즉상입의 어려움: 상즉상입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쉽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00:07].
- 육상원융: 화엄종의 육상원융 교설을 소개하며, 총상, 별상, 동상, 이산, 성상, 괴상이라는 여섯 가지 측면을 설명합니다 [01:39].
- 비유원적 진실: 상즉을 깨닫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비유원적인 진실을 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07:09].
- 상즉상입과 연기법 수행: 상즉상입의 개념을 연기법 수행에 적용할 수 있음을 언급하며, 이는 간결한 각성 수행임을 강조합니다 [08:07].
- 결론: 상즉상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적용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08:42].
지금 우리가 여기 이렇게 동영상을
전자기기의 화면으로 보고 있는 일을 가지고
상즉상입을 풀어보고 있지만
설명이 쉬운 것처럼 그것을 깨닫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왜 그걸 깨달으라고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를 꿈꾸며>
한 알의 모래 알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혼을 붙잡는다.
길섶의 풀잎에 전 우주가 응축되어 있다는 느낌은
누구나 가져볼 수 있는 시적인 감흥일 수 있지만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죠.
하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장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이라
Case Study들이 모두 그 방향을 향하고 있죠.
우리는 이미 효모, 푸른 하늘, 우주상수의 미세조정 같은 예를 들어
상즉상입을 이해해 봤습니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인 내용을 가져다 이야기해 볼 차례입니다.
화엄종에는 육상원흉이라는 연기법 교설이 있습니다.
여섯 상이 원만하게 융섭해 상즉상입한다는 것인데
조금 어려운 한자들이 있긴 하지만
상즉상입의 원조격인 육상원융을 빼놓고
상즉상입을 이해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니
이것도 Case Study로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상원용의 6상은
총상과 별상, 동상과 이상, 성상과 괴상을 말합니다.
서로 상반되는 짝을 가진 세 쌍의 명제이지만
상반돼 보이는 명제들이
서로 의존하며 걸리지 않고
각각 법계의 모습을 나타낸다는 설명입니다.
보기 쉽게 정리해 보죠.
총상(총체성) 하나가 일체 만유를 포함하는데
별상(개별성) 또한 각각의 하나가 전체를 이루더라도 서로 각자 존재한다.
동상(동일성) 각각이 서로 다르지만 어긋나지 않고 전체를 이루고
이상(차이성) 각각 어긋나지 않아 보완적이면서도 서로 다르다.
성상(화합성) 개별자가 서로 의존해 전체를 이루는데
괴상(별리성) 이렇게 연기하더라도 개별자로 남아 있다.
화엄의 3대조인 법장 현수 스님은
기둥과 서까래, 기와 등이 모여서 집을 이루는 경우를 들어
6상의 원융함을 설명합니다.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 차근차근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성상과 괴상의 상호 원융함에 대한 설명입니다.
기둥 등이 모이고 의지하는 인연에 의하여 집을 이루기 때문에 성상이며
이렇게 이루어지더라도 기둥 등이 뚜렷이 존재하기 때문에 괴상이다.
기둥과 기와가 집을 이루더라도
기둥은 기둥의 역할을 하고, 기와는 기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기둥은 기둥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집이 형성되니
괴상이 아니면 성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상은 괴상에 의지하며
또한 괴상이어야 비로소 성상이 성립한다.
역으로 집이 있어야
기둥이 기둥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니
성상이 아니면 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괴상은 성상에 의지하며
또한 성상이어야 비로소 괴상이 성립한다.
동상과 이상입니다.
기둥과 기와가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원만히 집을 이루니 동상이고
그들이 하나의 집을 이루기는 하나
기둥은 기둥이고 기와는 기와이니 이상이다.
여기서 가령 서까래와 기와 등이
모두 기둥이 된다면 집은 이루어지지 않으니
이상이 아니면 동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동상은 이상에 의지하며,
또한 이상이어야 비로소 동상이 성립한다.
역으로 집이라는 동일성으로 엮어지지 않는다면
기둥도 없고 서까래도 없으며 기와도 없으니
동상이 아니면 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상은 동상에 의지하며
또한 동상이어야 비로소 이상이 성립한다.
총상과 별상으로 종합하면
기둥, 서까래, 기와 등의 개별자가 모여
집이라는 전체를 이뤄낸다.
각각의 개별자가 집이라는 전체를 이루더라도
그 개별자들은 소멸되지 않고
각각의 개별자들로 남아 있게 되니 별상이다.
각각의 개별자로 남아 있어야
집이라는 전체를 비로소 이루게 될 뿐 아니라
기둥, 서까래, 기와 등의 개별자를 떠나
집이 따로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별상이 아니면 총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별상이어야 비로소 총상이라는 총체성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기둥이나 서까래 기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집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집이라는 전체가 없다면 기둥은 기둥이 아니고
서까래는 서까래가 아니며 기와는 기와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둥과 서까래, 기와에는
이미 집이라는 전체, 집이라는 총체성이 들어와 있다.
기둥과 집, 서까래와 집, 기화와 집이 상즉해야 하기 때문이다.
집이라는 전체가 있어야
비로소 기둥이나 서까래, 기와 등의 개별자가 존재하게 될 뿐 아니라
집이라는 전체를 떠나
기둥이나 서까래, 기와 등의 개별자가
따로 어디에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총상이 아니면 별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총상이어야 비로소 별상이 이루어진다.
집이라는 구조물에서 분명 우리는 서까래라는 부분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집과 상즉하고 있는 서까래이지
그냥 서까래가 아닙니다.
익숙한 관념에 따라 서까래를 집에서 뽑아내 볼까요?
그래도 서까래는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건 그냥 나무 조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서까래가 없으니 집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 지각, 생각들도
35억 년, 140억 년의 조건이 항상 포함된 서까래 들이라
매 순간의 사건이 전 우주의 단일 사건의 드러남입니다.
주체와 대상, 주관과 객관의 이원성으로는
도저히 납득도 수용도 안 됩니다.
그래서 상즉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렇듯 비이의원의 진실을 곧바로 들여다보는 상황입니다.
하나, 둘, 셋의 개수를 셀 때
이미 그 배경은
무한대의 숫자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곧 무한대입니다.
둘은 곧 하나입니다.
나는 곧 전 우주이며, 지금 이 순간은 영원입니다.
이것은 결코 시적인 표현이나 비유적인 교훈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뭔가요?
상즉상입의 마지막 질문은 자연스레
그렇다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귀결에 다다릅니다.
이번 동영상 시리즈의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연기법 수행은 지극히 간결한 각성수행입니다.
바깥을 바라보면 당연히 안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상즉상입의 연기법 수행을 적용할 수 있도록 알려드린 것입니다.
상즉상입의 연기법에 대한 다른 적용 방법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수행법의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내용을 공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상즉상입의 이해를 위해 들었던 사례들을
매일매일의 내 생각, 행동에 직접 적용해 보는 시도는
결코 미룰 이유가 없습니다.
--
만물에 깃든 하나만 보아라.
그대를 헤매게 하는 것은 두 번째이다.
-카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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