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감각을 가지고 지각을 합니다.
눈, 귀, 코, 입, 몸의 다섯 감각기관이 있다고 하죠.
그래서 감각도 다섯 종류가 있습니다.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이 그것입니다.
물론 축약된 것이죠.
빛에는 명도, 채도, 색깔 같은 부수적인 영역이 있고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비가시광선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소리도 고주파, 저주파의 감청 불가의 진동도 있으며
그래서 귀가 아닌 몸으로 하는 소리도 있습니다.
맛에도 달고 짜고 쓰고 신 맛이 있고
누구는 매운 것도 맛이라 하고
누구는 그게 맛이 아니라 혓바닥이 아픈 감각이라고 합니다.
저런 감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감각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순수한 감각 자체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이건 단식을 해보면 체험할 수 있는데요.
사흘 정도 굶으면
평소 맛있게 먹던 것들도 엄청나게 자극적이고
아무렇지 않던 곳에서
꽤 역겨운 냄새가 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서 우리는
모든 감각에 대해 이런저런 품평을 하고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감각에 생각이 따라붙어서
곱하기를 몇 배로 더 합니다.
이 지경이 되면 순수한 감각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됩니다.
생각을 생략하고 감각을 느끼는 것은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의 처지입니다.
“그대들은 삼계를 벗어나는 도리를 묻는데,
삼계를 가져와 보라.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고 아는데
무엇이 있어서 그대를 장애한다 하며
무슨 소리와 색이 그대와 함께 한다 하는가?
지금 눈앞에 분명하고 분명하니 무엇이 바로인가?
무슨 차별과 특별한 것을 보겠는가?”
전등록에 나오는 이 교설은
현량이라 부르는 순수한 감각과 지각이 분명하면
그것을 볼 수 있다고 설합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삼계라고 하는 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삼계는 어디 있습니까?
삼계는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역시 현량을 에워싸고 있는 생각입니다.
생각의 발생은
인식론에서도 매우 특이점의 현상이라서
서양철학은 이 선을 넘지 못했고
우리는 유식론에서야
왜 생각이라는 일이 불가항력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일단 잠시 해설을 보류하고
생각을 벗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죠.
향엄 스님은 고생고생하다가
기왓장이 대밭으로 날아가 깨지는 소리에 깨닫습니다.
덕산이라는 분은 경전을 보려다
등잔불이 확 꺼지는 순간에 깨닫습니다.
아디야 산티는 새 소리에 눈이 열렸고,
향곡은 양손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한순간 깨칩니다.
심지어 파뿌리를 보고 한 소식을 들은 분도 있습니다.
뭘 본 걸까요?
손가락을 봤을 뿐입니다.
흔들리는 꽃잎을 봤을 뿐이죠.
입 없는 노인네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면 보는 상황만 남습니다.
모든 품평과 해설이 사라지고 ‘봄’만이 남습니다.
그때 그것이 그것인 것을 저절로 압니다.
“무엇이 털끝만큼도 막히지 않은 일입니까?”
“마주 대하고도 마주 대한 줄 모르는구나”
몰라볼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본래의 것이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생각 가이드북이
얼토당토 않은 난잡한 찌라시들이었다는 걸 금방 알아봅니다.
생각은 실재와 비교하면
70년대 10인치 흑백 TV로 보는 풍경처럼 느껴집니다.
해상도가 너무 낮아 분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온갖 중생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하니
어떤 것이 날마다 쓰는 것입니까?”
“특별하게 대답한들 그대가 어찌 알겠는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왜 그리 어렵냐고요?
그게 어째서 깨달음의 관문이냐고요?
생각은 당신 뜻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생각 뜻대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걸 아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알려줘도 이해하는 데 엄청난 노력이 듭니다.
생각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대사가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중에게 물었다.
“보는가?”
“봅니다.”
“대나무가 눈으로 왔는가? 눈이 대나무로 갔는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대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나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새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생각 없이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지경에 있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호킨스 박사는
생각을 벗어난 상태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3천 명 내외라고 합니다.
선 공부로 뚫은 그 장막이
어마어마한 도약의 순간임을 알면
선문답이 현실과 동떨어진 한가한 농담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이후에는 사는 세상이 바뀝니다.
일진법계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그래서 숨은그림찾기라고 하지만
한순간 인디아나 존스 박사는
끊어진 절벽을 건너는 길을 발견합니다.
선문답을 맞추려고 선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문답을 통해 생각에서 벗어나 보려는 겁니다.
사람의 인식을 장악한 생각을 걷어낼 수 있는
탁월한 도구로 개발된 것이
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말이 아니고 글이 글이 아닙니다.
돈, 명예, 가족, 목숨 이런 것들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생각의 문제입니다.
깊은 잠에 들어 생각이 없을 때
저런 것들이 문제가 되나요?
살펴보면 모두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은
그대의 그 마음을 한번 넘어보라고 손짓합니다.
생각으로만 사는 사람이여!
“무엇이 급한 일인지 스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오줌 누는 것이 작은 일이긴 하나
내가 몸소 가야만 되는 일이다.”
생각으로 안 되는 일을 가려보고
그것에서 찾아보는 겁니다.
생각으로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것이겠죠.
차근차근 걸어가되
발 없이 가는 겁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을 일러주십시오.”
“저 시냇물 소리를 듣는가?”
“듣습니다.”
“그것이 그대가 바로 들어갈 곳이니라.”
“흐르는 그것이
내 귀도, 저 시냇물 소리도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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