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구가 80억인데
각자가 모두 다릅니다.
쌍둥이조차도 다르죠.
네, 즉 원래 다양합니다.
본래 그런 모양이라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일단 80억 개가 있습니다.
모두 자기 세상을 보며 그 안에서 삽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형상들의 세상도
사실은 모두 같은 재료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이는 것으로도
진실을 전할 수 있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인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을 전하는 방법이 수백만 가지가 있어도
가리키는 것은 하나입니다.
사실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은
가만히 보면 일종의 경계선들입니다.
그리고 더 섬세하게 보면
그것은 80억 인류 각자의 눈높이입니다.
눈높이가 달라서 보는 위치도 다르고 보이는 가치도 다릅니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원래 그런 것이고 인연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하지만 눈높이가 다르다고 해서
가리키는 달이 갑자기 커지거나 쪼개지면
무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구도하는 이들은 이 점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에 휘둘리고 표현에 속으면 안 됩니다.
선이 가리키는 것은 쉬운데
선 공부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의 스승들도
이런 다른 눈높이는 늘 염두에 둡니다.
아무렇지 않게 주장자를 들고
아무런 질문이나 막 하는 듯 보여도
눈높이를 봅니다.
그게 보인다고 하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래서 때로는 아예 선을 폐하고
차근차근 교법을 펼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이 안 되는 눈높이도 분명히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또한 자기 입장에서
자신의 눈높이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모르면 공부가 어렵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면
결국 고생하는 것은 강아지입니다.
대사가 발우를 씻다가
새 두 마리가 개구리 하나를 두고 다투는 것을 보았는데
이때 수행승이 물었다.
“저것이 왜 저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다만 그대를 위해서이다.”
자기를 아는 기준은 정견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개념 관념으로 익힌 것도 포함해
바로 이것을 알기 위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지 점검하면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스승이라면 당연히
어디쯤인지 공부의 수준을 알려줍니다.
스승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진솔하다면
지나친 교만이나 지나친 겸손이 아니라
정직하다면
이것을 가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선이 언어와 의미를 떠나게 하는 것에는 유용하고 탁월하지만
스스로 지니고 있는 낡은 관념의 틀을 내려놓으려는 의지가 없다면
전혀 무용합니다.
선문답도 그런 관념들이 되어버리고
내가 뭘 좀 안다는 아상이 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공부는 내가 하는 것이지 방법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바르게 듣는 것입니까?”
“귀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듣기나 했는가?”
목석과 내가 다르지 않은 금강경의 이치를 법사가 실토하자
혜해는
“목석과 네가 다른 것이 무엇이냐?”라고 다시 묻습니다.
같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른 것은 또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틀에 갇혀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지혜나 명철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심리의 문제입니다.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니 뻔한 것도 안 보입니다.
그냥 둘 다 모양을 가진 것은 같은데
그 모양이 다르다고 답하면 되지 않습니까?
“6식이 모두 일어날 때는 어떻습니까?”
“다르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같다.”
선문답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는 이가 또렷하고 말뜻에 따라가지 않으면
선사가 무엇을 묻든 거기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수행으로서 선 공부는
각성을 행하는 방법에 다름없습니다.
명상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묻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그대가 물어 내가 대답한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모른다.”
우리가 흔히 보는 선문답은
은산철벽, 무쇠로 만든 소 등에 앉아
피를 빨아야 하는 모기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결정적인 순간을 선제적으로 가정함으로써
공부하는 이들의 마음 각오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상이 그런 식이라면
사흘이면 끝날 수도 있을 정도의 긴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아서
끈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산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산을 오르다 말고 계곡에 주저앉아 파전만 부쳐 먹으면서
열심히 오르는 이들을 꼬드기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산을 오른다고 착각합니다.
자기 눈높이에서 열심히 무언가 하고 있기는 하거든요.
“어떤 것이 부처의 외길입니까?”
대사가 땅을 가리켰다.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꺼져라.”
80억 개의 눈높이가 있습니다.
각자의 살림살이에 따라 표현은 다르고 이해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깨어 있음에 대해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여기에 타협이 들어가면
선공부는 아상만 키우는
기괴한 인공지능 회로가 되고 맙니다.
어떤 행자가 무리를 이끌고 오니 대사가 말했다.
“나를 보러 온 사람들아, 동쪽을 무엇이라 하는가?”
“동쪽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 썩을 놈들아, 동쪽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는가?”
“스님, 동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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