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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양심, 의식, 자기기억 (2/2)

Buddhastudy 2025. 5. 22. 19:23

 

 

  • 자기 기억의 중요성: 자기 기억은 관조의 눈으로 의식이 스스로를 관찰하며 자신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00:54], [01:07]. 이는 수행의 근간이 되며, 자기 자신에게 진지할 수 있는지 여부가 수행의 성공에 달려있다고 강조합니다 [01:48], [02:00].
  • 자기 기만과 외부의 도움: 스스로는 자기 기만에 빠지기 쉬우므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02:51], [03:03].
  • 수행의 장애물: 동일시: 자기 기억이 수행의 근간이 되는 시점부터 동일시라는 장애물에 직면하게 됩니다 [03:17], [03:45].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와 동일시하며, 이는 더 큰 목적을 잊게 만드는 주된 적 중 하나입니다 [03:45], [03:59].
  • 다양한 형태의 동일시: 일상생활에서의 언쟁이나 믿음, 견해, 체험과의 동일시를 예로 들며, 동일시가 자기 기억의 주요 장애물임을 설명합니다 [04:29], [04:54]. 수행자조차 자신의 믿음과 동일시하여 실제를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04:54], [05:06].
  • 고려하는 형태의 동일시: 타인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고려하는 형태의 동일시'는 사회적 시선과 관습적인 조건을 포함하는 추상적인 인격과의 동일시이며,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는 힘을 갖는다고 설명합니다 [05:38], [06:01], [06:16], [06:31]. 이는 긍정적 피드백을 요구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06:52], [07:05].
  • 동일시 탈피의 어려움과 필요성: 허상과의 동일시에 대한 주목과 피드백 요구는 수행자에게도 예외가 아니며, 동일시 탈피는 간단하지만 고통을 수반하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라고 강조합니다 [08:05], [08:19], [08:30], [08:45]. 모든 생각은 동일시이며, 자각은 놓아버림이라고 설명합니다 [08:30].

 

 

도덕성과 비교한 양심의 개념

그것이 지성의 영역에서

의식과 같은 것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했고

자기모순을 은폐하는 완충장치를 없애야

진실을 본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아직도 왜 그것이 꼭 필요한지 의문이라면

이제 우리의 주된 수행인

자각, 각성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구르지예프는 여기서

자기기억이라는 개념을 알려줍니다.

생각을 멈출 때는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자기기억을 할 때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

자기를 느끼는 데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가 IAMTHAT채널을 통해

줄기차게 명상하고 있는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의

내가 있다와 거의 흡사합니다.

 

일단 자기기억이라는 것을

관조의 눈으로 의식이 스스로를 관찰하는 각성

내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로 하죠.

 

구르지예프가 자기기억을 강조하는 지점은

대승기신론의 상사각 수준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인용해 봅니다.

 

단순한 목격자로서 세부 사항을 보던 자기관찰을 하다가

자기 수련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면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의 자기관찰이란

세부적인 사항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듯이

자기전체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죠.

자기수련의 필요성을 깨닫는 이 지점에서

자기기억이라는 개념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심의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구르지예프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자신에게 진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수행의 성공이 달려 있습니다.

 

진지함, 진실성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에고의 자기방어, 완충장치가

어느 정도 해체된 상태라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르지예프는 강조해서 말합니다.

이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지함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누군가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진실성이 전제가 되어야 하죠.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

이 순간에 방향을 잃으면

결코 다시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구르지예프는

스스로는 결코 깨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도 강조합니다.

자신이 노력하더라도 그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일을 꾸미게 되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외부의 도움 없이는

결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기억이 수행의 근간이 되는 지점에 오게 되면

본격적으로 장애와 난관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에고의 자기방어, 자기주장이라고 하는

굳어진 생각의 틀입니다.

 

생각의 틀은 곧바로 행위의 틀이고

한 인격 전체를 규정하는 인간적 한계이기도 합니다.

가장 근간이 되는 장애가 바로 [동일시]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동일시의 상태에 있으며

동일시의 사물만 바뀔 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부딪히는 사소한 문제와 동일시하여

보다 큰 목적을 깡그리 잊어버립니다.

동일시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지독한 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일시는 깨달음의 주된 적이지만

반대로 동일시가 없다면

인간의 인격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

자신의 시간과 일과 주의를 쏟는 것과

더욱더 쉽게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인간이 동일시하는 것은

거창한 인격 모델만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누군가 언쟁을 벌일 때나

자기가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말과 동일시돼 있습니다.

 

이때는 자기기억이 상실됩니다.

분별 있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동일시해서 그것이 됩니다.

탐욕이 되고, 소망이 되고, 말이 됩니다.

이 상황에 오면

동일시된 상태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수행자들조차 때로

자신의 믿음, 견해, 체험과 동일시되어

실재를 보고도 외면합니다.

동일시하는 것이

자기기억의 주요 장애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구르지예프는 인간이

동일시하거나, 동일시 될 수 있는 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의 노예라고 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동일시의 형태를 이해했다면

그다음에는 자신이 동일시하는 것이 특정한 형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원초적인 탐진을 베일로 가리고 나면

사람들은 고려하기의 형태로 동일시를 한다는 것이

구르지예프의 설명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고려한다는 것이죠.

 

타인들이 규정하는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추상화된 인격과의 동일시입니다.

여기에는 사회적 시선이 모두 포함돼 있어서

관습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도 포함됩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그 인격은

실제로는 주관도 객관도 아닌

일종의 관계적 허상에 불과하죠.

 

하지만 이동일시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부당하고 불법적이고 잘못되고

비논리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런 패턴은

사물이나 사건과의 동일시보다

복잡한 조건과 사회적 규정성을 가지고 있어서

알기도 어렵고

안다고 해도 뭘 어쩌란 말인가 하게 됩니다.

 

고려하는 동일시는

전적으로 요구사항에 의존한다고 구르지예프는 설명합니다.

요구사항이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자신의 인격적 동일시 패턴에 대해

포지티브 피드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구르지예프는 원색적으로 표현합니다.

그의 지성, 아름다움, 영리함, 재치, 침착함, 독창성

그리고 그의 모든 자질에 대해

끊임없이 존경심과 감탄을 쏟아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런 요구사항은

아주 점잖은 모습을 한 사람들에게 매우 흔하게 나타납니다.

 

인간 사회가 에고의 전시장이라는 표현처럼

동일시하는 인격 패턴에 대한 요구사항은

자신에 대한 완전히 환상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구르지예프는 이것을

병든 사람의 고통이라고 말하면서

그 원인을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 요구사항,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긍정적 방식이든 부정적 방식이든

허상과의 동일시에 대해 주목과 피드백을 요구하는 것은

깨달음을 찾는 수행자들에게도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완전히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이 문제에서 비켜나 있을 수 없습니다.

동일시 탈피는 매우 간단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쉽지는 않습니다.

 

모든 생각은 동일시이고

모든 자각은 놓아버림입니다.

 

그런데 놓아버림은

양심을 되찾는 데 필요한 고통을 수반합니다.

완충 장치, 에고는

그냥 슬그머니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이별하는 데는

생사를 벗겨내는 듯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수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