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리의 전달의 어려움: 진리는 간단하게 가리킬 수 있지만, 사람들은 신화나 전설에 더 친숙하여 빙 둘러서 설명해야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00:26]
- 둘 아닌 법문: 유마거사의 침묵은 말과 침묵이 둘이 아님을 보여주는 깊은 가르침이며, 문수보살의 칭찬은 유마의 침묵이 단순한 침묵이 아님을 간파한 것입니다. [01:04]
- 앎의 세 가지: 앎에는 깨달음(영지), 이해(진지), 그리고 문자로 하는 앎(망지)이 있으며, 선은 깨달음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이해의 순간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02:33]
- 잘못을 바로잡는 방편: 심오한 말씀이 마음에 막히거나 쉴다운 이치가 눈앞에 있으면 오히려 깨달음에서 멀어질 수 있으며, 스스로 잘못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03:13]
- 하나의 몸 세우기: 여섯 감관이 조합을 이루어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내 안에 많은 생각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지므로, 깨달음 공부를 위해 몸 수행이 중요합니다. [04:27]
- 말과 행동의 불일치: 말로만 깨달은 듯하지만 실제 상황에 닥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이해를 넘어서면 말을 포기하고 말을 사용하면서도 말을 넘어서야 합니다. [05:04]
- 현묘한 종지: 현묘한 종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방편을 통해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의 묘한 지혜의 힘으로 세간의 고통을 구할 수 있습니다. [05:42]
- 육근의 소멸과 본래의 사람: 육군의 소멸은 칼을 허공에 던져도 다치지 않는 것과 같으며, 본래의 사람은 함께 있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스승의 애타는 마음을 제자는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07:17]
- 허공의 귀착: 모든 책은 허공으로 돌아가지만 허공은 돌아갈 곳이 없으며, 안팎이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08:04]
한 승이 현사에게 물었다.
“밝음과 어둠이 나뉘지 않았을 땐 어떻습니까?”
“먹같이 깜깜하지”
“나뉜 뒤엔 어떻습니까?”
“칠흑같이 깜깜하지”
“스님,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조금 전에 빙 둘러 말하지 않았더냐”
진리를 묻는 자에게 그것을 가리키는 일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그대가 그것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진리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이것만한 면죄부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문을 열어줘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빙 둘러서 이야기해 줘야 합니다.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신화나 전설과 더 친합니다.
배상공이 황벽에게 물었다.
“유마 거사가 잠자코 있으니 문수보살이 찬탄하기를
이것이야말로 둘 아닌 법문에 드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둘 아닌 법문이란 너의 본 마음이다.
그러니 법을 설했느니, 설하지 않았느니 하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는 것이다.
말 없을 때에는 나타내 보인 것이 없으므로
문수보살이 찬탄한 것이니라.”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소리가 단멸된 것이 아닙니까?”
“말이 곧 침묵이고 침묵이 그대로 말이다.”
말과 침묵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보신, 화신, 보살, 성문과 산하대지와 물, 새, 수풀이
일시에 법을 설합니다.
말도 설법이고, 침묵도 설법인데
굳이 칭찬할 일이 없습니다.
문수의 낭비입니다.
그러나 유마의 침묵이 너무나 단단해서
단순한 말이 없음이 아님을 보았기에
문수가 진심을 내놓았을 겁니다.
선으로 풀면 유마는 말없이 목을 내놓았습니다.
산방야화에는 세 가지 앎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앎에는 영지도 있고, 진지도 있고, 망지도 있습니다.
-영지는 바로 깨달음이고
-진지는 곧 해오이고
-망지는 문자로 아는 것입니다.
선은 깨달음을 가리키지만
많은 사례들은 해오의 순간을 묘사합니다.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켜서
그나마 알아듣도록 고삐를 쥐어야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안 스님은 말합니다.
“심오한 말씀이 마음에 막히면
항상 알음알이의 바탕이 되고
실다운 이치가 눈앞에 버티고 있으면
도리어 명상의 경계로 뒤바뀐다고 하였다.”
어떻게 해서 뒤바뀔 수 있는 것일까요?
뒤바뀔 수 있다면 다시 어떻게 해야 바로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알면
어느 때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대단한 방편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잘못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직인이 찍힌 면죄부를 받아들고
칠흑 같은 침묵을 보면서도
그저 습관대로 망지의 품에 안기고 맙니다.
“어떻게 드러내면 도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라도 설명해 낸다면 도에 부합하지 못할 것이다.”
“여섯 감관에서 소리를 알아듣지 못할 때는 어떻습니까?”
“너의 집 권속은 한 때나 되는구나.”
법안의 말처럼 여섯 감관이 조합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떼거지가 내 안에 살기 시작합니다.
이리저리 쏠려 다니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패턴이 안착합니다.
하나의 몸을 세우는 일이 그래서 어렵습니다.
깨달음 공부를 위해 켄 윌버가 통합수행기법에
몸수행을 기본으로 넣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자들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행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를 넘었으면 말을 포기해야 합니다.
말을 쓰면서도 말을 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선 수행자는 여기서 모두 걸려 넘어집니다.
어떤 승이 지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현묘한 종지입니까?”
“아무도 이해할 수 없다.”
“향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향함이 있으면 곧 어긋난다.”
“향하지 않는 자는 어떻습니까?”
“누가 현묘한 종지를 구하겠는가?”
“가라, 그대의 마음 쓸 곳은 없다.”
“어찌하여 방편문으로 학인을 깨닫도록 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의 묘한 지혜의 힘이
능히 세간의 고통을 구하느니라.”
“무엇이 관세음보살의 묘한 지혜의 힘입니까?”
대사가 솥뚜껑을 세 번 두드리고 말했다.
“들리는가?”
“들립니다.”
“나는 어찌하여 듣지 못하는가?”
그 스님이 말이 없으니
지상 대사가 방망이로 때려서 쫓아버립니다.
지상의 이 공안은
앞서 본 망지를 넘어 진지까지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영지를 가리키면서 진지 속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망지로 둘러싸인 자를 밀고 당기고 일으켜 세우고 엎어지도록
방과 할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수업료가 궁금합니다.
어떤 승이 광징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6근의 소멸입니까?
“칼을 허공에 던져도 물건을 다치지는 않는다.”
“어떤 것이 본래의 사람입니까?”
“함께 앉아서도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학인은 절하고 물러가겠습니다.”
“애타는 간장을 가만히 묘사해서 누구에게 주려는가?”
때로는 스승의 애가 타지만
제자는 결코 알아보지 못합니다.
제자는 간장이 다 녹아내려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아직 다다르지 못한 곳이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어떤 승이 이산에게 물었다.
“온갖 색은 허공으로 돌아가지만 허공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혀가 입 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째서 입 밖에 나오지 않습니까?”
“안팎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입구멍부터 똥구멍까지 꾸불꾸불 허공인데
그대는 어디가 막혀 있어 돌아가려는가?”
'IAMTHAT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IAMTHATch] 선과 깨달음, 허공의 깨끗한 성품 (0) | 2025.05.28 |
---|---|
[IAMTHATch] 마하라지 어록 (7) (0) | 2025.05.27 |
[IAMTHATch] 양심, 의식, 자기기억 (2/2) (0) | 2025.05.22 |
[IAMTHATch] 선과 깨달음, 스승은 지금 여기 (0) | 2025.05.21 |
[IAMTHATch] 양심, 의식, 자기기억 (1/2) (0) | 2025.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