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1)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원인과 결과는 왜 달라지나요?

Buddhastudy 2021. 5. 14. 20:06

 

 

저는 인과법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어떤 결과가 나온다면 그 원인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원인이 주어졌다고 어떤 결과가 무조건 나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주위의 상황에 따라 그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내가 지은 행위의 결과는 절대 피할 수 없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인과법이라는 것은 요약해서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는 인연과보법입니다, 인연과보.

인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원인, 내가 행하는 것,

연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때 주위 조건.

인연이 만나서, 인연이라고 그러잖아 그죠?

인연이 만나서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에 따라 고통이 따른다, 이게 보에요. .

복이 따르든 재앙이 따르든 따른다.

결과 자체는 고통이 아니에요.

다만 결과가 생기는데 그 결과가 괴로움이 된다. 그게 보에요.

그래서 인연과보 이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과가 있다면 그건 반드시 원인이 있었다, 인연이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과보가 있어요.

인이 있었다고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싹이 텄다. 그건 반드시 씨앗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잖아.

그럼 씨앗이 있다고 반드시 싹이 텄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씨앗은 싹을 틔우는 원인이기는 하지만 불에 떨어지면 싹을 못 틔우잖아.

그래서 반드시 씨앗이라고 하는 인과

그것이 습기와 온도라고 하는 연을 만나야 싹을 틔운다 이 말이야.

그래서 인연이라고 말하는 거요. 인연.

 

그래서 무인무연이면 무과이고

유인무연이라도 무과이고

무인유연이라도 무과다.

아무리 습도와 온도를 갖추어 놔도 씨앗이 없으면 싹을 틔울 수가 없고

아무리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습도와 온도가 안 맞으면 싹을 틔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인연과보라는 건 반드시 인과연이 만나야 한다는 거요.

인연이.

 

씨앗만 갖고도 안 되고, 온도와 습도만 가지고도 안 되고

그 둘이 만나야 결과나 나온다.

그래서 인연과 또는 인연과보.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거는 인과응보하고는 다릅니다.

인과응보라는 것은 복수의 개념이 들어있습니다.

네가 만약에 나쁜 짓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나온다하는 복수의 개념이란 말이오.

자연적으로 그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건 자연보복의 법칙이란 말이오.

그런데 인연과보는 복수의 개념이 아니에요.

법칙의 개념이지. 법칙의 개념.

 

그런데 그 법칙에서 만약에 내가 좋은 말을 한다.

상대에게 내가 좋은 말을 하면 나중에 좋은 말을 듣는다.

그런데 이게 도식적이지가 않아요.

좋은 말을 했을 때와 내가 상대에게 욕을 했을 때

좋은 말을 들을 확률이 어느 게 더 높아요?
좋은 말을 했을 때가 확률이 더 높죠. 이런 뜻이에요.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을 들을 확률이 더 높고,

나쁜 말을 하면 좋은 말을 했을 때보다 좋은 말을 들을 확률이 떨어지는 거요.

그럼 현실적으로 내가 선택할 때는 어느 것을 할까?

좋은 말을 들으려면 좋은 말을 해야 하겠죠.

그런데 좋은 말 한다고 반드시 좋은 말이 들어온다, 이런 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인은 좋은 말로 짓지만

상대라고 하는 연이 있기 때문에

거기 가서 부딪혀서 안 돌아올 수도 있고, 돌아올 수도 있는 거요.

요즘 말로 하면 확률론이에요.

 

결과는 원인은 필연이고

결과가 있었다면 원인은 필연이고.

원인이 있었을 때 결과는 필연이 아니에요.

이것은 연이라고 하는 조건 때문에.

 

그러니까 누가 나한테 욕을 하면 보통 같으면 욕을 하면 욕이 돌아온다, 이렇게 되지만

부처님한테 욕을 하면 욕으로 안 돌아오잖아요.

욕을 했는데 욕이 안 오잖아요.

그런데 아주 나쁜 놈이다 그러면

내가 칭찬했는데 욕으로 돌아올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확률적으로

욕을 하면 욕이 돌아올 확률이 높고, 칭찬하면 칭찬이 돌아올 확률이 높고

복을 지으면 복을 받을 확률이 높은 거예요.

복을 받았다 하면 그건 반드시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되고.

원인이 먼저 있을 때는 결과는 확률이 높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과가 생긴다면 그건 피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건 무슨 피한다고 피해지는 게 아니라는 거요.

인연이 없어서, 연이 없어서 그것이 안 나타날 수는 있거나 나중에 나타날 수는 있지.

 

--

피할 수 없다, 이 말 속에는

그것이 싹이 튼다면

다시 말하면 내가 빚을 지었다. 빚을 지었으면 그거는 내가 어디 도망을 가도 빚을 반드시 갚아야 된다는 거예요.

피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100%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상대가 안 받겠다고 하면 피하는 거하고 상관이 없잖아요. 상대가 안 받겠다고 하면

그런 경우를 말하는 거 같아요.

상대의 연이

오케이, 난 안 받을게할 때는 과보가 안 따를 때가 있죠.

 

그러니까 중생은

원인을 지어놓고 결과를 피하려고 그러고

나쁜 거는 안 받으려고 그러고

좋은 거는 짓지도 않으려고 받으려고 그러고

그게 어리석다는 거요.

 

그러나 보디사트바, 보살은 복을 지어놓고 복을 안 받으려고 그래.

안받으려고 한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 연연하지 않아.

?

필요한 사람 줘버리니까.

 

또 보살은 중생을 위해서 과보를 각오하고 행동도 해.

과보를 각오하고.

예를 들면 누가 물에 빠졌다. 건지려니까 손이 안 닿는다.

장대를 갖고 건져야 하는데, 장대 주인이 없다.

그럼 내가 장대를 가져와서 사람을 건졌다 이 말이오.

그러면 좋은 일 했잖아요.

그런데 장대 주인 입장에서는 보면 내가 장대를 훔쳐 간 사람이잖아.

그럼 내가 그걸 배상을 해야 한다는 거요.

 

나는 배상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저 사람을 살려야 하겠다, 이게 보디사트바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장대를 썼기 때문에 과보를 안 받는 게 아니라

그래도 과보를 받아요.

비난을 받든지, 물어줘야 해.

 

보살은 그 과보를 받으면서 중생을 살린다.

일반 중생은 칭찬받으면서도 안 살리려고 하는데

보살은 비난을 받으면서도 살릴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놔라, 그런다잖아.

그런데 보살은 어떻게 해야 돼요

저 놈 건져주면 반드시 나를 해칠 거니까 안 건져줄까?

아니에요. 내가 한 대 맞더라도 내가 한 대 맞고 사람 생명 하나 건질 수 있다면

건져주고 한 대 맞는다.

이게 보디사트바에요.

 

중생은 복은 안 지어놓고, 복을 받으려고 그러고

또 중생은 잘못은 해놓고는 또 나쁜 과보는 안 받으려고 그러고.

그러니까 그게 될 수가 없다는 거요.

될 수 없다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이 인연법칙을 얘기하는데

그거는 부처님이 이미 그것이 어떤 기계론적인 인연과가 아니고

일종의 확률적인 논이다. 이런 뜻이에요.

 

--

그런데 그거는 요거하고 조금 달라요.

열심히 노력한다고 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예를 들어서

자전거를 배우는데, 100번을 넘어지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2번 넘어지고 안 됐다.

내가 2번이나 연습했는데 안 되지 않냐?” 이럴 때 말이 안 맞잖아요.

열심히라는 게 그게 어느정도냐,

그 일이 이루어지려면 100발을 가야 하는데

자기는 10발 가놓고

“10발이나 했는데도 안 되지 않느냐

그러니까 인연과보가 맞지 않지 않느냐?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거죠.

 

물을 50도까지 끓여놓고 안 끓는다고

봐라, 지금까지 불 땠는데도 안 끓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는 거는 맞지 않다는 거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죠.

첫째, 그것이 우선 이치에 맞느냐하는 거고

두 번째는 그만한, 그게 이루어질 수 있는 거까지 노력이 됐느냐? 하는 2가지에요.

그리로 안 가도 엉뚱한 곳으로 갔다면 아무리 열심히 가도 도달 못할 거 아니오.

두 번째 그 방향으로 갔다하더라도 그만한 노력을 했느냐 하는 것을 어떻게 검증해요.

그래서 열심히 노력한 거하고 결과하고는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는.

 

--

그렇죠. 그게 아까도 얘기했지만

씨앗을 심었는데 가뭄이 들어서 습기와 온도가 없으면

아무리 열심히 씨앗을 뿌려도 추수가 안 나는 거고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태풍이 불어서 쓰러져 버리면 아무 수확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인연과보잖아요. 인연과보.

 

지금 자기가 열심히 노력했다라도

무슨 재난이 오거나 어떤 정책이 바뀌어 버리거나 그러면

그건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늘 있는 일이에요.

 

아무리 농부가 농사 열심히 지어놔도

가을에 이번 여름같으면 채소 재배하는 사람들 다 수확을 못했잖아요.

그러면 이게 하느님의 징벌이고 과거의 지은 업이고 그런게 아니라는 거요.

 

그거는 하나의 인연이죠.

이건 보복의 개념이 아니고

나쁜짓했으니까 벌준다이런 개념이 아니라는 거요.

그냥 법칙이라는 거요.

 

그러면 농사 안 지을 거냐?

아니죠.

또 내년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내년에 또 연달아서 그럴 수 있다는 거예요.

연달아서 그렇다고 하느님이 벌주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건 그 일이 연달아서 일어났을 뿐이지.

 

주사위를 던지면 1의 눈이 6번 마다 한번 나타나는 게 아니잖아요.

연달아서도 나타날 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 다만 할 뿐이다.

 

--

그게 욕심이죠.

그거는 잘못된 생각이죠.

내가 노력을 하면 된다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아까도 확률 얘기했잖아요.

농사를 열심히 짓는 사람이 안 짓는 사람보다 수확할 확률이 높다고 말하지

반드시 수확한다 이렇게는 말할 수 없다는 거요.

 

그건 일반적으로 보면 재수 없다, 뭐 사주팔자가 안 맞다, 궁합이 안 맞다 이러지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그래요.

모든 일이.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코로나바이러스 걸리는 것도

주의를 엄청나게 했는데도 걸리는 사람이 있고

내 마스크 벗고 돌아다녔는데도 안 걸리는 사람 있고 그러잖아요.

 

그러나 마스크를 낀 사람하고 안 낀 사람하고 확률로 따지면 누가 덜 걸릴까?

낀 사람이 더 걸리고, 주의한 사람이 덜 걸리지 반드시는 아니라는 거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

그런 예외 현상을 가지고 하면 요행을 바라는 게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