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심의 두 가지 의미: 일상적인 착한 마음과는 다른, 선악 이전의 투명한 마음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구르지예프는 양심을 지성의 영역에서 의식과 동일한 경험이라고 말하며, 이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알고, 자신이 얼마나 적게 아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아는 것의 모순을 이해하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00:56], [01:18], [01:30], [01:40].
- 양심과 도덕성의 차이: 구르지예프는 이 두 개념이 전혀 별개라고 강조합니다. 양심은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현상인 반면, 도덕성은 사회적, 문화적 관습에 따라 달라지는 인위적인 개념이며 완충 장치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합니다 [02:23], [03:04].
- 완충 장치의 개념: 인간 내면의 모순을 느끼지 않도록 충격을 방어하는 에고의 자기 방어 기능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인간 내부의 다양한 모순(견해, 느낌, 생각, 행동 등)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달하며,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02:37], [04:00], [04:22], [05:38].
- 완충 장치의 역할과 영향: 완충 장치는 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억제한다고 주장합니다. 충격을 완화시켜 양심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며, 완충 장치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07:01], [07:25], [07:38].
- 깨달음의 조건: 깨달음은 이를 추구하고 자기 자신과 투쟁하며 끈질기게 자기 수련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며, 내적인 고통을 직접 마주하고 완충 장치를 없애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07:55], [08:05].
구르지예프의 <위대한 깨달음을 찾아서>를 인용해
<관념기계의 이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사람에게 심리학이 아닌
기계 역학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소개해 드렸죠.
구르지예프의 개념들은
이른바 도판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조금은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한편으로 구르지예프의 주장과 설명은
약간의 생소하고 낯선 느낌과 함께
뭔가 숨겨야 할 것을 들킨 기분이 들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전해드리려고 하는 양심, 의식, 자기기억과 더불어
도덕성, 완충장치, 동일시 같은 개념들이 바로
그런 충격적 개념들입니다.
구르지예프에 따르면
양심이라는 개념은 일상생활에서 아주 단순하게 사용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양심에 대해 가끔 듣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이나 돈을 찾아 주인에게 돌려준 미담을 들으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의 ‘양심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듣죠.
그런데 구르지예프가 말하는 양심은
그런 착한 마음과는 조금 다릅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선도 악도 아닌 그것이다’라고 할 때의
투명한 마음과 닮았습니다.
구르지예프는 양심이라는 개념은
지성의 영역에서 의식이라는 개념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의식이란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아는 상태이고
그가 정말로 얼마나 적게 아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양심이란
어떤 사람이 일반적으로 느끼거나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느끼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심의 개념에 헷갈리게 되니까
구르지예프는 자신이 설명하는 양심을
도덕성의 개념과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그는 양심과 도덕성의 개념이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일반적이고, 영속적인 현상이라는 것인데요.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관점에서
모순이 없는 인간의 양심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완충장치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양심은 완충장치가 없을 때 가능한 것인 반면에
도덕성은 완충장치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죠.
완충장치란
자기 안에 있는 모순들을 느끼지 않도록
그 모순이 주는 충격을 방어합니다.
한마디로 에고의 자기방어 기능입니다.
구르지예프에 따르면
도덕성은 양심과 달리 일반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도덕적인 것이
유럽에서는 비도덕적입니다.
사회의 어느 한 계급에서 도덕적인 것이
다른 계급에서는 비도덕적이고
반대도 마찬가지인
인위적이고 관습적인 터브로 이루어진 현상이죠.
도덕성은 또한 완충장치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도덕성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도덕성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도덕성은 단순한 자기 암시일 뿐이어서
그것은 개인과 집단의 편의적인 심판의 잣대는 될 수 있지만
보편적인 판단 기준은 아닌 것이죠.
구르지예프는 인간을 기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서
완충장치라는 개념을 덧붙입니다.
기계는 더럽고 녹슬어 있으며
어떤 곳에는 기계 자체의 오작동 때문에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치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을 완충장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충장치는 비록 비자발적이지만
인간 내부에서 인간 자신에 의해 형성되는 것입니다.
구르지예프는 이런 완충장치가 나타나는 이유를
인간 내부에 있는 많은 ‘모순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견해, 느낌, 공감, 말, 행동의 갖가지 모순입니다.
극단적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을 느껴야 한다면
그가 지금 살고 행동하는 것처럼
조용히 살거나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는 마찰과 불안을 갖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구르지예프는 인간의 개성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다른 ‘나’가
얼마나 서로 모순되고 적대적인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모순을 느낀다면
그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미쳤다고 느낄 것입니다.
3천 개의 나는
‘관념기계의 이해’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분열된 자신의 실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 그대로 미치는 지경이 많습니다.
괜히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이 생긴 것이 아닌 것이죠.
인간은 이런 생각을 굴복시키고 없애버려야만
겨우 정상적이 될 수 있습니다.
미칠 것 같은 상황은
사람으로부터 자기 확신과 자존심을 빼앗아 가고
그의 에너지를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개발된 것이 바로 완충장치이며
완충장치는 자신의 모순들을 느끼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모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감춰서 충격을 없애는 장치인 셈이죠.
제가 구르지예프의 완충장치를
‘에고의 자기방어 기능’이라고 하는 이유는
형성이나 작용기제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격이라는 모습,
이른바 도덕성이라는 외형을 가지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라나고 강화됩니다.
사회적 교육을 통해서도 생성됩니다.
이렇게 형성, 유지된 완충장치가 정착하면
인간이 완충장치 없이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인간은 완충장치라는 수단으로 살아가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 사회’라고 부릅니다.
구르지예프는 완충장치가
사람들이 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억제한다고 합니다.
직접적인 이유는
어떤 사람을 그가 살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고
깨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충격뿐인데
완충장치는 그 충격을 완화하도록 고착화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완충장치는 양심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구르지예프는 역설적으로 내적인 모순들을 볼 가능성을
완충장치가 앗아갔기 때문에
인간이 갑자기 깨닫게 될 위험은 없다고 합니다.
양심은 인간에게 결여되어 있는 통일성을
생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불인데
완충장치를 파괴하는 데는 아주 오랫동안의 수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이를 추구하고 원하는 사람들과
이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과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고
아주 오랫동안 매우 끈질기게
자기 수련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모순되는 느낌들과 연관된
모든 내적인 고통을 직접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완충장치를 없애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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