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삶은 불공평하고 잔인해 보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우리는 유식학을 요약해 8식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일심의 세계인 8식에서 7식과 6식을 거쳐 전5식으로 나타납니다.
8 아리아식의 변화가
7식에서 에고의 집착으로 나의 마음과 세계로 바뀌고,
6식에서는 나의 마음에 탐진치가 나타나 번뇌와 고통을 만듭니다.
이렇게 의식이 드러나는 과정을 [생멸문]이라 하고
거꾸로 가는 깨달음의 과정을 [진여문]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에서 출발해
다시 아뢰야식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축적하고 드러내는
아뢰야식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아뢰야식은 마치 바다처럼 넓고 깊으면서
모든 파도의 모양을 만들어냅니다.
유식에서는 아뢰야식의 이런 능력을
능장, 소장, 집장으로 요약합니다.
-능장은 만물을 인식하는 근본 원인을 담아두었다는 뜻입니다.
-소장은 다른 7가지 식에 의하여 판단된 모든 정보를 훈습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집장은 무시 이래로 이어지기 때문에
제7 말라식에 의해
변함없이 상주하는 자아로 집착되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아뢰야식의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은 과거의 과보로 일어나므로
이런 뜻을 가진 이숙식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유식학의 [윤회]입니다.
종자가 현행하고
현행이 훈습되어 다시 종자가 되고
그 종자가 다시 현행하고
이런 끝없는 과정을 윤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발생하고 드러나고 사라지며 이어지는 원리를 이해하면
윤회는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인연 화합하는 조건으로 이뤄지며
자성을 가진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는 불교가
윤회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윤회는 힌두이즘에도 있었던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없다면서 어떻게 윤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도대체 윤회를 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가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주제를 뒤집으면 간단한 문제인데
언어로 된 이분법에서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회하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윤회가 있습니다.
주체를 설정해야 행위가 발생하는 이분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죠.
하지만 업이 윤회합니다.
부처님의 비유를 빌면
하나의 촛불이 다 타고
그다음 촛불로 불꽃이 옮겨가 이어집니다.
이전의 불꽃과 이후의 불꽃은 같은 것이 아니지만
이전의 불꽃이 없으면 이후의 불꽃도 없습니다.
윤회가 이와 같습니다.
윤회가 민감한 주제로 등극한 것은
힌두이즘과 불교 간의 갈등 때문이 아닙니다.
둘 사이의 논쟁은 해결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개념적으로 힌두이즘은
불변의 아트만이 하는 유아윤회이고,
불교는 조건화된 업이 하는 무아윤회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유해를 인정하지 않는 서구종교, 유대교, 기독교, 회교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발생했습니다.
기록과 전승을 성실하게 검토하면
서구 종교의 윤회와 환생은
무척 많은 증거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면서
윤회와 환생은 적대적으로 폐기됩니다.
오직 한 번의 인생으로
천국과 지옥을 약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윤회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이교도의 믿음이 됩니다.
근대 자연과학과 르네상스 이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과학은 정신세계보다는 물질세계를 탐구 대상으로 합니다.
당연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는 대상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미움보다 더 나쁜 것이 무관심이라고 했죠.
윤회는 아예 반상식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세계와 존재에 이어
존재와 인식을 정리하면서
윤회는 빼고 갈 수 없는 주제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윤회 이야기를
수행에서 다루려고 했습니다.
기본 주제들이 모두 서구철학의 이름을 빌려 정의되고
서구철학의 세계, 존재, 인식, 실천의 꼭지로
이해의 평온을 넓혀가는데
갑자기 서구철학에서는 주제도 대상도 아닌
아예 주제라고 취급을 못 받는 윤회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같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기적 세계관과 유식적 인식론에 대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사람이 불교 신자가 아닌 이상
윤회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과 짙은 선입견을 가질 수 있고
이런 거부감은
이미 알아본 내용에 대해 불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무슨 마음공부이며 깨달음 제도입니까?
이것은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회를 마치 신비한 정묘 현상이나
밀교적 신앙의 세계로 묘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시중의 불교마저도 윤회를
“아이고 내 팔자야” 하는 식으로 그리면서
기복 신앙의 소재로 쓰고 있는 판이니
제대로 정리된 윤회 이야기란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실험과학으로 취급받기는 어렵지만
윤회는 분명 실증과학의 근거를 가지고 정리되고 있습니다.
윤회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힌두이즘이나 불교가 아니라
서양의 심리학자, 정신의학자들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자랑하는 조사연구에 의거한 실증적 방법론으로 말입니다.
“내게 윤회론은 오랜 악몽과도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윤회를 부정하려 했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며
내담자들과 다투기도 했다.
그러나 내담자들이
전생을 떠올리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저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천 번도 넘는 전생 사례를 조사해야만 했고
결국 윤회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드 캐넌의 말입니다.
우리가 윤회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뭔가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윤회가 빠지면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러는지
후천적인 어휘의 축적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윤회는
업의 선순환이나 업의 악순환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우주 창조 원리 중 하나이며
우리가 깨달음을 향해 가는 이유와 숭고한 목적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윤회와 관련된 연구 도서들은
한결같이 윤회를 의식의 심층부까지 들어가야 알 수 있는
전생의 기억이자
현생에 명확한 교훈을 주는 인과의 법칙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같은 종교 안에서라도
얼마나 의식 작용을 깊은 곳에서 보려고 하는지, 그 경향에 따라
윤회에 대한 믿음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마음공부에 진입하게 된 계기가
바로 윤회였습니다.
고백 비슷하게 말씀드리지만
저는 젊은 시절 제 또래들이 다 비슷하게 그랬듯
과학적 유물론자였습니다.
비록 때에 따라 오락가락하긴 했어도 그 기조는 확고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게도
절대 사서는 안 될 책을 사고 말았는데
바로 지나 서미나라의 <윤회의 비밀>이었습니다.
에드거 케이스의 리딩 이야기를 정리한 이 책을
저는 믿거나 말거나 끝까지 읽었고
한순간 마음을 바꿨습니다.
“내가 과학의 대상이라고 한정한 것들은
그저 입자를 가진 물리적 대상일 뿐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왜 과학의 대상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면 안 되는가?
이렇게 명백한 조사 내용들이 널려 있는데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비과학적이다.”
저는 만약 윤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과 거부감이 든다면
몇 권의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서구 학자들이 정리한 책만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지 않고 거부하던 윤회를
사실 조사를 통해 수긍한 사람들입니다.
지나 서미나라 <윤회>
크리스토퍼 페이지 <윤회의 본질>
브라이언 와이스<나는 환생을 믿디 않았다>
마이클 뉴턴 <영혼들의 여행>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에서
우리가 인식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말초적인 감각, 지각에 불과하고
그나마 우리가 이성과 합리라고 부르는 것조차
에고의 하위 수준인 생각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구 심리학이 이제 겨우 탐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의식과 무의식,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의 주제들이
몇천 년 전 유식학자들에 의해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 전통의 인식론에서
윤회는 어떤 의미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자세한 것은
실천 수행론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요약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의식의 생주이멸 원리가 곧 까르마이며
카르마는 온 우주를 이렇게 끌고 가는 힘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연의 화합, 인과의 원리는
윤회를 통해 엄밀하게 적용되며
절대적 정의에는 결코 예외가 없습니다.
의식 수준의 진보 과정에서
진리의 기준으로
균형을 찾으려는 작용과 반작용이 바로
윤회하는 카르마입니다.
윤회를 제거한 의식의 진보는
좁디좁은 관점을 더 좁게 만듭니다.
업의 윤회를 모르면
우리는 선천적인 조건화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현행의 과보에 대해 무시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결국
우주의 절대적 정의는 그 책임을 물을 겁니다.
물론 그 책임을 져야 할 그 누군가는
지금의 나는 아니겠죠.
그렇다면 그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카르마는 자연 안에 존재하는
되풀이되는 순환법칙으로서
깨진 균형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흐름이다.
-신지학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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