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로써 주인을 삼고
자기로써 의지처를 삼는다.
-법구경
수행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네, 지금까지 그 이야기를 해 왔기 때문에
일단 깨달음이라고 하면 틀린 답은 아닙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거기에 이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깨달음의 지도는 구체적으로는 거기에 이르는 길,
즉 수행의 지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존재론, 인식론에서 목표를
실천론에서는 큰 길을 그려봤습니다.
앎의 지혜를 닦고 정성을 다해 살면서
내면의 성령을 따르는 것이 큰 길입니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르고, 발달 라인이 달라서
걸음걸이와 운송 수단은 조금씩 다르지만
큰 길을 따라가는 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자기 여행 짐을 싸고
이동에 필요한 장비를 챙기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고, 준비하고, 실행하는
그 주체자, 행위자를 없애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 가르침도 봤습니다.
무아, 견성, 행위자 관념 해체, 나를 버리기, 내려놓음 같은 말들은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그 의지와 정성을 가진
나라는 존재와 서로 모순되지 않나요?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될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내가 수행해야 하는데
그 수행의 목표가 나를 지우는 거라고 합니다.
이것은 범주가 다른 영역을 표현하는 문제이기도 하고
수학적으로 묘사하면 위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접근 방법 대신
좀 쉽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가장 쉬운 것은
서구의 자아 개념과
깨달음 전통에서 말하는 자아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에선 전혀 다르고
또 어떤 지점에서는 같은 말인데
우리는 의미가 완전히 다른 지점을 일단 정리해야 합니다.
자아에 대해 모든 전통이 부정하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자아의 소멸을 선언하는 전통은 아마 불교일 것입니다.
깨달음의 목표가 무아
내가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현대 서양 심리학은 정반대로
건강한 자아의 형성이
가장 중요한 인간 정신의 요소라고 봅니다.
불교는 그런 것은 원래 없다고 하는데
심리학은 그걸 만들어야 정상이라고 합니다.
누가 만든 걸까요?
사실 같은 자아를 말하는 것 같지만
의미가 다릅니다.
이미 눈치가 빠른 분은
개인의식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나누는 연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켄 윌버는 전 개인, 개인, 초 개인의 세 영역을 나누어
전개인 수준에서는 개인 영역에 이르고자 해야 하고
개인 영역에 이른 사람은
초 개인의 수준으로 이행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죠.
조금 감이 잡힐 겁니다.
서구 심리학에서 에고는
사람의 마음이 갖추어야 하는 일정한 균형 상태와 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안정적으로 발달시키는 것은
안전과 행복을 위해 당연하고 꼭 필요합니다.
균형 잡힌 자아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사람은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도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반면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죠.
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을 자기라고 여기는 고정불변의 실체를 말합니다.
분명 세상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야 하는 자아와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나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집착하는 자아는
같은 영역이면서 분명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은
자아의 실체에 대한 영성적 이해를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천 수행에서는
이 부분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경험하는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꿰뚫어 보게 되겠지만
그 꿰뚫어 보는 여정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나도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내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고, 계기고, 조건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너무 구차한 설명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줄여서
수행하는 날을 셀프라고 하고
실체로 있다고 착각하는 날을 에고라고 부르기로 하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튼튼한 자아가 있어야 합니다.
발심하고, 이해하고, 정진할 수 있는 내가 있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향한 욕심을 내는 것을
욕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궁극적 정체는
고정불변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확연히 아는 것입니다.
모순되어 보이지만
우리가 이원적 용어를 쓰면서 항상 겪는 어려움일 뿐입니다.
사실 셀프와 에고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수행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건강한 자아와 무아는,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수행 과정에서
매번 혼란을 겪고 통찰을 일으킬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창조된 물질계에서
인간만이 겪을 수 있는 미묘한 영적 비밀일지도 모릅니다.
수행의 모든 영역이 그렇지만
항상 큰 그림은 동시에 있습니다.
셀프와 에고가 한 그림에 있는 것처럼
초심자 입문자의 발심은
무아 견성의 깨달음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무지와 현묘한 지혜는
지금 여기 같이 있습니다.
우리는 단계를 말하고, 과정을 말하고, 수행을 말하지만
그것은 또한 깨달음의 궁극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말하든
실제로는 항상 최상의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동네가 원래 그래서 욕먹을 것을 알지만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셀프와 에고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면
이제부터 우리는 수행의 초점을 잡기가 쉬워집니다.
왜냐하면 수행 목표라는 것이
모든 의식 수준의 단계에서
에고를 약화시켜 종국적으로는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깨달음 전통이 제시하는
신과 합일하는 방법입니다.
범부각, 상사각, 수봉각, 등각, 묘각의 수준을 가르는 것은
결국 에고의 크기입니다.
에고가 얼마만큼 내 삶을 장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의식수준입니다.
의식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을 가장 쉽게 말하면
에고가 줄어든 정도입니다.
거칠고 단단한 에고가 낮은 의식 수준을 말하고
자기 주장과 자기 방어가 아예 없는 것이
최상의 의식 수준을 표현합니다.
깨달은 스승들도
자기 주장을 하는 것 같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을 자기 주장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 견해입니다.
그 수준에 가서 봐야만 보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셀프와 에고로도 혼선을 겪지만
의식수준과 발달라인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이나
조건화된 개인적 특성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공부 시작 초기에
관념적 이해와 언어적 해소를 추구하는 성향이
무척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공부가 그런 것이라는 신념이 강했고
선정은 신비주의로 여겼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수행의 질서가
고통스럽게 어렵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은
개인적 발달 라인의 문제뿐일까요?
개성을 고집하는 에고의 문제일까요?
아마 시작단계에서
영적 지식을 열심히 탐구하고, 정리하려는 성향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할 만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그것을 자기 특성으로 고집하는 경향이 자라나고
선정의 영역에 공부가 게을러지고, 거부감이 생기면서
그쪽 발달 라인에 구멍이 생기자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셀프가 아니라
에고가 작동한 겁니다.
에고가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집착, 고집, 거부 방어 같은
거친 에고의 특성을 자주 듣지만
에고는 인간 정신의 모든 발달 라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극적인 방향인 체념, 포기, 자조, 회피 같은 면을 이용할 수도 있고
적극적인 방향인
주장, 판단, 탐구, 열망 같은 면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각 의식 수준 단계에서의 해오와 깨달음을
하나의 고정된 자기 상태로 주장하는 것도 에고의 성질입니다.
모든 붙잡는 경향은 에고의 것입니다.
에고의 집착적 경향이 태생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인식론, 의식과 자아편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처음 공부할 때 단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각 의식 수준 단계에는
정립해야 할 필요한 셀프와
제거해야 할 에고의 진행 과정과 결과물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수행이란
지혜, 행위, 헌신의 모든 지침을 통해
그 상황과 처지에 에고의 작용을 이해하고 제거하는 것입니다.
자기주장 내려놓기, 자기방어 포기하기가
모든 실천의 기본적 지침이 되는 이유입니다.
에고는 극복하기 어려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지혜 수행을 통해
철저히 셀프와 에고를 이해해야 하고
행위 수행을 통해 무던히 셀프를 밀고 나가면서
헌신 수행을 통해 계속 에고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제까지의 셀프가 오늘은 에고가 됩니다.
이 역학을 잘 이해해야
지혜롭게 수행을 이행할 수 있으며
지속하고 향상하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에고를 대면하는 수행에서 저는
공자님이 말한 중용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체감하곤 합니다.
그 뉘앙스를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불교에도 중도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중용과 중도를 통해 우리는 에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초월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수행과 에고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기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생기자마자
그것이 둥지가 된다.
-대혜 종고
'IAMTHATch' 카테고리의 다른 글
[IAMTHATch] 수행, 여럿이 홀로 가는 길 (0) | 2024.12.26 |
---|---|
[IAMTHATch] 선과 깨달음, 꿈결에 알라 (0) | 2024.12.25 |
[IAMTHATch] 선과 깨달음, 바라보고 무시하기 (0) | 2024.12.23 |
[IAMTHATch] 선과 깨달음, 난동의 질서 (0) | 2024.12.19 |
[IAMTHATch] 깨달음의 실천적 지도 (0) | 2024.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