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난동의 질서

Buddhastudy 2024. 12. 19. 19:14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밤마다 부처와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아침에 함께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 간 곳 알려거든

어묵동정지只這語聲是 말하고 움직이는 곳을 살펴라.

 

 

우리는 늘 부처와 함께 산다고

부대사 스님은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백제와 교류했던 중국 양나라의 스님입니다.

 

선가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부처를 데리고 잔다는

다소 섬뜩한 첫 구절 때문입니다.

 

시의 나머지 절반은 이렇습니다.

섬호불상리纖毫不相離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여신영상사如身影相似 마치 몸에 그림자 따르는 듯하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하면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 다만 지금 말소리가 그것이로다.

 

부대사 스님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부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선은 이렇게 부처를 직접 보여주려는

온갖 난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수가 하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부처를 가르치다 보니

무슨 수단을 쓰더라도 후환이 두렵지 않습니다.

 

난동입니다.

어지러운 상황을 가다듬고 보면

선은 질서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황벽 스님의 일화를 통해

그 거침없는 가르침의 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질서 있는 난동이 아니라

난동이 곧 질서입니다.

 

자사 벼슬을 하던 배후가 용흥사에 왔다가

벽에 걸려 있는 고승의 초상화를 보고는

안내하는 스님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오?”

어느 고승의 상입니다.”

형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소?”

안내하는 스님이 주저하자 배휴가 묻습니다.

이 절에는 선사가 없소?”

근래에 한 스님이 와 계시는데 선사같이 보입니다.”

 

경봉 스님을 만나러 온 판사들에 비하면

자신감이 넘쳐납니다.

배휴가 선사를 청하자 나타난 스님이 바로 황벽입니다.

비밀은 아니지만 데이비드 호킨스는

황벽의 의식 수준이 인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상한인

960대라고 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 황벽입니다.

 

배휴는 앞에서와 똑같이 말합니다.

형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어?”

그러자 황벽이 큰 소리로 배휴를 부릅니다.

배휴

배휴는 깜짝 놀라 엉겁결에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황벽은 빈틈없이 되묻습니다.

배휴는 어느 곳에 있소?”

이 사건으로 배휴가 깨달음을 얻어

선사에게 귀의했다는 전설 같은 사실이 전해져 옵니다.

 

앎의 질서가 보이면

가르침의 난동이 질서에 편입됩니다.

부처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자 하면

그 난동이 벌어진 곳을 살펴야 합니다.

 

사실 황벽은 난동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난동은 배휴가 부렸죠.

 

이런 일은 황벽의 제자인

임제가 깨우친 사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임제가 오랫동안 공부해도 아는 바가 없어

황벽을 찾아가 불법을 청하자

황벽은 몽둥이로 후려쳤습니다.

 

시자인 목주가 다음에 오라고 해서

또 가고 또 갑니다.

세 번 모두 몽둥이로 맞은 후에는

목주를 원망하며 떠나려 합니다.

저런 미친 스님을 모시고 있는 당신도 문제예요.”

 

목주는 근처에 있는 다른 스님을 소개해 줍니다.

기왕 가는 길에

산 너머 있는 대우 스님을 한번 만나보시게.

큰 도를 이룬 분이니 물어보고 이유나 알아보시오.”

 

임제는 매맞은 것이 억울해 대우를 만났는데

대우는 됐듯 말합니다.

이 멍청한 사람아

천하제일 황벽 선사가 너를 지극히 생각해

3일 동안이나 그렇게 친절히 일러줬는데 그걸 모르는가?”

 

임제는 그 순간 크게 웃으며 도를 깨쳤습니다.

이후 임제는 다시 황벽을 찾습니다.

황벽이

네가 왜 또 왔는가?” 하자

임제는 곧장 황벽의 멱살을 잡고

한마디로 도를 일러 보시오라고 다그칩니다.

황벽이

아니, 이런 놈이?”라고 하자

임제는 황벽을 내리쳐 쓰러뜨립니다.

 

황벽은 임제의 견성을 인가하고

임제는 황벽의 뒤를 잇는 수제자가 됩니다.

 

황벽의 가장 큰 업적이

임제를 제자로 길러낸 것이라 할 정도로

두 스님은 끝까지 찰떡궁합을 자랑하며

이른바 임제종이라는 교단을 탄생시키는 전설의 시조가 됩니다.

 

황벽의 몽둥이 난동은 뭘 했을까요?

임제를 놀라게 하고 실의에 빠뜨렸다는 걸

우리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임제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임제가 아무리 경서에 뛰어나다 하더라도

글자로는 깨침을 얻을 수가 없으니

깨침의 자리에서는 입을 막아 글자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경서에 있는 모든 가르침은

직접 살아 있는 마음 그대로가 되어야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자로 묘사된 그것마저도

바깥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거친 욕망이든, 섬세한 선정의 고요이든

모두 그렇습니다.

 

연기법이라고 하면

저 앞의 전봇대는 무한한 우주의 모든 것들과

그것들을 이루게 하는 무한한 시간과 연한다.

그 말에 들어간 모든 형상과 의미와 적용은

실제로 가로등에서 일어납니까?

아니면 그 말을 지어내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납니까?

 

몽둥이는 입을 닫게 하는 것이자

또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아서

마치 몸의 그림자 따르는 듯합니다.

말을 멈춘 상태에서 이것이 한순간 확 다가오면

그것이 바로 계합, 깨달음입니다.

선의 방식입니다.

 

조금 전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대우의 말에 깨달음을 얻은 임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황벽의 법도 별거 아니구나.”

그러자 이번에는 대우의 난동이 시작됩니다.

대우가 임제의 멱살을 움켜잡고 말합니다.

, 이 오줌싸게야.

아까 잘못이 있다 없다 하더니

이제는 황벽의 불법이 별게 아니라고?

뭘 알았다는 것이냐 빨리 말해라.”

 

멱살을 잡힌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습니다.

그러자 태우가 임제를 밀치면서 말합니다.

, 이놈아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아니다.”

 

서로 난동을 주고받는 장면들 속에서

질서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질서는 너무나 확고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어묵동정지, 말하고 움직이는 곳을 살피면

지저성시, 다만 지금 말소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임제가 취봉 스님을 방문하였더니

취봉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오는가?”

황벽산에서 왔습니다.”

황벽 스님은 무슨 말로써 사람들을 이끄시던가?”

황벽 스님에게 말이란 없습니다.”

왜 없는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말씀드릴 것은 없습니다.”

취봉스님이 말했다.

그래도 한번 말해봐라.”

임제가 말했다.

화살이 서천을 이미 지나갔습니다.”

 

취봉 스님, 검색어 불러주십시오.

GPT도 대기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