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의식의 변화

Buddhastudy 2024. 11. 7. 19:04

 

 

 

모든 정신적 내용은

집착을 나타낸다

-데이비드 호킨스, <호모스피리투스>

 

유식학이 제시하는 8가지 의식은

인식의 과정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식론의 귀결점을 유식학에서 찾고자 한 것은

그것이 연기적 세계관과 인식론을 연결하는 고리이면서

인식론과 실천론

즉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연결하는 고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동영상에서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식과 세계를 초월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유식학의 설명을 통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과정에 대한 불교의 인식론적 설명을 통해

우리는 도무지 답이 없어 보이는 진리를 향한 지도에서

길을 하나 그릴 수 있을 겁니다.

 

유식학은

매우 방대한 경전, 논서들로 구성된

일종의 이론 체계입니다.

 

우리는 그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만

쉽게 바꾸어 이해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것도 시중에 일반적으로 오고 가는 대화 수준보다

더 깊지도 높지도 않은 정도로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도 어려움을 느끼는 분이 있을 겁니다.

 

세친의 <유식30>

유식 이론을 30개의 짧은 글로 설명한 유명한 시입니다.

그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거짓으로 아와 법을 이야기하네

여러 가지 모습들이 굴러 일어남이 있으니

그것은 식이 변한 것에 의지하네.”

 

유식론에서는

아와 법을 분별하는 훈습력 때문에

여러 식이 일어날 때 전변하여

아와 법으로 사현한다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내재된 어떤 원인의 힘으로

의식이 변해서

나와 세상으로 그럴듯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유식론에는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꼭 필요한 최소한만으로 짚고 갈 겁니다.

, , 훈습, 전변 같은 말은 꽤 어렵게 들리죠.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아는 나이고

법은 세상입니다.

훈습은 훈제 요리처럼 깊숙이 스며들어 기억되는 것이고

전변은 변해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깊은 뜻이 있는 단어들이지만

깊게 들어가는 건 천천히 해도 되겠습니다.

 

의식이 변화를 일으켜서

나와 세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유식론의 기본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세계관편에서 이미 다루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의식이 변화를 일으켜

주객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걸까요?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적 힘을 훈습력이라고 했는데

이걸 종자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업력, 업의 힘입니다.

거대한 나무를 키울 수 있는 힘이

씨앗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해서 종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종자가 현상으로 나타난 것을 현행이라고 합니다.

 

나타난 현상, 즉 현행은

다시 그 경험을 기억으로 간직합니다.

건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훈습, 깊게 배어들게 기억하죠.

씨앗 종자가 될 정도로 꾹꾹 눌러 담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종자가 되는 과정이 계속됩니다.

한자어로는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라고 합니다.

 

종자와 현행, 현행과 종자는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냥 놔두면

알아서 잘 굴러갈 것 같지 않습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 현행 과정에서

의식이 [보는 것][보이는 것]으로 나뉘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고

보는 것이 나라고 고집하는 현상도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8 아뢰야식이 변해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는 교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7 말라식이 견분을 나라고 붙잡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7 말라식이 견분을 나라고 했다면

즐겁게 상분을 감상하면 될 일입니다.

그리고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었던 것이

그저 현상일 뿐이니

사라지고 나면 영화관을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문제가 되는 걸까요?

 

문제는 7 말라식이

나를 고집하는 순간부터

영화 감상이 아니라 리얼한 현실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연극 배우가 배역을 배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정말 레알 현실의 그 사람이라고 믿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겁니다.

총도 쏘고 칼도 맞고, 사랑도 하고 죽기도 하고

오만 일들이 다 벌어져도

영화라면 문제가 없죠.

 

그런데 내가 총 맞고 칼 맞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죽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견분을 나라고 집착한 의식, 7 말라식이 등장하면서

모든 영화 장면이 모두 현실이 되고

나는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여기까지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정말요?

그렇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게 무슨 문제입니까?

꿈을 꿀 때도 실제처럼 여기지만

꿈 깨면 문제없습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그럴 수 있잖아요.

꿈을 깨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아직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집착이 현실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상을 마주하게 되면

거기에는 일종의 개체성이 생깁니다.

분리가 이루어지고, 분별이 생기죠.

그게 감각이고, 생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는 분별로 이루어진 감각 생각이

원래는 있는 것이 아니라서 발생하는 원초적인 문제이고

또 하나는 그런 감각과 생각이 가짜인 상황에서조차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것으로 세상이 쪼개지는 겁니다.

 

원초적인 문제가 바로 연기법이 말하는

끊임없이 사라지는 무상함,

상호의존으로만 존재하는 실체 없음입니다.

 

나를 고집하는 에고는 그런 허망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실상을 외면하죠.

사라지는 것을 안 보려고 하고, 텅 빈 속성을 거부합니다.

진실을 거부하고, 고통스러운데

이걸 감추기 위한 생각으로

온갖 가짜 진리를 만들어내고 믿습니다.

 

뭐 그렇게 그냥 살면 그것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스스로 속고 속이고

거기까지도 문제가 없습니다.

제가 너무 관대한가요?

 

아직까지 사람들의 현실적인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속고 사는 과정에서 고집하는 나는

내 견해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실은

미워하고 싫어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두 번째 문제입니다.

 

세상은 바라는 것과 실망시키는 것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즐거운 것과 괴로운 것들로 양분됩니다.

마지막으로 여기까지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둘 다 인정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조차 안 됩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즐거운 것만 따라다닙니다.

분명 반대편의 것도 있는데 외면합니다.

세상은 결국 좋은 것을 쫓아다니면서

싫은 것을 피해 다니는

스릴러 추격전 공포 영화로 굳어집니다.

 

여기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드디어 꿈속의 꿈이 펼쳐집니다.

외면하고 거부하는 것은 아예 묻어버리는 것이죠.

이른바 그림자를 떼어버리고 가면을 씁니다.

가면이 내가 되고

그나마 꿈속에서 주인공이었던 집착하던 나마저

까맣게 잊혀집니다.

 

공포, 괴기, 신파, 치정으로 얼룩진 이 자작극 영화에서

밖으로 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일단 확실한 방법은

이 모든 감각과 생각을 누리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문제는 이 육체가 스크린의 한 장면이라는 겁니다.

이 영화 다음으로 상영될 영화에서는

그 전 영화에서 겪었던 모든 업을 더한 새로운 영화가 상영되고

우리는 거기서 또 주인공을 할 겁니다.

죽음은 해결책이 못 되겠죠?

 

영화 화면 안에서 영화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걸 이해할 겁니다.

우리가 그런 엉터리 해결 방법을 포기하면

길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이른 과정을 천천히 돌아보고

그걸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헤쳐 나가는 과정을

훌륭하게 잘 묘사한 분이 바로 켄 윌버입니다.

 

유식학과 켄 윌버는

겉으로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켄 윌버의 스펙트럼 이론은

유식학을 알면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어쨌거나 방법이란

거꾸로 거슬러 가는 겁니다.

연어의 입장이 돼보는 거죠.

 

 

우선, 묻어버린 진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못난 나도 나거든요.

그림자를 찾고,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이렇듯 꿈속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자아를 찾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에고를 적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강을 거슬러 가려면 연어가 되어야 합니다.

좀 어색하지만 이걸

건강한 [에고], 정상적 [자아]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다음으로는 당연히 좋고 싫은 이것이

집착과 편견에서 비롯된

엉터리 선택이라는 걸 알아내고 버려야겠죠.

꿈꾸는 자가 꿈을 바꿀 수는 없죠.

그래서 현실은 신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탐진치, 욕망과 두려움의 어리석음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상하고 실체 없는 꿈의 특성을

명료하게 봐야 하겠죠.

이걸 연기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여러 번

내 아집과 오해를 넘어서

정견을 읽히고 실상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게 위빠사나건, 관상수행이건, 교리공부든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엉터리 선입견을 깨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느 순간 꿈이 깹니다.

꿈을 깨는 순간

우리는 7 말라식의 허황된 연극 배우 동일시

똑똑하게 목격합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니?” 라고 물을 수 있는

[명료한 의식의 힘]을 갖게 됩니다.

 

7말라식이 잠시 정신 나갔던 상태에서

,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고 돌아오면

이 게임이 끝납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우리는

재미있게 연극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원래 재미나게 놀려고 시작한 연극이었거든요.

그만하고 싶으면 막을 내리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유식의 어려운 용어를 거의 다 빼고

유식학의 전체 줄거리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동영상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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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먼저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게오르게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