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내면의 주시자, 혹은 관찰자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말 그대로 무언가를 관찰하는 존재
나와 동떨어진 더 높은 차원의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내 내면의 주시자 혹은 관찰자는
여전히 나의 육체적 자아를 이루는 의식의 일부입니다.
그래서 주시자도 에고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주시자 혹은 관찰자는
에고 스펙트럼의 한 부분이기에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 자아는 분류의 특징이 있기에
최소 22개 이상의 인격체가 내 안에 있습니다.
주시자 관찰자는 중립적인 상태에서
아무런 판단과 평가 없이
나의 주위와 환경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관찰하는 의식입니다.
우리가 듣게 되는
즉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지나가는 말들은
대부분 이 관찰자의 관찰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중립적인 인식, 정보 보내기, 그리고 당장 할 행동을 결심하는 것 등이
그 대부분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부는 군
-행인이 지나가네
-3시가 넘었구나
-이젠 식사를 준비해야지
등등 감정의 동요를 전혀 일으키지 않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덤덤히 기록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또한 육체적 의식의 중앙이라 할 수 있는 위치에서
내 생각과 감정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내 행동과 외부 상황뿐만 아니라
내면을 관찰할 수도 있으며
자신이 어떤 대상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좀 더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혹은 더 의식적으로 외부 세계를 관찰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중립적인 관찰 대신
“또 이런 실수를 하네. 난 역시 멍청해, 제대로 하는 게 없어” 라는
비난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누구일까요?
이것 역시 우리의 관찰자의 목소리입니다.
관찰자라 하여 영원히 중립적인 위치에 있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겐 긍정적인 관찰자와 동시에 부정적인 관찰자가
함께 있습니다.
부정적인 주시자는
늘 나를 비난하고 가치가 없다고 나무라고 있습니다.
부족하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또 부정적인 지시를 내리거나 꼬득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슬쩍 집어넣도록 해
정정당당히 하며 남들보다 더 빨리 갈 수 없어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등등
진정한 우리 자신과 정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어긋나는 행동이
괜찮다고 정당화시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적 심리에서 나오는 나의 내면의 대화와
인격의 여러 조박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것을 외부의 목소리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으로 투영된 이야기가 바로 악마
부정적 비물질적 존재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 의도를 가지고 있고
단절을 경험하고 있는 비물질적 대상 역시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투사된
즉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외부의 존재로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나와 외부의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주시자의 목소리가 들릴 경우
이 주시자를 다시 중립적인 관찰을 하는 위치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 다음
그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시자의 평가를 살펴봅니다.
그런 다음
어떻게 다시 진정한 나와의 조화와 정렬을 이루게 할 것인지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합니다.
즉 내 감정과 생각을 인식하고
그것이 사실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그러한 믿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은
바로 나를 중립적인 관찰자, 주시자의 위치에 세우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주시자가 있으면 긍정적인 주시자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주시자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긍정적인 주식자는 늘 진정한 우리의 존재에 대해 일깨워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정, 흥미,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도우며
‘내가 가치 있는 존재다’라고 늘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지
혹은 나를 포함해 모든 대상을 향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려 합니다.
우리의 성장을 도우며
칭찬과 격려로 나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등
언제나 우리의 본질인 신성의 의식으로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어떤 주시자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 체계에 의해 좌우됩니다.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힘을 받고 앞으로 나올 목소리의 내용과
그에 따른 나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관찰자는 본래 인격이라기보다는
에고의 한 기능에 가깝지만
우리의 믿음 체계로 인해
인격화도 가능하게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내 내면의 주시자 혹은 관찰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좀 더 의식적으로
이러한 면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누군가가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다던가
싸움이 일어났다던가 기타 등등
내가 선호하지 않는 무언가를 목격하게 되었을 때
중립적인 관찰자는
감정의 동요를 전혀 일으키지 않고
그 상황을 관찰만 할 수 있게 됩니다.
중립적으로 관찰만 하게 되면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자극되지 않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가 선호하지 않는 평행현실로 이동하는 경험을
하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감정과 평행 현실 이동의 관계에 대해선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관찰자를
나 자신의 감정,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외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또는 더 이상은 내 감정과 이 감정을 유발한 믿음을
외면할 수 없을 정도의 더 큰 사건으로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주시자, 관찰자는 원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내 의식의 작용이지만
내 의지로 인식할 수도, 또 필요에 따라 중립의 위치에 세울 수도 있는
나에게 속한 것입니다.
즉 이 주시자 혹은 관찰자도
내 인격의 한 부분이고
내가 받아들이고 주입시킨 믿음 체계를 양분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주시자만이 나일 수 없고
관찰자는 관찰 대상과 따로 떨어져 전혀 무관할 수 없습니다.
관찰할 대상이 없으면 관찰자도 없습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은 하나에서 나왔으며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 우리의 인간적 의식은
분리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경우에 따라 각각 독립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가능한
여러 인격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관찰자를 관찰하는 영적인 존재 주시자는
에고에 대항하여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나의 또 다른 인격체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주시자 관찰자가
내 인격의 하나라는 사실이 불편하다는 것은
에고를 부정적으로 정의하고 있고
영적인 나의 면만을 가치 있다 여기는
판단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에고와 나의 관계가 어떠한지
에고에 대한 나의 믿음과 정의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물어보고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물론 그럴지 말지
그러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선택하는 것은
늘 나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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