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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아! 이것이 그거였구나! (깨달음의 길 43화)

Buddhastudy 2021. 10. 12. 18:43

 

 

 

이 반야는 유심무심, 마음이 있다 마음이 없다, 얻었다는 마음, 못 얻었다는 마음

구탕진이라_ 모두 다 탕진시켜 버려요, 다 없애버려요.

일체 좋다는 생각 나쁘다는 생각, 밉고 좋고, 일체 생각을 다 탕진시켜버려요.

탕진이라는 건 없앤다 이 말이에요.

일체 생각을 다 없애버리면 어떻게 되냐?

 

공공유유일령대_ 비고 비어서

유유_ 오직 있다, 오직 유 있을 유 일령대_ 한일 신령 령 받침 대

한 신령스러운 받침, 한 신령스러운 그것이 오직 있을 뿐이다.

이게 얻었다 못 얻었다, 있다 없다, 나다 너다, 이런 게 전혀 없고

그건 무명이에요, 무명, 망상.

애증 공포, 의혹 이런 거 전혀 없고

공공유유일령대_ 비고비어서 그럼 비고 비우면 그게 어떤 거냐?

오직 하나가 있는데, 오직 하나의 신령스러운 그것이 있을 뿐이다.

이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오직 하나의 신령스러운 그것이 있을 뿐이에요.

 

죽는다 산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이건 전부 무명입니다.

늙었다 젊었다, 남자다 여자다, 전부 무명이에요.

그게 유심무심입니다, 마음이 있다 마음이 없다.

이게 다 탕진되어 버리면 공공해서 오직 하나의 신령스러운 그것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신령스러운 그것이 반야바라밀이고,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내가 얻었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그건 눈에 먼지 집어넣은 거고요

못었다 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자기 눈을 저 밖에 가서 찾는다 이 말이에요.

중생이다 부처다, 나다 너다, 있다 없다, 이 생각 싹 씻어버리면 그게 반야바라밀이지

뭐 어디 가서 찾고, 찾았다는 생각을 갖고, 이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생각 너머로 들어가야 해요. 그게 바라밀이에요.

반야로서 그 생각 너머로 가야 한다 이 말이죠. 생각 너머.

우리가 생각 속에서 사는 거예요.

생각 속에서 살아서 그 생각 너머로 들어가자도 하는 게 잘 안 돼요.

 

그것을 그전에 도인들이 어떻게 비유를 했냐하면

담마기금이라고 짊어질 담, 대마초라는 마, 단마,

삼덩어리인데, 삼덩이리를 오랫동안 쥐고 오던 사람이 금덩어리를 만났어요.

그런데 금덩어리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그 삼덩어리를 버리기가 아까워서, 삼덩어리를 계속 짊어지고 금덩이는 버리고 갔어요.

이게 버릴 기, 금 금,

 

맨날 생각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이 생각을 내려놓으면 진반야가 나타나는데

그 생각을 못 내려놓는 거예요.

그 삼덩어리 짊어지고 진금을 버린다, 단마기금. 버릴 기,

도인들의 법문이에요.

 

우리가 꼭 그와 같아요.

그리고 생각을 내려놔야 반야가 나타나는데

생각으로 요것이 반야 일까? 저것이 반야일까? 이렇게 헤아리는데,

이것은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는 것과 같다. 이랬어요.

 

그 생각으로 반야를 헤아리는 것은

여치형아하야 소미산이니라, 원각경 금강경에 있는 말인데

형아를 취해서 반딧불, 소수미산_ 수미산을 태우는 것과 같다.

생각으로 반야가 이렇다 저렇다, 이것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는 것과 같고

또 생각을 딱 붙잡고 반야에 못 들어가는 것은 삼덩어리 짊어지고 금덩어리 버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도인들이 다 설명을 했어요.

그런데 이게 불가사의한 게 생각을 내려놓을 때 반야가 드러나요.

그것이 바로 유유일령대라_ 오직 하나의 신령스러운 그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게 바로 보리이고 반야인데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게 뭐냐?

이게 무명 때문에, 무명이라고 하는 놈은 밝음이 없다, 이렇게 되는데,

밝음이 없는 게 아니고요, 구사론 같은 데서는 무명을 어떻게 설명 했느냐 하면요,

없는 게 아니에요, 있기는 있는데 고약하게 밝은 거예요.

 

그래서 비유 하기를

집안에 아들 녀석이 하나 있는데, 아들 녀석이 하도 나쁜 짓만 계속하니까 나는 아들 없다 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들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이 녀석이 계속 나쁜 짓만 하니까

아예 나는 아들 없다, 이렇게 말한 거와 똑같다 라는 거죠.

 

무명이라는 게 밝음이 전혀 없는 게 아니라

엉뚱하게 밝고 뒤섞여 밝아서 그렇거든요, 뭐와 같으냐 하면

 

산에 갔는데 금덩어리가 하나 있어요.

금덩어리로 알고 보자기에 싸서 가져왔어요.

그런데 그 녀석이 금덩어리가 아니라 황금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거였어요, 황금 뱀이.

그런데 추울 때 똬리를 틀고 있는데, 이 녀석을 집에 갖다 놓으니까

겨울잠을 다 깨고 나니까 잠에서 깨서 그 집안 분탕질 다 치는 거예요.

그거와 같다.

 

그러면 이걸 뭐로 설명하냐 하면

황금 뱀을 사람 몸에다 비유한 거예요.

처음에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참 사랑스럽잖아요.

어머니가 처음에 태어난 이 아이들은요, 무슨 사고를 쳐도 다 봐줘요.

그러니까 사고 친 게 문제가 전혀 아닌 거예요.

요만한 아이가 집안을 홀라당 태웠어도 다 예쁘다고 그러지, 야단 안 칠 거예요.

그런데 이 녀석이 조금 크면 그보다 훨씬 못한 사고를 쳐도 막 야단치잖아요.

그러니까 나무라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거지, 사고 친 내용에 있는 게 아니다.

 

방에 가서 물었어요.

15년을 산 남편이 다른 여자한테 살러 간다고 하니 어쩌냐?

그러면 그 남편이 15년 살아보니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해서 나는 오늘로서 가정생활은 그만하고 도를 닦으러 들어가야 되겠다 하고 떠날 때는 어떠냐 하니

그때는 보내준다는 겁니다.

딴 여자한테 살러 가는 건 안 보내주고, 도 닦으러 간다는 건 보내준다는 거예요.

가는 건 똑같은데 왜 이리 가는 건 되고 저리 가는 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로 가느냐를 문제 삼는 거 아니에요.

바로 그거에요.

사고 친 그 자체가 문제가 하나도 안 되고

누가 쳤느냐에 따라서 내 마음이 문제거든요.

그런 거예요. 이치가.

 

어린아이 때는 다 사람들이 좋아해요.

그런데 커봐요. 틀리거든.

그러면 젊을 때까지는 이 몸이 좋아요.

거기까지는 그 뱀이 집에 와서 겨울잠에서 아직까지 안 깨어난 걸 말해요.

그런데 40이 넘으면 눈도 어두워지고 막 아픈 데가 새로 생기고 이래서

그때부터 이 녀석이 겨울잠에서 깨서 막 요동치는 거예요, 뱀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그냥 근심을 준다 이거죠.

이 몸이 딱 그와 같다는 거지.

 

겨울잠 든 것처럼 황금 뱀이 자고 있어요. 완전히 금덩어리죠.

깨어나면 입장이 달라진다.

우리 몸도 처음에 어리고 자라고 이럴 때는 별문제 없는데

늙어가면서부터는 온갖 병이 다 나오고, 온갖 문제가 다 생기니까

그런 집안에 들온 뱀과 같다.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그 잠들어있는 뱀을 황금으로 본 그게 무명이에요.

본 거예요, 틀림없이. 봤는데 잘못 봤을 뿐이에요.

전혀 못 본 게 아닙니다. 무명이라는 게.

본 거예요.

 

그래서 밝음이 없는 게 아니라 밝음이 있기는 있는데,

잘못 보니까 이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래서 무 자를 붙인 거예요.

아들놈이 하도 애를 먹이면, 나는 아들 없다와 똑같은 거예요. 이렇게 설명했어요. 구사론에서.

 

그럼 이 무명이라는 게 뭐냐?

첫째가 원각경 문수장 제일 먼저 나오는 거거든요.

거기서 무명을 탁 설명을 해요. 원각경 문수장에서.

운하무명고_ 어떤 것이 무명이냐?

망인사대하야 위자신상하고_ 사대를 허망하게 잘못 인식해서, 내 몸과 같이 생각하고

자신 상, 이건 내 몸뚱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게 무명이고요.

 

육진연형으로 위자신상이라_ 색성향미촉법,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걸 쫓아다니면서 붙잡으려는 그 생각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

우리가 나다 마음이다 하는 건 딱 2가지에요.

이 몸이 나고, 그렇죠.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거, 보는 이게 마음이고 듣는 거 이거 마음이고,

과거 생각하고 미래 생각하고 현재 생각하고

생각하고 쫓아가는 게 마음이지

대상을 인식하고 대상을 쫓아가고 대상을 기억하는 게 마음이지

대상 없는 마음을 우리는 안 적이 없거든요.

순전히 이게 무명이에요.

반연심이고 허망상인데 그걸 모르고

몸을 자기 몸이라 하고

또 뭘 쫓아가는 대상을 쫓아가는 생각을 자기 마음이라고 그런다.

 

그러면 여기서 진짜를 알아야 해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진짜를 아는 것을.

진짜를 어디 가서 아느냐? 그게 아니고

반연하는 마음, 이 몸이 나라고 하는 마음을 쏴악 가라앉혀 보면

거기서 하나가 마주치게 돼요.

거기서 , 이것이 그거였구나이렇게 알 때가 와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 이것이 그거였구나이렇게 알 때가 와요.

 

그럼 지금 왜 모르느냐?

이게 자기 생각에 딱 가려서 몰라요.

 

그래서 생각이 쭉 돌아와서 자기 마음을 딱 바라보고 깊어지면

, 그것이 이거였구나탁 알게 되는데

그거를 옛날 도인들이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밤을 알밤을 주워서 불에 넣으면 익을 거 아니에요.

요새 밤 구워본 기억들이 별로 없어 잘 모를 거예요.

옛날에는 화롯불에 밤 많이 구워 먹었거든요.

밤을 불에 집어넣으면요, 집불에 해야 잘 돼요, 장작불에는 타기만 하지 밑에 잘 안 익더라고,

은은한 불에 집어넣으면 이게 푹 익어서

다 익으면 뽕 터질 때가 와요, 밤이요.

그러면 껍질은 껍질대로 훌러덩 날아가고, 밤 알맹이만 탁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그와 같다.

 

이걸 폭지일파라고 그래요. 퍽 하는 사이에 생각이 푹 무너지는 거.

푹하는 사이에 막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하던 이 생각하는 마음이 푹 꺼 꺼져버려요.

 

와지일화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숨바꼭질할 때, 찾는 사람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탁 마주칠 때, 찾으려는 사람을 탁 마주칠 때,

, 여기있었구나, 이것이 그거였구나이렇게 아는게 깨달음인데

거기에 뭐가 남았느냐 하면

나는 알았다라는 게 남아 있는 거예요. 소득심이 있어요.

그건 아직까지 눈에 먼지 넣은 거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나는 본래 미한 일이 없었구나까지 알아요.

그걸 구경각이라고 그리고 그걸 대각이라고 그러거든요, 원각.

 

소득심이 남아있어요.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얻었다이 마음이 있으면

얻었다는 마음, 소득심이 남았다 이거에요.

얻었다, 이 마음이 소득심이에요.

 

그러니 얻었다는 마음이 싹 없어져요.

그러면 뭐냐?

나는 본래 미한 일이 없었다.

요걸 금강경 육조에서 어떻게 설명했냐 하면

깨닫는 건 2가지가 있는데

밖으로 깨닫는 건 외각이고요, 바깥 외, 깨달을 각

안으로 깨닫는 건 내각인데 안 내, 깨달을 각

외각이라는 건 뭐냐?

...

 

두 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수보리백불언 세존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불언 여시여시 수보리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백불언 세존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무소득야

불언 여시여시 수보리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내지 무유소법가득 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