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의식의 성장, 선의 역할

Buddhastudy 2025. 3. 4. 19:15

 

 

스님께서는 왜 마음이 부처라고 하십니까?”

어린아이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했다.”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마음도 없고 부처도 없다.”

 

길을 넘기 전에는 이런저런 지시물이 필요합니다.

쭉 가다가 오른쪽, 다시 쭉 가다가 왼쪽

그리고 전봇대가 보이면 11시 방향

보통 걸음으로 1분 정도면 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울지도 않고, 안 울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너는 감당할 만한 자가 아니라고 말하마.”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자네가 위대한 도를 깨닫도록 할 것이다.”

 

길을 묻지도 않고 안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거냐고 트집을 잡습니다.

마조 스님은 끝까지 친절하게

감당 못할 제자가 질문을 그만두고 눈 앞으로 다가앉도록 지도합니다.

 

종밀이 지은 <도서>는 선종의 갈래들이

사실은 그 본래의 가르침에서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여러 종파들의 종지를 비교해

말뜻을 달리 쓰는 것과 실제 내용을 정리한 책입니다.

 

이런 책이 나올 정도였다는 것은

그 당시 이른바 교학이나 선불교의 가르침이

말뜻을 가지고

가지를 치고,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할 정도로

교조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절을 나가 무엇을 하려는가?”

여기저기 다니며 얻고자 합니다.”

부처 있는 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고, 부처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거라.”

 

결국 무엇을 깨닫느냐 하는 것이

그 본원이 같음과는 달리

접근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의 이해와 인식에

꽤 많이 의지하기 때문에

나중에 버릴 것이라 해도

관념의 구조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부처가 있는 곳에 머물지 말라는 조주 스님의 이 당부는

교학으로 배우는 관념

즉 구조에 대해 경계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수단에 불과한 것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교학이 아예 없다면

더 볼 것도 없다는 겁니다.

안 그래도 무지한 상황에서

무식을 자처한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교학을 통해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식의 구조적 단계란

사실상 통합적인 지혜의 수준입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에고, 악연이 지워진 정도를 의미합니다.

물론 에고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낮은 구조적 단계에서도

비이원의 체험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여러 날이 지나도 도응이

암자에 있으면서 법당에 내려오지 않았다.

하루는 스승 동산이 도응을 불러 물었다.

너는 왜 법당에 내려오지 않느냐?”

천신이 밥을 보내오기 때문에 굳이 법당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너를 쓸 만한 인재로 보았더니 그런 망상만 하고 있었구나.”

도응아,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무엇이냐?”

도응이 스승의 언지를 듣고 암자로 돌아와 여러 날 정진한 후

다시는 천신이 찾아오지 않았다.

 

선승의 사례에도 이렇듯

낮은 수준의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의식의 구조적 단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부의 횟수가 몇 년이 아니라

아예 10년 단위로

10년 공부, 30년 장좌불와 같은 식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겠습니다.”

자네는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니, 여기서 묵을 수 없다.”

저는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계를 받은 지 얼마나 되나 20년입니다.”

자네는 집착이 없다는 말을 매우 좋아하는구나.”

 

무착은 계를 받은 지 20년이 되었고

아직도 집착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물리적 거리나 정보의 접근이 그때와는 달라서

시간의 단위가 좀 다르지만, 세월의 단위는 여전합니다.

 

이렇듯 험난한 수련을 통해

의식의 구조적 수준을 높여 나가는 작업이

바로 지혜를 구하고 자기를 내려놓는 수행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맑고 밝은 그 자리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죠.

 

 

교학의 이론으로는 깨달음을 제대로 들쳐내지 못한다고 하는데,

교학의 어떤 점에 문제가 있는가?”

그대들 때문에 두꺼비가 사는구나.”

 

운문 스님이 스스로 묻고 대답한 구절에서 보듯,

당시 선승들은 교학에서 뜻을 구하면서도

이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위해

관념 바깥으로 의식을 지향하는 선정을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선 공부는 교학을 자기 몸에 실현하는 수행입니다.

그리고 실행을 통해

이치와 원리가 몸과 마음으로 구현되면

자연스럽게 구조적 수준이 올라오게 됩니다.

체험을 통해 의식 수준을 진보시키는 것이죠.

 

 

다른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무엇이 학인의 본분이지 할 일입니까?”

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다.”

 

그것은 교학이나 문자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 견해, 망상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알면 내려놓고 올라섭니다.

그것이 옷을 입고 밥을 먹는

본연의 일처럼 보일 때까지 해야 합니다.

 

 

조주의 돌다리라고 오래 전부터 명성을 들었는데

와보니 그저 외나무 다리뿐입니다.”

자네가 외나무 다리만 보고 돌다리는 보지 못할 뿐이다.”

무엇이 돌다리입니까?”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어리석은 자는

자기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이리저리 뛰어 애를 쓰지만

지혜로운 이는 그늘 속으로 들어갑니다.

 

다리는 건너야 허물어집니다.

다리를 건너는 것이 다리를 허무는 것입니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화상께서 그러고서 말씀해 보시지요.”

너에게 말해주는 것은 사양하지 않겠지만

뒷날 후손이 끊길까 걱정이다.”

목구멍과 입술이 없는 자가 후손이 되어도

걱정거리는 여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