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뇌과학의 풍경 (1/2)

Buddhastudy 2025. 2. 27. 20:10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다고 믿는 것이 문제다.

-마크 트웨인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말합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뇌에는 신기한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뇌는 그냥 1.5kg짜리 고깃덩어리였다.

뇌를 아무리 해부해 봐도

그 속에 영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자아도 없고, 기억력도 없다.

그런데 그 고깃덩어리로 우주를 이해하고

몇천 년 동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한 거다?

어떻게 물질적인 기계가

지능과 감정과 영혼과 자아를 만드는지

그게 제가 보기에는 뇌과학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인터뷰는 자유 의지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벤저민 리벳 박사가 자유 의지와 관련된 실험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몇백 밀리세컨드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전에

뇌에서는 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의지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인데

사실은 나라는 자아가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뇌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리벳 박사의 실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실험 결과 설명을 위해

두뇌 운동 신경에서 준비 전위가 발생하는 시점을 RP로 표시합니다.

운동 근육이 움직이는 시점을 M으로 표시합니다.

사람이 움직이려는 의지를 내는 시점을 W로 표시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는 의지-> 준비전위-> 운동의 순서가 맞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움직이려는 의지에 의해

운동신경에서 신호가 발생하고

이어서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러나 리벳의 실험 결과는

명확하게 준비전위-> 의지-> 운동의 순서였습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기괴한 결과였죠.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선택을 합니다.

당연히 좋고 싫은 선호가 있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뇌과학에서 선택을 먼저 하고, 선호를 만드는 게 아닐까 하고

실험 결과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 후로 선택이 먼저고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를

합리화, 정당화하는 것이 뇌의 역할이라는 점은

현대 뇌과학에서 어느 정도 굳어져 가고 있는 정설이 되었습니다.

 

자유의지와 선택을

꼭 뇌과학의 주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리벳 박사의 실험은

양자역학의 이중 순리 실험처럼

하나의 기념비적인 전환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심리학 중에서도 생리학을 접목한 실험 과학인 뇌과학이 발견해낸 중요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뇌과학이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주창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대식 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선택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치면

그 당구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단일한 인과관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관계가 합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김 교수는 이것을 [선택의 풍경]이라는 말로 은유합니다.

산꼭대기에서 공을 하나 굴리면

공은 당연히 아래로 굴러 내려올 겁니다.

그런데 산의 풍경에 따라 공이 굴러 내려오는 모습은 모두 다르겠죠.

즉 산 위에서 공을 굴리면

내려온다는 프레임은 선택돼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리벳 박사의 실험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서구 근대 철학의 합리주의가 존재하는 기반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또한 매우 위험한 발견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선택과 책임의 문제 정도가 아니라

자유의지 주체, 즉 자아라는 것이

정말로 모호한 실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해서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들은

매우 많은 다른 이유들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나누어 살피면

사실상 우리는 매순간마다

수백수천 가지 이유들로 이어진 선택을 합니다.

앞서 본 뇌의 합리화는

이런 선택들의 이유를 또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오늘 점심에 짜장면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설명

그 선택의 이유들에 대한 메타 선택

그것들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으면

그것이 바로 내가 됩니다.

그냥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그럴싸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바로 나인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나와 자아가 연결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정리하면

선택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이유들을 연결해 만들어 놓은 이야기들이

바로 나를 설명합니다.

이것을 내가 있어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이

자아의 정체입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과연 사실일까요?

사실에 대한 판단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착각이 아닐까요?

이게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가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선택하고

그 선택의 이야기가 나라는 사실은

자유의지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자유의지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굳이 왜 이런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일까요?

뇌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면 저절로 잘 굴러가지 않을까요?

산의 모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은 잘 굴러가지 않을까요?

굳이 산의 모양을 바꾸려는 선택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자유의지와 직결되는 근대적 개념이 바로 [책임]입니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우리 사회를 이루는 근간입니다.

 

나는 내 생각과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법적인 성인이 되면 행동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최소로는 도덕적 책임이고 명시적으로는 법적 책임이며

최대한으로는 윤리적 책임입니다.

 

인간에게는 선택에 대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의지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 후천적 능력이 아니라

그냥 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많이 달라집니다.

 

물론 책임의 한도는 고려됩니다.

정신이 망가진 사람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근대와 전 근대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전 근대와 근대의 차이가 겨우 이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바보를 가르는 기준의 차이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뇌과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출연해 발견한 것이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고

자유의지라는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하는 거나, 선택을 결정하는 거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거라면

그 따위 것을 왜 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뇌과학의 자유의지가 없다는 발견은

인간의 자아를 선택의 주체로 놓는

어설픈 가정을 어설프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심오한 발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관점의 전환이기도 합니다.

[비토권]입니다.

리벳 박사는 비토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의식적 의지는

이미 발생한 움직임을

중간 시점에 중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곧 의식적 의지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움직임을 감지한 후에

이를 지속하여 근육이 움직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이를 중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뇌과학의 발견에 따르면 우리는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선택은 조건에 따라 일어납니다.

하지만 만약

그 선택이 하나의 조건화인 것을 이해하고 선택의 과정을 인지한다면

그 선택을 포기, 중단할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조건적인 선택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조금은 더 자유의지에 가까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Free from Conditions, 조건들로부터의 자유

 

실제로 김대식 교수의 독일 시절 지도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는 자유의지는 없지만

적어도 Free un-Will은 있을 것 같다고 말이죠.

 

내 머리 안에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

나를 선택하게 만들지만

적어도 그런 선택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

Free un-Will은 있다는 것이죠.

 

철학적으로 공론화된 결론은 아니지만

선택의 프로세스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만약 선택을 자제할 수 있는 조건을 행사할 수 있다면

자유의지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제를 얼마나 했느냐를 가지고

책임을 따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자제에 대한 선택 또한

여러 이유와 조건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이거나 결정적인 자유가 아닙니다.

 

굳이 불교의 유식학을 인용하지 않아도

이런 조건들이 바로 카르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카르마의 원리가 바로 뇌과학의 원리입니다.

 

카르마를 이해하고 선택을 바라보면

우리는 선택하는 나라는 자아가 허상임을 이해합니다.

그런 선택을 하는 나라는 이야기의 허상을 이해하면

우리는 훨씬 쉽게 그런 선택에서 물러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범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가 미치면 정신질환이지만

단체로 미치면 종교이다.

-로버트 퍼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