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제 23장 정심행선분_ 청청한 마음으로 선법을 실행한다.
청정심으로 선법을 실행한다, 그런 말인데요
원문을 보겠습니다.
부차 수보리야_ 수보리야, 다시 또 말하자면
시법이 평등하야 무유고하하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_
이 법(반야)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의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_
이것의 이름이 가장 높고, 가장 바르게 깨달은 것이니라,
이렇게 출발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 법이라 그러면 처음에 금강경 제목이 반야바라밀경이고
그다음에 선남자선여인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니는, 이렇게 출발해요, 경 처음에.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 데서부터 금강경이 시작됩니다.
그게 대승불교입니다.
대승불교는 발보리심_ 보리심을 일으킨다. 이게 발보리심 이거든요.
발보리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이키는 거와 동시에 보살이 돼요.
그래서 처음에는 선남자 선여인이라고 했다가 그다음 설법은 전부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나옵니다.
선남자선여인하고 보살마하살의 차이는 뭐냐?
보리심을 일으키면 보살마하살이고, 마하살은 큰 사람이다 이 말이죠. 보살은 깬 사람이고.
보리심을 안 일으키면 선남자선여인이예요.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선남자 선여인이 발보리심하니는, 어떻게 어떻게 해라 해 놓고
그다음 세 번째 줄부터는 보살마하살이 여시항복기심이니라_ 이와 같이 중생의 마음을 항복시켜야 하나니라.
그 후로는 선남자선여인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전부 보살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면 전부 보살이에요.
여기서 보리심이란 뭐냐?
내내 반야바라밀 지혜심인데요,
그럼 여기서 지혜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첫째는
상에서 벗어나는 건데 그걸 무상이라고 그럽니다, 없을 무,
제상이 비상이다, 제법공상이다, 반야심경에서 하는 서로 상.
상에서 벗어나는 게 그게 보리심이에요, 그게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래서 그걸 무상이라 그럽니다.
무상이라는 게 뭐냐? 왜 상이 없느냐?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어상에 이상이라_ 상에서 상을 여여버려요. 상에서 상을 떠나버려요.
또 어심에 이심이라_ 마음에서 마음을 떠나버려요.
그래서 그걸 상을 여읜다 그럽니다. 그걸 무상이라 그래요.
외상내심, 이게 전부 상인데, 외상, 외진상_ 밖으로 티끌 상, 내심상_ 안으로 마음 상, 이게 전부 상인데, 진상이나 심상이나
상에서 상을 다 떠나버려요.
그게 무슨 소리냐?
눈을 상을 본다든지, 귀로 소리 상을 듣는다든지, 코로 냄새 상을 맡는다든지
맡는 거와 동시에
그것이 자체가 없고 허망하고 무상하고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딱 알기 때문에
거기서 더 이상 머물지 않아요.
거기서 나와 버려요.
그걸 상에서 상을 떠난다라고 말해요.
항상 상 속에 있으면서 보리심을 일으킨 보살은 무상에서 사는 거예요.
그게 유마경에서는 처렴상정이라 그럽니다_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깨끗하다.
우리가 상 속에 살아요.
눈으로 보는 상, 귀로 듣는 상, 코로 느끼는 상, 몸으로 느끼는 상, 상 속에 사는데
그것이 자체가 없고, 본성이 없고,
또 가합이고_ 인연에 의해서 거짓으로 합해진 것이고
무상하고_ 항상한 게 아니고
그래서 몽환과 같다_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라는 것을
반야보리심으로 딱 보니까 거기에 매이지를 않죠.
그래서 어상에 이상이라_ 상에서 상을 떠난다.
내심상이 있는데요, 생각이 막 일어나는데, 생각도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아서
일어나는 고향도 없고, 가는 목적도 없고,
그냥 아지랑이가 인연 따라 휙 일어났다가 휙 사라지고,
물거품이 휙 일어났다가 휙 사라지듯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심상도 허망하고 무상하고 자체가 없고 본성이 없고 그래요.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거기에 머물지 않아요.
생각에서 생각을 떠나버려요_ 어심에 이심이라.
그래서 항상 무상무념 속에서 사는 그게 반야요, 그게 보리입니다.
안으로는 생각에 집착이 없고 밖으로는 형상에 집착이 없어서
상에서 상을 떠나고 마음에서 마음을 떠나니
무상무념이 떡~ 되면, 그것을 무념이라고도 하고 무상이라고도 하는데
무상이 무념이에요.
무상이 되려면 상에서 상을 여의는 거지, 상을 없애는 게 아닙니다.
멸상이 아니고 이상을 하는 거다, 이거죠. 여읠 이,
거기에 집착을 안하는 거지 없애는 게 아니에요.
그게 반야입니다.
상에서 상을 떠난다 그래서 참선을 하더라도 이걸 해야 합니다.
뭐가 눈에 보여도 일체 신경쓰지 말아야 참선이 돼요.
생각이 일어나도 일체 신경쓰지 말아야 참선이 돼요.
그래서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는데,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거기에는 전혀 끌려가지 마라.
무엇이 보여도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어떤 게 보여도 전부가 허망하고 무상하고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_ 무릇 보이는 모습은 다 허망한 것이다.
제상이 비상이라_ 모든 상이 상이 아니다.
일체유의법이 여몽환포영이라_ 모든 있는 바 법은 꿈과 환상, 거품 그림자와 같다.
이게 전부 상이 없다는 얘기거든요.
밖으로 보이는 형상과 안으로 일어나는 생각에 전혀 요동함이 없는 그게 무상입니다.
그걸 상을 여읜다고 이상이라고도 합니다.
그게 발심이에요. 이상발심이에요. 이상반야입니다.
상에서 상을 여의는 반야가 그거에요.
그다음에 무주반야인데요, 뭐가 보이든 들리든 거기에 애증심을 안 일으켜요.
좋아한다든지, 싫어한다든지.
왜냐하면 상이 공한 거기 때문에요.
상에서 상을 떠나니까, 애증이 없어요.
그걸 무주라고 그래요. 머물지 않는다.
느끼는데 느끼는 건 지혜이고, 애증을 안 일으키는 건 선정입니다.
그게 정혜쌍수이에요.
응무소주이생기심이고_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드러낸다.
뭘 보더라도 그냥 보고 알 뿐이지, 그것에 좋다 나쁘다, 분별하고
또 좋은 것이라고 분별되어진 것은 탐내고
나쁜 것이라고 분별되어지는 건 버리려고 하는데 안 버려지면 성내고
이 중생이 살아간다는 건 탐냄 성냄 그것 뿐이거든요.
성 안내면 탐내고, 탐 안내면 성내고.
탐내다가 마음대로 안되면 성정리해 버려요. ㅎㅎ
똑같아요, 그게요.
탐내니까 성내지 탐 안낸 건 성 안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신경질 내지, 안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신경질 안 냅니다.
신경질 내는 사람은
“저 사람이 나를 어지간히 좋아하고 있구나” 그렇게 알면 돼요.
저기 아프리카 누구 모르는 사람한테 성낼 리가 있어요?
그러니까 좋아하다 보면 거기서 슬픔이 생기고,
좋아했는데 떠났다든지 안 보인다든지 죽었다든지 하면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전부 다 자업자득으로 내가 좋아해서 일어난 슬픔입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건 슬픔이 전혀 없습니다.
저 허공을 향해서 슬퍼하는 사람 없어요.
저 허공,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슬퍼합니까? 그렇잖아요.
그런데 사람뿐만 아니라 강아지라도 오래오래 정을 주고, 그걸 키우고 가꾸고 거두었는데
갑자기 죽어봐요.
사람 죽은 그거보다 훨씬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모르고
“아이고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하냐? 그러면 신경질 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슬퍼한 사람한테 가서 슬퍼하지 마라, 그따위 소리하면 마음을 너무 모르는 거예요.
미워하는 사람 옆에 가면 미워하지 마라 절대 그러지 말고요
”아무개가 미워서 못살겠다“ 그러면 같이 따라서 그 사람 욕해주면 되는 것에요.
그게 위로에요.
그냥 속으로는 아닐값에 그냥 막 그 사람보다 욕을 더 해주면, 오히려 그 사람이 뒤로 물러나요.
왜냐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보게 되거든요.
그래야지 ”슬퍼하지 마라, 그런 일 갖고 그럴 거 있나“ 이랬다간
완전히 거슬리는 거라 안되는 거거든요.
위로라는 게 그런 겁니다.
그 사람이 울 때는 ”울지마라“ 그러면 안되고요, 같이 울어주면 그게 위로에요.
그게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할 때는 ”뭘 그렇게 좋아할 게 있노?“ 이따위 소리 했다는 안되는 거예요.
같이 웃어주고.
그러니까 상갓집에 가서 노래 부르면 큰일 나거든요.
눈물 이상 거기 위로가 없어요, 사람 죽은 데 가서는.
또 경사 난 잔칫집에 가서는 웃음, 노래, 춤, 이런 거 이상 더 뭐가 있어요?
거기 가서 울어 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내가 좋도록 만들어서 좋은 거지, 전부 다 자업자득이지
가지가 좋은 걸 만들어 놓고, 자기가 슬픔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좋은 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그 여파가 나중에는 슬픈게 굉장히 깊게 와요.
좋은 것이 없으면 슬픔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한 것만큼 슬픔이 오는 거예요.
그게 인과이고 그게 바로 법칙입니다.
그런데 반야보살은 그렇지 않아요.
애와 증에 머물지 않아요.
그게 무주입니다.
그래서 딱 보되, 막 좋아한다든지, 막 싫어한다든지, 요게 무주이고
머묾이 없어요, 좋아하는데도 머물지 않고 싫어하는데도 머물지 않고
무상무주.
그다음에 묘행이에요. 묘행.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아니하면서 지혜와 자비를 가지고
선행을, 여기서 말한 선법을 계속 닦아요.
이것이 정심행선입니다_ 청정한 마음으로 선법을 실행한다.
정심이라는 건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무상무주를 말하는 거예요.
그러면 행선이라는 건 온갖 공덕행을 다 닦습니다.
그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보살이고 그게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애증 없이 선법을 닦는다, 그게 최상의 지혜에요.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 무주 무상의 상태에서
선법을 계속 닦아나가는 거죠.
그럼 닦아서 뭐 하냐?
내가 받는게 아니고요 다 회향을 해요.
그게 지혜를 닦는 방법이에요. 지혜.
그게 반야바라밀입니다.
여기서는 제일 먼저 평등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랬거든요. 평등.
평등이니까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으니까
반야바라밀 깨달은 세계에는 일체 상이 없어요.
보이는 게 있느냐 하면 보이는 것도 없고, 안 보이는게 있느냐 하면 안 보이는 것도 없고
높은 게 있느냐 하면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게 있느냐 하면 낮은 것도 없고
시작이 있느냐 하면 시작도 없고, 끝이 있느냐 하면 끝도 없고.
상이 없어요.
상이라는 건
본래 있는 게 아니고, 중생의 생각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거든요.
이걸 유심소현이라고 그럽니다_ 현상은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생각이 보리심으로 쓱 바뀌니까
생각은 뭐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그런 거 잖아요.
그게 중생의 망념인데,
이 망념이 반야바라밀로 쓱 바뀌니까 반야바라밀로 딱 볼 때 무상이에요.
길다 짧다, 시작이다 끝이다, 이건 전부 마음에 의해서 나타난 바다.
우리가 전부 자기 마음에 속아 사는 거예요.
”야, 일찍 왔다“고, 내가 일찍 왔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제 그제 그끄저께 있었는데 뭐가 일러요?
”왜 이렇게 늦었나?“ 자기보다 늦게 왔다는 거지
내일 모래 그모래, 미래제가 끝이 없는데 뭐가 늦은 겁니까?
늦다 이르다, 낮다 높다 이건 전부 나를 기준으로 한 생각입니다.
내 생각에 평생 속아서 사는 거예요.
그게 중생이에요.
기가 막히는 거예요.
자기 생각 놀음에 인생이 갑니다.
그리고 또 인생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그러고. ㅎㅎ
그게 인생이에요.
인생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고
아이 모르긴 왜 몰라요, 할머니 가는 거 다 보고, 어머니 아버지 가는 거 다 봤는데
왜 자기만 안 간다고 생각하고, 그런 거잖아요.
고하가 없다가 바로 이겁니다.
그래서 시법이 평등하야 고하가 없으니_ 고하가 없다라는 건 평등하다 이 말이에요.
반야바라밀은 평등이다, 이렇게 얘기가 되는 것에요.
평등을 깊게 알면 그건 깨달은 거예요.
생각이 아니라 평등을 깊게 알면 그건 깨달은 거다.
이 무아무인 무중생 무수자로_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마음으로
요걸 무상이라고 그래요. 반야바라밀은 무상이다.
반야바라밀은 평등이다.
반야바라밀은 무상이다, 이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소상대상 무상유상 법상비법상
일체 상이 없는 이게 반야바라밀이에요.
그러한 무상의 마음으로
수일체선법하면_ 일체 선법을 닦으면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로 요건 무상이고요.
수일체선법이라_ 일체 선법을 닦으며
요건 무상은 정도,
상이 없는 건 아주 바른 도, 도 자체에요, 바를 정, 길 도,
무상은 정도라.
도는 무상이에요. 거기에는 있다 없다, 부처다 중생이다, 좋다 나쁘다 없어요.
본래 무일물이라_ 본래 한 물건도 없다. 이게 무상입니다.
무상은 바로 정도이고.
그럼 일체 선법을 닦는다 라는 건 뭐냐?
조도라 그럽니다. 도울 조, 돕는다, 조, 조교 할 때. 조교는 돕는다는 말입니다.
조도가 있어요.
그래서 모든 선행을 닦는 건 전부 조도라 그럽니다.
삼십칠조도품이라, 조도행이라,
그래서 선행을 닦아가는 이건 조도에요.
도를 돕는 거예요.
그래서 일체선행을 닦으면 바로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나리라_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라.
여기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뭐냐?
일체상, 수일체선, 그거에요.
일체 상을 여의고 일체 선을 닦는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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