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붉은 살덩이 위에
무위진인이 있어 항상 그대들의 면전을 출입한다.
보이는가?
만약 보지 못하거든 보는 놈을 보라.”
보이는 것이 모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아십니까?
생명이 있어 유기체라고 부르는 동물, 식물뿐만 아니라
돌멩이, 나무, 조각, 콘크리트, 기둥, 옷자락, 심지어 김치 쪼가리까지 살아있어
말을 거는 듯한 느낌입니다.
저는 한참 동안 찌그러진 맥주캔과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것이 너무나 확연해서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이것이 그것이라고 실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부처고, 예수고, 스승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잘못 끼어든 스승은 제자에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스승은
“깨갱”하며 물러날 줄도 알죠.
대부가 남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했다.
“조법사는 천지와 내가 같은 근원에서 나오고
만물과 내가 하나라고 했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남전은 문득 뜰 앞의 꽃을 가리키며
“대부” 하고 불렀다.
“세상 사람들은 이 꽃을 그저 꿈결처럼 바라보고만 있지.”
현대 심리학을 영성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켄 윌버에 따르면
사람은 그 의식 수준이 어디에 있든
비이원 상태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수준에서 거친 물질적 경험은 물론
정묘한 심령 체험도 할 수 있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하나가 되는 일체의 경험과
텅 비어버린 공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식 수준에 따르는 관념, 감성, 직관에 한계가 있어서
그것을 자기 눈높이에 맞게 해석하게 된다고 합니다.
알맞은 의식의 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가 하느님을 직접 보고도
산타클로스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선의 세계도 그와 같습니다.
“거울은 일체를 비추어 드러내나
거울 자체는 알거나 흔들리는 것이 없다.
그래서 거울이
일체 어느 것이든 분별함이 없이 모두 비추듯이
내 마음이 모든 존재의 뜻과 인연을 비추어 안다 ”
달마선법에 나오는 ‘가리켜 보이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런 체험의 상황에서는
주변의 무엇을 가리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온통 가득한 그 무엇을 느낍니다.
분명 나뭇잎과 나무줄기와 나무뿌리가 거기 있는 것을 알지만
그런 분별은 사라지고
마치 나무가 내 몸처럼
내가 허공에 나뭇잎을 그리고 있는 듯 느껴지는 것이죠.
어떤 중이 와서 뵈니 대사가 말했다.
“그대는 행각하는 중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부처님께 절을 했는가?”
“그 흙덩이에다 절을 해서 뭐 합니까?”
“어서 썩 나가거라.”
전등록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스님은 행각승을 타박합니다.
흙덩이로 만든 부처에 절을 안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흙덩이라 여긴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행각, 즉 목표를 지니고 여기저기 가르침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구도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겸손함도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행각승 스스로 자기 수준을 드러내니
스님도 더 가르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흙덩이에서 나를 보라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부처의 형상을 띤 흙덩이에서
흙덩이만 보는 부처의 제자라니
근처에도 못 온 것이지요.
무심선원 김태완 원장의 <선으로 읽는 대승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누가 밀가루를 보여달라고 해서 빈대떡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밀가루다 했더니 못 알아먹습니다.
모양, 형상만 보는 사람에게는
빈대떡만 보이는 겁니다.”
부처는 형상이고 흙덩이는 본질이니
본질을 본 걸까요?
사실 모든 형상은 내 의식의 투영입니다.
우리는 유식론을 통해 그 이치를 봅니다.
보는 이와 보이는 것이 분리되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자 습관일 뿐이라고
유식학은 알려줍니다.
“크게 잘못됐구나 크게 잘못되었어
발을 걷어올리니 천하가 보이는구나.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법을 풀었냐고 물으면
불지를 접어들고 곧장 그 주둥이를 내리치리라.”
알고 보면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이 확연한데
우리의 익숙한 인식 과정은
쉽게 그런 직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문턱을 넘으면 정말 꿈에서 깬 기분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단순하고 가벼워서
이걸 가지고 그렇게 오랫동안 찾고 구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갖추고 있었던 것임에도 말입니다.
“눈썹과 눈이 서로 압니까? 모릅니까?”
“서로 모른다.”
“어째서 서로 알지 못합니까?”
“같은 곳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확연함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분리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같이 있어 알지 못하다가
같이 있다고 알려면 뜯어 헤쳐야 할 것입니다.
뜯어 해치는 일과 같이 있음을 아는 일은
같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대사가 중에게 물었다.
“그대는 소를 본 일이 있는가?”
“보았습니다.”
“왼쪽 뿔을 보았는가? 오른쪽 뿔을 보았는가?”
중이 대답이 없으니 대사가 말했다.
“보는 것에는 왼쪽과 오른쪽이 없다.”
이제 모두 다 아는 확연함의 비밀을 공유하겠습니다.
세상 사물과 현상을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들은 내가 아닙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내가 알아채고 있으니
그것들 또한 내가 아닙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걸
알아채는 나도 느껴집니다.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압니다.
마치 자동차 문에 달린 거울에
이런저런 주변이 비치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가득합니다.
확연하지 않습니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하신 선문답 한 편을 전해드리며
다소곳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의 이름은
I AM THAT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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