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묻는 그대의 답을 하라

Buddhastudy 2025. 3. 5. 19:57

 

 

장수 자선 스님이 낭야 혜각 선사를 시험하느라

<능엄경>의 한 구절을 들어 질문했습니다.

온 세상이 본래 깨끗한데 어찌 갑자기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질문을 받은 낭야 선사가 답했습니다.

온 세상이 본래 깨끗한데 어찌 갑자기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겉으로는 똑같은 말인데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겁니다.

질문한 자는 산하대지가 생긴 이유를 물었고

답한 자는

지금 여기 생겨난 말 속의 산하대지를 묻습니다.

 

한마디 말로

산하대지를 창조한 스님에게

거울처럼 비추어 돌려준 문답입니다.

원래대로 깨끗하기만 하면 이유는 저절로 알려집니다.

 

 

마조가 죽기 사흘 전의 일입니다.

절의 종무 스님이 걱정이 되어 마조를 찾아와 여쭈었습니다.

스승님, 요즘 몸이 어떠십니까?”

일면불 월면불이지

 

일면불은 해의 얼굴을 한 부처로 1800년을 살고

월면불은 달의 얼굴을 한 부처로 하루를 삽니다.

 

마조 스승은

영원한 생명과 하루살이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고 일러줍니다.

저 말은, 마조가 아니고 죽기 사흘 전이 아니라면

그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다는 말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이처럼 선문답은 무게가 전혀 없지만

내가 그 말의 무게를 확실히 느낄 때

와 닿고, 이해되며, 보고 들립니다.

그래서 상황과 문법이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른 절에서 수행하다 온 스님 하나가

절간의 소임을 맡았는데

도무지 큰 스님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모셨던 스님에게 답을 얻어 깨쳤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무엇을 알았는지

법안 문익 스님이 묻자, 감원 스님이 답합니다.

 

제가 청림 선사께 무엇이 부처냐고 물었더니

병정동자가 불을 찾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병정은 육가불로 불에 해당하는데

불로 불을 찾는 격이니

제가 부처인데 그걸 모르고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법안 스님이 듣자마자 말합니다.

틀렸다. 그 질문 다시 내게 해 보거라.”

부처가 무엇입니까?”

병정동자가 불을 찾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감원 스님이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아니 똑같은 말을 들어서 깨쳤다는데

틀렸다고 해놓고선 다시 일러주는 이게 뭘까요?

그냥 복습 효과일까요?

 

막연한 앎은 빈틈을 만들고 쉬이 불순물을 허락합니다.

철저하게 품어 완전하게 익히고 깨지 않으면

알 밖으로 쉬이 나올 수 없습니다.

 

생명 탄생의 순간은 어눌하지 않습니다.

그대는 내 밑에서 몇 년 살았는데 전혀 묻지를 않는구나.”

무슨 이유인가 무엇을 물어야 합니까?”

뭐라 물어야 좋을지 모르겠으면 부처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수가 위산의 입을 막았다.

위산이 말했다.

그대처럼 모든 관념을 싹 쓸어버린 수행자를 앞으로 만날 수 있겠는가?”

 

또한 알았다면 가르침을 거부할 까닭이 없습니다.

석존이 질문을 안 받고, 예수가 기도를 거부합니까?

깨달은 이도 당연히 공부합니다.

앎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이 앎의 아름다움입니다.

 

 

운문이 단상에 올라 말했다.

누구나 자기에게 밝은 빛이 있는데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할 뿐이다.”

운문이 말을 마치자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선이 화두를 공안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을 경전 같은 기준서로 두고

자신의 공부를 검증하라는 뜻입니다.

 

누구도 예외를 두지 않고

알면 아는 것을 드러내어 검증을 받으라고 합니다.

 

남의 생각이나 체험을 빌려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선문답과 화두와 공안은 자기 살림이 되어야 맛을 볼 수 있습니다.

 

 

“312분교가 어찌 불성을 밝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그것으로는 거친 풀밭을 일군 적이 없다.”

부처님이 어찌 사람을 속였겠습니까?”

부처가 어디 있느냐?”

 

직접 보고 나면

말이 거칠다는 것을 쉽게 알지만

말과 글로 풀밭을 일구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삼천리 밖에서 백마의 소문을 듣고 왔는데

와서 보니 어째서 보이지 않습니까?”

그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화상께서 가리켜 보여주소서

가리켜 보인다 하면 교섭할 수 없다.”

 

가르침은 받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받으려 하면 멀어집니다.

가리켜 보이면 손가락 밖에는 볼 곳이 없습니다.

묻는 자가 대답하는 것이 선입니다.

 

 

동산 양개는 어려서 출가했는데

하루는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을 외우다가

얼굴을 만지며 스승에게 물었다.

저는 이렇게 눈, , , 혀를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동산 양개가 죽기 전에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병환이 드셨는데

그래도 병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있지.”

그 병들지 않는 사람이 지금 스승님을 보고 있습니까?”

아니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보고 있네.”

스승님께서는 어떻게 그를 보십니까?”

이 늙은 산승이 볼 때에는 병이란 아무 곳에도 없네.”

 

눈 코 입 달린 사람이 말해보게.

재채기와 기침이 어떻게 병이 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