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
뜨거운 것은 뜨겁고, 차가운 것은 차가우며 색은 색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텅 빈 공간 뿐이다.
-데모크리투스
지난 동영상에서
서구 인식론의 감각과 지각에 해당하는 불교 인식론의 영역으로
짧게나마 오온과 18계 설명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불교 인식론 전체에 대해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오온과 18계 이후로
불교 인식론은 치열한 탐구가 계속되어
마침내 유식학에 이릅니다.
불교 인식론을 제대로 깨끗하게 정리해 주면 좋겠다 싶다면
그런 것이 이미 있다고 안심해도 됩니다.
동양철학에서 의식의 발생 과정을
이토록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는
서구 철학자들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유식학은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론이라고 따로 떼어 설명하기는 어렵기도 합니다.
이른바 의식의 문제가 곧 인식론의 주제입니다.
인식작용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의식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물론 유식학에서 의식은
8식 중 제6식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죠.
넓은 의미로 쓸 때와 좁은 의미로 쓸 때의 차이만
유의하면 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또한 그것을 [마음]이라는 말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이번 동영상의 제목인 만큼
간단하게 용어를 봤습니다.
유식불교는 깨달음 지도 2장
세계관과 존재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세계관이 아닌 인식론의 측면에서 간략하게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자꾸만 간략하게 하겠다는 언급을 계속하는데
유식 이론이 워낙 방대하고 또한 세밀해서
그것을 모두 다루지 못한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유식이론을 아주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본래 하나의 진리인 일심의 자리에는
능(주관, 주체) 소(객관, 대상)가
따로 나뉘어 있지 않은데
홀연히 무명의 바람이 입니다.
일심에서 견분을 세우니
동시에 상분이 전개됩니다.
이렇게 견분과 상분의 미세한 분리가 이루어진 자리를
아뢰야식이라 이름합니다.
동시에 제8식의 견분을 나라고 여기는 세력이 이루어지며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흐르는데
이것을 말라식(제7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잠재된 가운데
상분을 대상화하는 것이 더욱 거칠게 이루어집니다.
이 대상들에 대한 증오, 애락, 시비 등의 모든 분별심이 전개되는데
이를 의식(제6식)이라 합니다.
이 분별심이 또 전변하여
그 상분을 각 방면 별로 분별해 인지하게 되는데
이를 전5식(안이비설신)이라 합니다.
동시에 전5식 각각의 상분을 또 한 번 더 대상화하여 변하니
본래 의식 안에 있던 것들이
식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곧 색성향미촉이며, 모든 바깥 대상들입니다.
결국 제8식 이하의 모든 식의 경계는
미혹으로 인해 나온 것이요, 꿈일 뿐입니다.
바로 본래 일심인 까닭에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 자리인 것인데
이를 따로 나누어 분별 집착하니
생사윤회는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식의 변화 과정을 거꾸로 읽으면
마치 서구철학의 인식의 기원을 찾아가는 모양새가 됩니다.
서구철학은 어디쯤 이르렀을까요?
어이없게도 서구철학은
전5식의 감각과 제6 의식,
즉 생각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 이상에 대해 인식론으로 더 진도를 나가는 것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처음으로 이해한 사람이
바로 칸트입니다.
전5식의 감각과
제6 의식의 지각, 생각, 경험, 이성을 넘어
제7 말라식의 발견으로 가는 여정은
서구철학에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인간 의식의 근원으로 가는 인식론적 탐구는
파편화 형해화되었고
서구철학에서 이 영역은
인식론 대신 심리학이 담당하게 되었죠.
이 이야기는 다음 동영상에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5식과 제6의식은 분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세친 스님의 유식30송에서는
전5식과 의식을 합쳐 6전식이라고도 하는데,
6전식의 특성에 대해
“대상을 요별함으로써
성품과 모습을 삼는다”라고 말합니다.
6전식의 인식 작용의 특성은 분별하는 것이고
결과 또한 분별된 형상입니다.
또한 6전식은
조건에 따라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특히 감각에 해당하는 전5식은
근과 경의 조건
즉 감각기관과 대상의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단독으로 혹은 같이 일어납니다.
그에 비해 제6의식은 대부분 일어나지만
잠을 자거나 기절을 하면 끊깁니다.
감각작용은 꽤나 까다로운 조건이 갖춰져야 일어날 수 있지만
생각은 거의 늘 일어나며
깊은 잠을 자거나 기절할 때만 끊깁니다.
그리고 전5식 즉 감각은
반드시 제 육식과 함께 해야만 인식작용이 됩니다.
이는 전5식이 일어나게 하는 경각심이
제6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6의식이 없으면 감각이 있어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넋이 나가면 아픈 거야 모르죠
감각을 식별하는 힘을 가진 제6의식을
우리는 지각이라고 합니다.
제6의식은 오로지 전5식의 감각만 식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독자적인 대상을 식별하기도 합니다.
이 유식학에서는 상세히 분류합니다.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제6의식식의 작용을
크게는 오구의식과 불오구의식으로 나눕니다.
즉 감각과 연관된 생각과 감각과 관계없는 생각입니다.
오구의식은 감각과 관련된 생각인데
감각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감각한 것과는 다른 것을 지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큰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거나
본 것과 다른 것을 연상하는 경우입니다.
불오구의식은 감각과 떨어진 생각입니다.
감각을 기억해서 일어나는 생각이 있고
감각과는 아무 상관 없이 스스로 일으키는 생각이 있습니다.
잡념, 상상, 추론, 꿈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휴대폰을 든 현대인들은
불오구의식의 비중이 어마하게 큽니다.
감각을 느낄 계기는 줄어들고
공상을 할 기회는 널려 있죠.
정보통신 기계들은
대부분 이 영역을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전5식과 제6의식,
즉 감각과 지각, 생각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유식학은 알다시피 제8식까지 있다고 했죠.
전5식과 제6의식이 작동하는 동안 제7식과 제8식은 뭘 하는 걸까요?
모든 경우에 7식과 8식은 함께 일어납니다.
사실 알고 보면 7식, 8식은
그 아래 의식들의 주인이자 바탕입니다.
예를 들어
깊은 잠에 빠지면 전5식과 6의식이 모두 멈춥니다.
유식학은 이 상태에서도 7식과 8식이 작동한다고 합니다.
가설이 아니라 직접 체험으로 알아낸 겁니다.
깊은 잠에 빠진 것과 달리
깊은 명상의 상태에서도
전5식과 6의식이 사라질 수 있거든요.
바로 그 상태에서 감각도 지각도 생각도 없는데
[아는 무언가]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유식학의 인식 발생 체계를 간단하게 정리해 봅시다.
-처음이 제8식, 아뢰야식입니다.
계속 이어간다는 뜻으로 이숙식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는 제7식, 말라식입니다.
계속 헤아린다는 뜻으로 사량식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우리가 아는 감각에서 의식까지 합친 전6식입니다.
대상을 분별한다는 뜻으로 요별식이라고도 합니다.
제8식 속에 저장된 원인에 따라 일어난 의식은
견분과 상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제7식은 잽싸게 견분을 자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는 나와 보이는 세상이라는
우리의 현실이 출연합니다.
우리 현실이란 다름 아닌
6섯 가지 지각 감각으로 알게 되는 현상입니다.
이런 과정이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끝없이 진행됩니다.
드러난 현상과 체험의 결과는
다시 제8식에 저장되어 일어나는 원인이 됩니다.
흔히 유식학을 배우면
가장 강조해서 듣는 말인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인식의 발생 과정이
곧 세계의 발생 과정이라고 유식학은 설명합니다.
유식이 단순히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은
철저한 착각 때문입니다.
다음 동영상에서는
그 착각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앰브로즈 비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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