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 자신의 자아를 보라
-잘랄루딘 루미
의식의 발생 과정 속에서
하나의 고정된 전제 조건으로 따라붙는 것이
바로 제7 말라식입니다.
우리가 자아의식, 에고라고 부르는 바로 그 관성의 힘입니다.
유식학이 제7 말라식을 창안하거나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뚜렷하게 개념적으로 정리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만든 사건입니다.
사실상 서구철학의 인식론이
칸트 이후 훗설의 현상학으로
주객분리를 극복하고
물 자체를 이해하는 인식론적 반성을 했지만,
거기에 그치고
오히려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인식론으로 빠져버린 이유 중 하나가
제7 말라식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현대 서구철학을 대표하는 관념론과 유물론 모두
휴머니즘에 근거하고 있으면서도
자아의식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죄를 드러냅니다.
이성과 합리를 주장하던 우파, 자유주의나
평등과 파괴를 주장하던 좌파 사회주의 모두
인간의 자아의식에 대한 무지로 대실패를 했는데
자유주의의 실패는
극우 파시즘의 발화와 세계대전으로
사회주의의 실패는
극좌 전체주의 공산국가의 몰락으로 목격됩니다.
환란에 가까운 전쟁을 겪고 난 후 서구에서는
정신분석학에 이르러서야 에고의 개념이 잡히고
그 기원과 작용을 추구합니다.
그마저도 자아의식의 확립과 극복이라는 발전적인 면이 아니라
자아의 분열 현상인 하위의 정신병적 현상에 초점이 맞춰지죠.
물론 그 영역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아의식의 정체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캔 윌버은 빼고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유식학의 자아의식에 대한 분석은
이미 1000년 전에 정리를 끝냈다는 겁니다.
-자아의 발생과 작용
-그 작용에 따른 세계상의 분열
-분열에 따른 인간의 착각과 고통
-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
-처방을 따를 때 필요한 방법으로서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체계적인 내용이
유식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7식인 말라식은
아집의 작용을 지닌 식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식, 사상, 이념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자아에 대한 관념을 만들고 그 자아에 집착합니다.
이렇게 후천적인 학습 과정을 통해
자아를 설정하고 집착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자아를 향한 집착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유전적으로 전수된
뿌리 깊은 유기체의 자기 보호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자아의식이 존재하며
후천적으로도 자아의식을 개발하고 강화합니다.
유기체의 자기 보호 메커니즘이 잘못된 것일까요?
불교에서는 자아는 나쁘고, 부정돼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석가의 법문들 중 상당한 부분은
건강한 자아에 의지해 공부를 해야 하는
수행의 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건강한 자아가 없다면
사실 공부를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아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자아상을 극복하는 공부를 할 수는 없죠.
우리는 이것을 켄윌버의 표현을 빌려
[원시적 융합 상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자아가 파악되어 확립되어야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아의식이
어떤 것에서 문제가 되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일단 유식론에서 말하는
자아의식, 말라식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첫째,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
둘째,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한다.
셋째, 항상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의 네 가지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항상 살피고 헤아린다.
말라식도 아리아식처럼
생사에 유전하는 동안 항상 활동하는 심층 심리입니다.
아뢰야식의 인식 활동은
미세하고 분별이 없으며 저절로 행해지는 데 반해
말라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해서
특히 발생하는 현상 중 견분에 대해
깊고 강하게 인식합니다.
자아의식은
개인적인 존재의 중심이며 활동의 원동력이고,
심지어 자아를 떠나서는 이 세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모릅니다.
또는 원래 그렇답니다.
유식학이 발견한 자아의식은
자연 발생적이며
사실상 이 세상이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그냥 생각으로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은
심층적인 자아의식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정도로
말라식의 집착은 근원적이고 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냥 업보입니다.
우리가 주관과 객관의 대립 위에서만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체험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자기가 존재하며
동시에 자기가 아닌 것이 대립합니다.
유식학은
자기와 자기 아닌 것과의 대립이 바로
심층적인 분열과 집착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분별, 사량, 탐진치가 비롯되는 무지의 근원적인 작용이
말라식이라는 심층의식이고,
우리의 일상적 행위는
모두 자아의식에 오염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도착이자 전도된 자기 이해입니다.
그 밑바닥에는 끊임없고 완고한 집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선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집착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만약 7말라식이
아뢰야식에서 일어난 주객 분리 중
견분만 집착한다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겠죠.
견분을 집착한다는 것은
견분의 대상인 세상에 대한 집착을 전제하는 겁니다.
세상이 없는 상태에서의 나라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겁니다.
세상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에 대해 생각하고, 주장하고, 체험하는 주인공으로서의 내가 바로
집착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이 세상에서 주인공입니다.
자기 세계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죠.
잘라서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이라서 잘났고
못나서 주인공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바로 주인공입니다.
항상 아치, 아견, 아만, 아애의 4가지 번뇌와 함께 일어난다.
자세히 보면
우리는 절대로 조연배우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 같은 삶을 살아도
그것은 대역일 뿐
나는 내 세상, 내 인생의 여전한 주인공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내가 주인공으로 모든 것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초적인 자아의 문제입니다.
제7 말라식, 에고의식이 쉼 없이 항상 활동하고 있고,
심층의식을 대상으로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표면 의식으로는 감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지각, 생각 수준으로 나타나는 대상들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탐진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기주장, 자기 방어입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단계를 설정하고
단계를 따라 의식 수준을 성숙시킨다는 것은
결국 제7 말라식인
에고 의식을 해체하는 과정입니다.
뭐가 있어서 깨고, 찢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집착적 경향성을 지워가는 과정입니다.
아견, 아만, 아애에 해당하는 어리석음을
밝음으로 채워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과 의식 수준에서 배웠던 의식 수준은
여기서 그대로 등장합니다.
유식론에도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로
5개의 수행단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승기신론 5단계와 매우 흡사해서
크게 낯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기신론의 5단계를
계속 사용하기로 하죠.
범부각은
생각을 발견하고
생각의 주인인 내 책임을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분별의 이해가 있다는 앎입니다.
이 문장의 단계로
자기방어로 점철돼서
그것이 그것인 줄 모르던 견해와 주장을 처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합니다.
회개이자 자각입니다.
상사각
분변하는 현상에는
그에 대응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왜곡된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는 현상을 넘어
그런 것들이 모두 하나의 고집스러운 개념, 관념임을 이해합니다.
이해와 선정을 통해
내가 현상이라고 믿는 것들이
일종의 이름 붙이기이자 생각 놀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상사각입니다.
수분각
선입견이 어느 정도 해체되고
유식이 말하는 의식의 변화도 이해하고
연기적 현상의 본질을 바로 보는 공부를 계속합니다.
바른 견해를 익히는 지혜와
자아의식의 준동을 똑바로 보는 선정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 의식은
견분과 상분의 분리가 잠시 사라진 그 자리를 직접 목격하는
수분각에 도달합니다.
물론 수분각 깨달음은 불완전합니다.
또한 그 위험성은
에고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출타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겁니다.
돌아온 에고는 깨달음마저 집착합니다.
“나는 깨달음을 얻은 자이다.”
수분각이 전환점이자 경계선인 이유입니다.
등각
에고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증발하지 않습니다.
자아의식은 자아의식이 발생한 그 지점,
즉 아뢰야의 주객분리 현장을 뚜렷이 목격할 때
그저 이해될 뿐입니다.
그것은 소멸되지 않고
차별이 필요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여기가 등각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묘각
아뢰야식의 주객 분리와 말라식의 집착을 목격하고 이해한 이후에는
남은 업의 찌꺼기들이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거울의 때가 말끔히 걷어지면
나는 나라는 것이나 주객 분리나 의식의 발생조차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적멸의 자리에서
진리 그 자체가 됩니다.
묘각입니다.
이번 동영상에서는
인식론의 관점에서
에고, 말라식을 이해해 봤습니다.
에고에 대한 이야기는
[실천과 수행] 시리즈의 주된 주제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에고가 삶을 지배하는 동안
나의 생각, 감정, 행동은
거의 모두
두려움과 욕망에서 나온다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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